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 적응 (5)
* * *
“야, 마녀.”
“왜.”
“여기서 나가면, 뭐 하고 살 거야?”
고개를 들어 우중충하기 그지없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작달막한 년은 내게 그런 질문을 툭 던졌다.
슬라브 스쿼트 자세로 쪼그려 앉아서 싸구려 증류주를 한 모금 들이키던 나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알 수 없는 힘에 가로막혀 도시 밖으로 나가지도 못 해서 이리 아득바득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걸 물어 봤자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모르겠는데. 너는?
넌 뭐 생각해 둔 거라도 있냐?”
대충 그렇게 얼버무리며, 역으로 상대에게 같은 것을 묻는다.
“…나?”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던 그 년은,
이내 입꼬리를 작게 비틀어 올렸다.
“나도 잘 몰라.
그래도 전에는 씨발, 뭐라도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녀의 입가에서 씁쓸한 미소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이젠, 모르겠어.
그냥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거에 감사하면서, 보드카나 존나게 들이키는 거지.”
그 말에 픽 웃으며, 옥상 난간에 거치해 놓은 모신나강의 개머리판을 쓰다듬는다.
둘둘 감겨 있는 하얀 붕대의 감촉을 느끼던 나는,
문득 자그마한 위화감을 느꼈다.
“…보드카?
너 내가 준 거 한 잔 마시고 뻑갔잖아. 그새 주량 늘어났냐?”
생각 없이 건넨 보드카 한 잔에 훅 가버려서 나나 저 년이나 고생한 뒤로는,
그 조그만 입에서 보드카를 들이키겠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내가 그리 묻자,
상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야.”
“?”
“아직도 모르겠어?”
그녀는 하늘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스윽 내려,
내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상대의 얼굴은,
어느새 내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시뻘건 광기가 서려 있는 잿빛 눈동자를 번득이며,
고급진 이목구비를 살짝 찡그린 내 면상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거 니 얘기잖아. 병신아.”
“카키예?”
(뭐라고?)
눈을 번쩍 떴다.
새하얀 천장이 나를 맞이한다.
“….”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벌떡 일으켜 주변을 둘러본다.
거지같은 도시에선 결코 볼 수 없는, 평화롭고 깔끔한 분위기의 원룸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아.”
원래 세계로 돌아왔던 게, 꿈이 아니었구나.
나는 정말로 게임 속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복귀한 것이다.
알코올에 망가진 뇌가 멋대로 만들어낸 환상이 아니라는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이었지만,
아직도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그 꿈속의 목소리가 내 기분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었다.
하루하루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며 보드카나 들이키는 삶.
그게 내 얘기라니.
부정할 수 없는 것이 슬플 따름이다.
한숨에 욕지거리를 섞어 내뱉으며,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벗어난다.
그래. 그 망할 도시에서는 그렇게 살아 왔지.
근데 그게 내 잘못인가?
어제까지 웃고 떠들던 놈이 고깃덩이가 되고.
내 옆에서 맥주 마시던 년이 폐허에 파묻히고,
시끌시끌하던 사람들이 바로 다음 순간에 죄다 온기를 잃고 침묵한다.
5년 동안 그런 살벌한 광경이 수도 없이 눈앞에 펼쳐지며 내 정신을 뭉개려 드는데.
독한 술이 안 들어가고 배기겠냐고, 시발.
그 거지같은 도시의 광기를 버티지 못해 먼저 떠난 이들의 넋을 기리고,덤으로 울적한 내 기분도 좀 달랠 겸,
그렇게 보드카 한 병 허공에다 건배하고 들이키는 게 뭐가 어때서.
“Cyka…”
무언가가 마음속에서 울컥거림에,
나는 참지 못하고 냉동고 문을 열어젖혀 내용물이 3분의 1쯤 남아 있던 보드카 병을 꺼내들었다.
뚜껑을 따서 차디찬 40퍼센트 알코올의 생명수를 목구멍에 들이 붓는다.
싸늘한 기운이 입 안을 휘감았다가 식도를 타고 쓰르륵 내려간다.
뜨겁게 익어가는 대가리에 냉각수를 갖다 부으니, 좀 살 것 같다.
“후우.”
그래.
5년 동안 좆같은 일들을 많이 겪었고, 엿 같은 삶을 꾸역꾸역 살아 왔다.
모국어 말하는 법도 그새 잊어버릴 만큼, 정신적인 데미지를 존나게 받아 왔다.
하지만 결국, 그런 삶은 과거의 일이 됐다.
어쨌든 이렇게 현실로 돌아왔으니, 알코올에 점철되어 헤롱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거의 비어 가는 보드카 병을 다시 냉동고에 집어넣고,
고개를 양 옆으로 꺾어 가볍게 목 운동을 하며 화장실로 향한다.
원래 세계에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알아봐야 할 것이 많다.
슬슬 움직이자.
어제 깜빡하고 세탁기에서 빨랫감을 안 꺼낸 것이 떠올라,
Blyat을 외치며 세탁 코스를 한 번 더 돌린 뒤 베란다에 설치되어 있는 건조대에 널어놓았다.
속옷처럼 옷장에 2벌씩 마련되어 있던 다이아스 레깅스와 저지 등을 챙겨 입었다.
아무래도 그 도시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입었던 옷이 죄다 몇 벌씩 복제되어 내게 제공된 듯 했다. 옷이 복사가 됐다고.
아침은 방금 보드카 몇 모금으로 해결한 셈 치고, 본격적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뭐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정보 수집을 포함해서 지금 내게 필요한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제일 먼저 들린 곳은 은행이었다.
ATM으로 다가가니, 대가리 속에 잠들어 있던 한국인의 지식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서 이거 사용하지 말고 그냥 모바일뱅킹을 쓰라며 훈수를 둔다.
