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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식 스트리머-15화 (15/57)

〈 15화 〉 적응 (4)

* * *

보글보글.

냄비의 물이 잘도 끓는다.

커피포트 같은 아주 편리한 현대 문물은 아쉽게도 집에 없어서,

대충 냄비에 수돗물을 받아가지고 이 판때기…. 이거 뭐라고 하더라.

아. 그래. 인덕션 위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인덕션을 끄고, 김이 펄펄 피어오르는 소형 냄비 손잡이를 잡아 탁자로 가져간다.

미리 뚜껑을 따서 분말스프를 부어 놓은 도시락 컵라면 용기에 조심히 뜨신 물을 붓는다.

표시된 선까지 물이 차오르면, 얼른 냄비를 원위치 시키고 재빨리 뚜껑을 닫아 준다.

집에 시계라고 할 만 한 놈이 없어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 표시줄 구석의 시간으로 3분을 체크한다.

컵라면이 익을 동안 가볍게 타자 연습을 진행한다.

아직까진 자판을 들여다보면서 독수리타법을 하는 수준이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이렇게 헷갈릴 일이었나.

‘시발’을 치려고 하면 자꾸 손가락이 꼬여서 ‘ㅅㅂ리ㅏ’ 등등의 괴문자로 변하는 현상을 몇 번이나 겪고 나니 슬쩍 열불이 솟아오르려 한다.

다행히 성질이 뻗치기 전에 3분이 지나가서, 나는 곧장 종종걸음으로 탁자 위의 도시락에게 다가갔다.

의자에 앉아 뚜껑을 여니, 아주 적당히 익은 컵라면 면발이 모습을 드러낸다.

군침을 돌게 하는 그 자극적인 냄새가 내 콧속을 간질인다.

그에 흐흫 웃으며 포크를 꺼내들… 지는 못 했다.

내게는 컵라면을 살 때 딸려 온 나무젓가락밖에 없었다.

종이 껍질을 벗겨내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나무 쪼가리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그러고 있자니 한국인의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반으로 갈라서 젓가락으로 사용하는 물건이구만. 오케이.

끄트머리를 양 손으로 잡고 벌어진 틈새에 힘을 주어 똑 하고 쪼갠다.

근데 젓가락 안 잡아 본 지 5년은 됐는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가물가물한 머릿속 기억을 따라 어떻게든 손가락을 꼬아서 나무 막대기 두 개를 잡으니,

대충 면발 정도는 그 사이에 끼워서 입에 가져갈 수준이 되었다.

도시락 컵라면 면발을 휘휘 저어서, 한 젓가락 집어 올린다.

후우 후우 불어서 대충 열기를 날리고, 그대로 입 속으로 직행한다.

뜨겁긴 한데, 이 정도야 뭐.

혀에 담배빵 지지는 것보단 덜 뜨시다.

“…!”

헌데,

담배빵이건 배빵이건 뭐가 됐든 간에,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라면 맛 자체는 도시에서 처먹던 그 느낌이었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날카롭게 혀를 자극해 오는 이 고통은….

분명 매운맛이었다.

거기에 뜨거운 온도까지 더해지니,

누가 내 입 속에 최루탄이라도 까 넣은 듯한 데미지가 지속적으로 들어온다.

“쓰윾끄…!”

(Cyka)

이런 시이발, 존나 맵네.

다쉬락이 이렇게 매웠던가? 아닐 텐데.

거기서 먹던 건 좀 더 부드럽게 혀를 감싸는… 뭐 대충 그런 순한 맛이었는데.

매운 거 좋아하는 한국인 에디션이라 맛이 다른 건가?

그 와중에 맛은 더럽게 좋아서, 차마 뱉지도 못하고 면발을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는다.

화끈한 매운맛에 저절로 눈물이 핑 돈다.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들어 차가운 물을 들이켜도 영 고통이 가라앉질 않는다.

