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슬라브식 스트리머-23화 (23/57)

〈 23화 〉 슬라브식 해명 (1)

* * *

“그…. 님 마시던 보드카를 해명하라는데요?”

“…?”

그 말에, 내 의문은 더 깊어져만 갔다.

보드카를 왜?

방송에서 보드카 마시면 법적으로 문제라도 생기나?

허나 달퐁도 시청자도 그러한 지적은 한 적이 없었는데.

심지어 시청자들 중 한 놈은 내가 마시고 있던 보드카 도수까지 후원 메시지로 물어보지 않았는가.

대가리가 복잡해지는 기분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내 심정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전혀 이해 못 하다. 보드카 해명 이유 무엇인가?”

“네? 님 시루갤 안 봤­

아. 밥 먹느라 못 보셨나?”

시루갤?

거기에서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 건가. 우리 보드카 동무가 뭘 잘못했다고.

마요네즈 넣은 도시락 컵라면으로 늦은 저녁을 먹느라 컴퓨터 앞에 앉아있지도 않았기에,

나는 달퐁의 말에 긍정을 표했다.

“시루갤? 현재 열람 안 하다.”

“어…. 그냥 제가 설명해드릴게요.

이리나가 아까 방송에서 막 도끼로 사람 썰고 다녔잖아요?”

“맞다.”

“거기까진 뭐 명장면도 뽑고 되게 좋았는데,

사람들이 이제 그거 보고 의심을 하는 거예요.”

“의심?”

의심할 만한 게 뭐가 있는 거지?

설마 내가 뭐 불법 프로그램이라도 사용해서 그런 장면을 만들어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내 컴퓨터에 설치된 프로그램 내역을 죄다 까발려서 해명하면 되겠는데,

내가 그냥 마시고 싶어서 마시는 보드카를 왜 걸고넘어지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게 답답한 심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니,

이내 달퐁의 목소리가 헤드셋을 타고 귀로 흘러들어왔다.

“네. 그…. 이건 저도 좀 궁금하긴 한데,

40도 넘는 술을 그렇게 계속 마시면서, 게임을 어떻게 하냐고….”

“아.”

그것을 듣는 순간,

머릿속의 의문이 싹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게임 세계에서 주워 온 내 몸뚱아리와,

원래 세계에 살던 일반인들의 몸.

그 사이에 존재하는 주량에 대한 차이를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시에서 죽기 살기로 버티다가도, 언젠가 한 번쯤 한계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하루하루 목숨을 쟁취해 내야 하는 삶을 살며, 계속해서 정신을 갉아 먹힐 바에야,

그냥 입에다가 독주를 한껏 들이 부어서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끝내버리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은신처에 있던 술이란 술은 다 꺼내 왔다.

한 병씩 까서, 그대로 주둥이에 꽂아 넣고 병나발을 불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꿀꺽꿀꺽 술병을 비워나갔다.

병을 하나씩 비워나갈 때마다, 점점 흥이 솟아올랐다.

한참 전에 잃어버렸던 행복을 되찾은 듯이 기쁘게 웃었다.

뒤질 때가 되어서야 행복해지는구나.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끝없이 고통 받느니 차라리 이게 훨씬 낫다.

그런 생각으로 계속해서 알코올을 목구멍에 들이 부었다.

혈중 알코올 농도가 진해질수록 나는 행복에 겨워 소리를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마시고 또 마셨다.

주위에 빈 병이 계속해서 쌓여 갔다.

물론 결과는,

지금 내가 여기서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만 봐도 이미 뻔한 일이었다.

부작용이 있기는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 내내 대가리가 어지러워서 살짝 고생했다.

신체에 나타난 이상은 그게 끝이다. 감정 무뎌진 거야 뭐 원래 그랬었고.

아껴 먹어야 했던 내 술들이 한순간에 전부 사라져 버려서 매우 좆같았던 거 말고는, 별 거 없었다. 그 뒤로 은신처의 컬렉션들을 다시 모으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여기 오면서 다 잃어버렸지.

시발.

아무튼,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미친년의 몸뚱이는, 사실상 정해진 주량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대가리에 독한 알코올을 퍼부어도 취해서 널브러지기는커녕, 오히려 수행 능력이 증가하고 거지같던 기분을 완화시켜 주었다.

원래 그랬던 건지 아니면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있어서 술은 정신 보호 및 각성 비스 무리한 효과를 내는 약물과도 같았다.

이렇게 도시의 기억 중에서도 상당히 거지같은 것들 중의 하나를 떠올리게 되니,

기분이 상당히 오묘하다.

­…!

헤드셋을 꼈는데도 귀가 살짝 간지럽다.

근데, 오묘해? 어떻게 기분이 오묘할 수가 있는 거지?

당연히 쌍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분을 잡치는 게 정상인데.

­…!!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달퐁의 마이크에서 들려오는 잡음인가?

­…!!!

그리고 그 술이 내 몸뚱아리에 미치는 효과 말인데,

대가리가 이미 알코올에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그런 효과가 있다고 착각하는 것일 가능성도 있다.

­…탕! 탕!!

차라리 그게 나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도 사실 대가리가 만들어 낸 착각인 거지.

얼마나 평화로운 일상을 갈구했으면 이런 환각까지 만들어내는 걸까.

­타탕! 타타탕!!

정신 차려, 미친년아.

니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야.

저기 총 소리 들리지? 빨리 현관에 있는 네 군화 신고 뛰쳐나가.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우리 집이 어딘데?

“Cyka­!!”

“아잇, 깜짝아!”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며 걸쭉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보드카를 황급히 집어 들어,

그 안에 남아 있던 내용물을 전부 비워낸다.