스마트폰도 없는데 개소리야, 미친놈이.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한동안 ATM 앞에 서서 내 은행 계좌를 확인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비밀번호를 3번 틀리면 좆된다길래 잔뜩 쫄아 있었지만, 허무하게도 한 번 만에 비밀번호를 뚫어냈다. 이 몸뚱아리의 신분증에 적혀 있던 생일인 1217이었다.
존나게 허술한 그 비밀번호에 경악하기도 잠시,
나는 계좌 잔고의 액수를 확인하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18,250,000원]
계좌에는 1825만원이 들어 있었다.
1825가 어디에서 튀어나온 숫자일까 잠시 생각해 보니,
5년이 총 1825일이라는 것을 파악해 낼수 있었다.
그에 저절로 미간이 팍 구겨졌다.
이가 바드득 갈린다.
아, 그러니까.
거기에서의 하루 치 목숨 값은 1만원이었다?
보드카 마렵게 하네, 개새끼가.
편의점을 둘러보며 대충 한국의 물가를 기억해 낸 상태였기에,
5년 생존의 보상이 2천만 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내 머리에 열을 오르게 하기 충분했다.
마음 같아선 다 때려 부수고 싶었지만, 은행에는 죄가 없다.
게다가 무장도 없는 맨손으로 그렇게 지랄을 했다간 저 뒤에 서 있는 경비원에게 험한 꼴을 당할 확률이 아주아주 높았다.
나는 얌전히 ATM 앞에서 물러나 대기용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잠시 양 손으로 대가리를 붙잡으며, 행복회로를 돌려 분노를 가라앉힌다.
뭐 그래도 아예 돈이 없는 건 아니니까,
아까 병에 남아 있던 보드카는 오늘 다 마셔도 되겠네.
아이고 좋아라, 시발.
창구로 가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계좌 비밀번호를 변경했다.
컴퓨터로 계좌 관리가 가능한 인터넷 뱅킹인지 뭔지도 같이 신청했다.
모바일 뱅킹도 같이 연동하겠냐는 물음에 스마트폰이 없다고 답해 주니 창구 직원의 표정이 오묘해진다. 나도 이상한 거 알아 임마.
은행 외에도 몇 군데를 더 방문한 뒤, 점심때가 되어 집에 도착했다.
혹시나 해서 키패드에 1217을 입력하니, 띠리링 하고 문이 열린다.
당장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으로 도어락 비밀번호 변경 방법을 검색해 번호를 바꿔 버렸다.
옷 같은 건 두 벌씩 잘 준비해 줬으면서 왜 이런 건 대충인 건데.
사실 그 여벌옷들도 내 기준에서만 합격점이었던 건가?
그런 의문을 뒤로 하고,
냉장고 위에 켜켜이 쌓아 두었던 도시락 컵라면들 중 하나를 가져와 네모진 뚜껑을 땄다.
이번엔 잊지 않고 편의점에서 사 온 마요네즈를 도시락에 넣었다.
숟가락으로 내용물을 떠내는 병 모양이 아니라 순간 당황했지만, 이렇게 눌러서 쭉 짜내는 주머니 형태가 훨씬 편했기에 불만은 없었다.
컵라면 맛은 마요네즈를 넣고도 살짝 매웠다.
아무래도 러시아와 한국 제품 간에 매운맛의 강도 차이가 존재하는 듯 했다.
점심을 해결하고 쓰레기를 정리한 뒤,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얻어 낸 정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계좌 잔고는 1825만원. 엿이라도 먹으라는 듯이 정확한 계산으로 5년 동안 1일당 1만원이 적립된 모습이다.
책상 서랍에 들어 있던 계약서에 따르면, 이 집은 월세다.
보증금은 1천에, 달마다 40만원이 통장에서 빠져나간다.
그리고,
이 몸뚱이 ‘이리나’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가족관계증명서에서 부모가 적혀 있어야 할 칸이 텅 비어 있었다.
원래 세계에 없던 사람을 새로 만들어 낸 것이나 다름없으니,
성장 배경이고 뭐고 일단 내 신분이 합법이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일처리가 된 듯한 느낌이다. 이 집 A/S가 상당히 개판이네.
내가 뭐 어디서 어떻게 자랐는지 설명하고 다닐 것도 아니니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진짜로 문제가 될 만 한 건, 역시 돈이었다.
누워가지고 숨만 쉬면서 월세만 내도, 가진 돈으로 2년을 못 버틴다.
기본적인 생존에 필요한 비용과 보드카 등의 추가 지출까지 생각하면, 반드시 돈 벌 구석이 있어야 했다.
"후..."
거지같네.
한국말도 제대로 입에서 안 튀어나와가지고 은행이랑 동사무소에서 진땀을 뺐는데, 일자리는 또 어떻게 찾아야 하나.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현실에, 냉동고에 넣어 뒀던 보드카 병을 다시 꺼내들어 홀짝였다.
이거 다 마시면 이제 집구석에 남아 있는 보드카는 1병밖에 없다.
방법이 없을까.
이 몸뚱이의 특기도 살리고,
말이 어설픈 것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돈벌이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머릿속에 알코올을 주입하고 있자니,
문득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냅다 살려달라며 소리를 지른 것을 시작으로 기묘한 인연을 맺게 된 그녀, 달퐁.
도시의 그 쪼만한 년을 닮은 그 인간이,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무엇을 하고 있다고 했지?
“…!”
즉시 마우스를 붙잡고 인터넷 브라우저 아이콘을 클릭한다.
연고도 뭣도 없이 그저 5년간의 게임 속 생존 경험밖에 존재하지 않는 병신이라도,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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