“쓰으읍…”

입에 바람을 집어넣으며 저 망할 놈의 컵라면이 왜 저렇게 매워졌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자니, 문득 도시에서 저걸 먹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불을 피우든 어디에서 얻어오든 간에 뜨거운 물을 끓여와서 용기에 붓고,

탁한 백색의 내용물이 들어 있는 병을 하나 꺼내 들어서,

그 안에 담긴 녀석을 몇 스푼…

“아.”

그 시점에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왜 이렇게 매운가 했더니,

마요네즈를 깜빡하고 안 넣은 것이었다.

그 도시에서 처음 도시락을 접했을 때는 그냥 매워도 참고 먹었지만,

거기에 마요네즈를 넣게 된 계기가 있었다.

마요네즈에 미친 새끼가 한 놈 있었는데,

이 컵라면을 먹을 때마다 한번 속는 셈 치고 넣어보라며 옆에서 하도 지랄을 해댄 것이다.

계속 무시하다간 귀때기에 피가 날 것 같아서 한 번 그렇게 먹어 봤더니, 인정하기 싫을 만큼 맛이 기깔나서 깜짝 놀랐다.

지나치게 매운 맛을 중화시키면서, 동시에 풍미를 한층 부드럽게 만드는 마요네즈의 마법.

그 맛에 반해서 그 다음부터는 꼭 마요네즈를 넣어 먹게 되었는데,

하필 나한테 끈질기게 마요를 권하던 그 놈에게 그 모습을 발각당하고 말았다.

우리 꽐라 마녀님 입은 존나게 거친데 몸은 솔직하기 그지없다면서 깝죽거리길래,

포크를 탁 튕겨서 두 눈깔을 라면 국물로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뭐 아무튼 간에.

이 몸으로 변하면서 입맛이 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요네즈 최고다. 너무 좋아.

근데 지금은 없네. 시발.

일단 꾹 참고, 컵라면을 마저 먹어치우기로 했다.

지금 편의점으로 달려가서 마요네즈를 사와 봤자,

탱글한 면발들이 죄다 불어 버려 거지같은 식감으로 변모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Blyat…!”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사각형 용기를 싹싹 비워 낸다.

내일은 무조건 마요네즈 살 거야.

없는 살림에 마요네즈까지 구입해 버리면 앞으로의 나날이 불확실해지겠지만,

모든 끼니를 이렇게 개같이 매운 놈으로 때우는 것보단 훨씬 나을 듯하다.

약간의 행복과 대량의 고통으로 이루어진 식사를 끝마치고,

몸을 씻기 위해 옷들을 벗어던진다.

다이­아스 저지를 벗어서 옷장 속 옷걸이에 걸어 놓고,

그 안에 받쳐 입고 있던 싸구려 티셔츠를 벗어 싱크대 아래에 있는 세탁기에 던져 넣는다.

마찬가지로 다이­아스제인 레깅스와 스포츠 브래지어, 드로즈 등의 속옷을 몸뚱아리에서 벗겨낸다.

그것들 역시 세탁기에 넣고 나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살려서 어찌어찌 액체 세제를 넣고 세탁기를 작동시키는 것까지 성공한 뒤, 매끈한 배때지를 긁적이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을 바라본다.

5년 동안 질리도록 보았던 빌어먹을 몸뚱이가 홀딱 벗은 채 거기에 서 있었다.

머리를 대충 짧게 자른 슬라브 년이 거울 속에서 멍청한 표정으로 잿빛 눈을 깜빡인다.

“…”

별 생각 없이 손을 들어 뺨을 톡톡 친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창피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높은 집안 딸내미 같은 이 면상이 존나게 예쁘다는 자각은 하고 있다.

골반에 손을 탁 얹으면 아주 편안함이 느껴질 정도로 손바닥을 잘 받쳐주는 만큼, 몸매 자체도 얼굴만큼이나 고급지다.

게임 속의 몸뚱이라 최대한 이상적인 체형으로 구현되기라도 한 것 같았다.

“흐흫.”

어디서 이상한 책이라도 읽었는지 나보고 도시 내 최상위 랭크인지 뭔지 하는 병신 같은 소리를 지껄이던 놈이 문득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그 새끼는 비극적이게도 왜색에 흠뻑 취한 멍청이의 일본도에 베여 죽었다.