기습적으로 치고 올라오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알코올에 싹 쓸려 내려간다.

귓가를 먹먹하게 만들던 총성 또한 자취를 감춘다.

“후우…”

고맙다, 친구야. 또 신세를 지는구나.

도시에서의 추억은 웬만하면 떠올리지 않던가 해야지, 이거야 원.

대가리를 좌우로 탈탈 털며 감정의 편린까지 죄다 털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자,

살짝 위축된 듯한 달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이리나? 괜찮아요?”

“Я в пoрядке.”

(난 괜찮아.)

“네? 옛빠 랏…?”

“괜찮다. 보드카 유출 위험 막아내다.”

“아, 쏟을 뻔했다고요? 아이씨, 깜짝 놀랬네.”

대충 보드카 쏟을 뻔해서 소리 지른 거라고 둘러대며,

나는 다시 원래의 화제로 복귀하기로 했다.

뭔 얘기 하고 있었더라.

아. 내 몸뚱이의 주량이 일반인들이랑 다르다는 걸 깜빡하고 있다고 했지.

그래서 진짜 보드카 마시는 게 맞냐는 의심이 생겨나게 됐고.

그럼 오히려 불법 프로그램 의심보다 더 해명이 쉬운 거 아닌가?

게임하면서 보드카를 제대로 마시고 있는 걸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어떻게 보여주지?

“보드카 복용 과정, 무엇 방법 사용하여 보여주나?”

“네? 아, 해명할 때요?

그거 그냥 캠으로 찍어서 보여주면 되잖아요.”

캠이 뭐지.

내가 아는 그 카메라를 뜻하는 단어(Cam)가 맞나?

“…캠?”

“네. 웹캠.”

그 단어를 듣게 되자, 그제서야 머릿속에 잠들어 있던 기억 하나가 깨어난다.

아. 웹캠.

그 모니터 위에 달아 놓는 조그마한 녀석.

컴퓨터 앞에 앉은 사람 비춰 주는 작은 캠코더 같은 거였지, 아마.

그거라면 내가 보드카 마시는 모습을 제대로 시청자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거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없다.”

“네?”

“웹캠 없다.”

웹캠은 나를 여기로 데려온 새끼의 스타터팩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없으면 사야죠, 뭐.

해명방송은 언제 할 거예요? 빨리 할수록 좋긴 한데.”

“내일 한다.”

“그럼 배송은 늦으니까 오프라인에서…. 아니다, 잠깐만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침묵을 유지하는 달퐁.

그러더니 다시 입을 열어 내게 묻는다.

“집에 캠 하나 남는 거 있는데, 드릴까요?”

“…? 캠이 남다?”

“네. 저번에 바꾸고 중고로 팔라 그랬는데 까먹고 있었어요.”

중고 웹캠을 그냥 준다는 말에 순간 혹했지만,

이내 이성을 되찾고 달퐁에게 한 마디 했다.

“괜찮나?”

“뭐가요? 캠 상태가요, 아니면 그걸 님한테 주는 거가요?”

“어…. 모두.”

“에이, 제가 뭐 설마 못 쓰는 걸 드리겠어요? 멀쩡하거든요?

그리고 이것도 다 이리나 잘 되라고 투자하는 거예요. 님이 잘 커야 저도 좀 덕을 보죠!”

“….”

나를 뭐 어디까지 키워먹으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리고 아까는 그냥 게임 잘하는 놈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했던 것 같은데.

“확인하다. 웹캠 받는다.”

어쨌든 달퐁의 그 투자인지 뭔지를 받아들여서 나쁠 건 없었으니, 나는 긍정의 뜻을 표했다.

그에 상대의 목소리가 좀 더 밝아지는 듯 했다.

“진짜죠?

그럼 주소랑 폰 번호 알려주세요!”

“…번호?”

“네. 주소랑 같이요!

그래야 제가 퀵으로 택배를 보내던가 하죠.”

그 말에, 나는 순간 침묵했다.

현대를 살아가려는 인간답지 않게,

현대에서 매우 요긴하게 사용되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번호…. 없다.”

“…? 아, 폰이 없다고요? 잃어버렸어요?”

“아니다. 번호, 폰 모두 없다.”

“이게 뭔 소리래. 컴으로 게임도 하는데 폰이 어떻게 없어요?”

어이없어하는 감정이 가득 담긴 그 말에, 나는 알코올보다 더욱 쓰디쓴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 나도 차라리 이게 그냥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근데 진짜로 없는 걸 어쩌라고.

내 신분이랑 계좌 만들어줬던 새끼가, 그 조그만 전자 판때기는 현생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이지 않은 요소라고 생각했나 보지.

인간관계 리셋 돼서 연락할 구석도 없으니 휴대폰은 사치다 이건가. 개 같은 놈.

“…내 목숨 걸다. 정말 없다.”

“어…. 진짜 없어요?”

모가지를 건다는 말에서 진심을 느꼈는지, 그녀가 당황한 기색을 표한다.

그에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없다. 연락 대상 전무하다.”

“아니, 그…. 어, 으. 죄송해요.”

달퐁의 그러한 목소리에서 죄책감이 묻어나오는 것만 같다.

그 쪽이 죄송할 게 뭐가 있어. 사과는 A/S를 개판으로 해 놓은 그 개새끼가 해야지.

“달퐁 잘못 없다. 괜찮다.

배송 불가능할 경우 무엇 방법 사용하나?”

그녀를 다독여주며, 다른 방법이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화제를 돌린다.

그에 잠깐 침묵을 유지하던 달퐁은, 이내 진지한 투로 입을 열었다.

“제가 갈게요.”

“…허?”

“제가 직접 가서, 웹캠 드릴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