그런 걸 대체 어디서 갖고 온 건지 꼭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한테도 하이=얏 하고 덤벼들길래 깜짝 놀라서 무심코 권총으로 마빡에 바람구멍을 내 버리는 바람에, 답변을 들을 기회는 영영 날아가고 말았다.

놈의 카타나를 쪼만한 년에게 휘둘러보라고 쥐여 줬더니 애꿎은 나무 의자 하나만 박살내고 존나 불편하다며 내던져 버렸던 기억도 난다. 무기 좀 휙휙 던지지 말라니까, 개 같은 년.

샤워기와 연결된 수도꼭지를 개방하자, 샤워기에서 잘게 나뉜 물줄기가 발사된다.

존나게 차가웠지만, 그 좆같은 도시에서 온수 샤워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었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그 냉기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수도꼭지를 돌려서 온도를 맞춰 본다.

이내 조금씩 물이 미지근해지더니, 따뜻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녀석으로 변한다.

“후우…”

5년 만에 느껴보는 그 포근한 온기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 원래 세계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그 현실감이 온 몸으로 쏟아진다.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고 있다가,

또 환청이라도 들려올까봐 머리를 푸르르 털어 잡생각을 떨쳐내고 얼른 몸을 씻어낸다.

세안에 양치에 머리 감고 샤워까지, 아무튼 열심히 몸을 씻었다.

샴푸와 바디워시를 사용하고 나니 향긋한 냄새를 잔뜩 풍기게 된 몸을 이끌고, 화장실 밖으로 나가서 옷장의 맨 아래쪽 서랍을 연다.

아까 방을 뒤져볼 때 여기에서 속옷 같은 것을 본 기억이 있었는데, 다행히 내 대가리는 아직 멀쩡했나 보다.

스포츠 브래지어와 드로즈, 그러니까 아까 내가 입었던 종류와 동일한 속옷이 2장씩 있었고,

양말도 그 옆에 2켤레가 놓여 있다.

그리고,

내 것이랑 똑같은 녀석들이기에 당연히 모두 다이­아스 의류들이다.

불만은 없다.

오히려 다이­아스가 아니었다면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편해서 입은 거라면, 이제는 거의 징크스에 가깝다.

다이­아스와 함께 하지 않으면 무언가 안정감이 부족했다. 마음속이 든든하질 못 했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5년 동안 그 거지같은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런 사소한 심리적인 요소도 중요하게 작용했기에, 그만큼 이 삼선 디자인의 브랜드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다이­아스 모델 일 같은 건 없나. 존나게 열심히 할 자신 있는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옆 라인에 세 개의 줄이 새겨진 드로즈 하나를 꺼내 입고 바로 윗 서랍을 열어 티셔츠를 끄집어내 몸에 걸친다.

이 셔츠도 가슴팍에 희미하게 다이­아스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편안하구만.

옷장 서랍을 닫고 방의 불을 끈 뒤, 그대로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한 매트리스와 그 밑의 스프링이 내 몸뚱이를 안정적으로 받아 준다.

그 위에서 몇 번 뒹굴거리다가, 이내 바른 자세로 누웠다.

금방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깨끗한 천장을 맞이한다.

원래 세계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보게 된 그 하얀 마감재를 멍하니 쳐다본다.

정말로, 꿈은 아니겠지.

이대로 눈을 감았다가 뜨면, 다시 그 허름한 천장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자꾸만 불안감이 스멀스멀 밀려들어 온다.

그에 나는 눈꺼풀을 꽉 닫으며 이를 악물었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자고 일어나서도 그대로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다면 잘 된 일인 거고,

만약 이 모든 게 다 거지같은 꿈이었다면,

그냥 시원하게 욕 한 사발이나 내뱉고 은신처에 숨겨 둔 고급진 보드카나 들이켜야지, 뭐.

그래.

벌써부터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그냥, 내일 일어나 보면….

알 수 있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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