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슬라브식 스트리머-25화 (25/57)

〈 25화 〉 슬라브식 해명 (3)

* * *

“환영하다.”

“오….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그녀의 대가리 속에 존재하던 내 집구석은 대체 뭔 꼴을 하고 있었던 건지,

달퐁은 집 안으로 들어오며 의외라는 눈초리로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흐흫.”

옆에서 그 작달막한 밤색의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내 픽 웃었다.

그 작은 웃음소리에 반응한 달퐁이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 왜요?”

“아니다.”

현관문 너머로 처음 달퐁을 봤을 때,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녀의 외모부터 몸집까지,

도시에서 투닥대던 그 작달막한 년과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두 사람 간의 차이점은 있었다.

달퐁은 그 년의 옅은 회갈색 머리보다 채도가 훨씬 진한 밤색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었으며,

좀 불만이 많아 보이던 인상과 다르게 얼굴이 밝게 피어서 전체적으로 생기가 넘쳐 보이긴 했다.

그 년이 도시에서 생고생을 하지 않고 스트레스도 덜 받았을 때의 모습을 가정해 본다면 지금의 달퐁이 될 듯 했다.

말하자면, 그 쪼만한 년은 달퐁을 존나게 부정적으로 뒤틀어놓은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걸 흑화라고 하던가, 어쨌던가.

일뽕한테 카타나 맞아 뒤졌던 그 놈은 얼터네이티브인가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그 새끼가 하던 말은 대부분 나사 빠진 소리라서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아무튼 그랬다.

목소리와 성격이 대충 맞아떨어지면 외모까지 깔맞춤이 되기라도 하는 건지,

달퐁과 그 년은 절로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물론 내 대가리가 어거지로 달퐁과 그 년을 끼워 맞추려고 발악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닮은 건 그냥 작은 몸집 정도에 불과한데, 머리가 내 기억을 강제로 보정해서 어떻게든 외모까지 동일시하려고 지랄하는 중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상관없다.

그게 내 대갈통에 의한 트릭쇼라고 해도, 나는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킨 내 대가리를 칭찬할 것이다.

그 년을 정말로 현대에서 다시 만난 것만 같은 그 반가움에, 원래 세계로 돌아온 뒤로 기분이 최고점을 찍었기 때문이다.

얘도 정수리 쓰다듬어 주면 발작할까.

그런 생각에 달퐁의 머리통을 지긋이 쳐다보던 나는,

이내 그녀가 내밀어 온 쇼핑백에 시선이 쏠렸다.

“자요, 웹캠이에요.”

“아, 감사하다.”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들다가, 생각보다 묵직한 무게감에 흠칫했다.

뭔 놈의 웹캠이 이렇게 무거워. 이런 걸 모니터 위에 얹어 놓는 게 가능한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봐도 모니터 화면이 곧바로 키보드와 찐한 포옹을 할 게 틀림없었기에, 고개를 갸웃하며 쇼핑백을 열어 봤다.

“Oy.”

그리고, 작게 감탄성을 내뱉었다.

다행히도 그 비정상적인 무게는 웹캠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조그마한 웹캠 박스 옆에, 병목이 붉은색 포장으로 감싸여진 큼지막한 유리병 하나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 다른 손으로 그 붉은 병목을 붙잡아 쑤욱 꺼내들자,

쇼핑백의 무게가 곧바로 한없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나 그런 무게 따위는 더 이상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 손에 들려 있는 이 투명한 유리병에 온통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병에 적혀 있는 상표명을 읽어내지 않아도,

나는 그 시뻘건 병목의 포장만으로 녀석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REZNOFF.

레즈노프 보드카.

컴플릿 보드카와 더불어, 미지근하게 먹어도 문제없는 중견급의 보드카다.

브랜드 특유의 붉은 마름모 모양 로고가 병의 정중앙에서 커다란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눈빛은 아마 광기에 번들거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컴플릿 보드카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같은 브랜드만 계속해서 목구멍에 쏟아 부으면 조금은 아쉽기 마련이었다.

그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싫은 게 아니고 아쉬운 거다.

보드카에 질린다는 게 아니라, 여러 종류를 마시며 알코올의 처리 방식과 증류 방법에 기인한 그 맛의 차이를 즐기는 게 불가능해서 아쉽다는 것이다.

씨발씨발 거리면서도 그 거지같은 동네의 싸구려 증류주를 들이키던 게 나라는 병신인데,

설마 그 완성도 높은 컴플릿 보드카에 싫증이 날 일이 있겠는가.

슈페리어 정도의 고오급 보드카만 들이켜서 입맛이 거기에 맞춰지지 않는 이상, 내가 우리 보드카 동무들을 배신할 일은 없다.

아무튼 간에.

그렇게 아쉬움이 느껴질 때쯤에 타이밍 좋게 레즈노프 보드카를 선물 받게 되자, 내 입꼬리는 곧장 하늘로 치솟게 되었다.

“감사하다, 달퐁!”

“어…. 네, 뭐.

그냥 편의점에 있길래 사 온 건데요.”

어째 황당하다는 얼굴로 내 감사를 받는 달퐁이었다.

왜 우리 편의점에는 컴플릿밖에 없는 거지? 다른 종류도 들여오면 싹쓸이해 올 자신 있는데.

싱글벙글 러시아녀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만한 얼굴로 그렇게 보드카 병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내 달퐁이 내 반대편 손에 들린 채 방치되고 있던 쇼핑백을 톡톡 쳤다.

“아니, 그거 그만 보고 웹캠부터 확인하세요!

설치해갖고 잘 되는지 테스트해봐야 될 거 아니에요.”

“아. 망각하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일단 웹캠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컴퓨터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냉동고 문을 열어젖혀, 그 때까지 손에 들려 있던 레즈노프 보드카를 집어넣었다.

컴플릿보다 병 높이가 좀 더 높아서 눕힌 상태로 넣을 수밖에 없었으니,

냉동고를 열자마자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컴플릿 보드카 병들로 가로막는다. 이게 생활의 지혜지.

보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보드카 네 병을 잠깐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냉동고를 닫았다.

컴퓨터 책상 근처에서 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달퐁이 헛웃음을 짓는다.

“진짜 보드카에 진심이네요.”

“당연하다. 물 이상 중요하다.”

“물 이상…. 아, 물보다 중요하다고요.

알겠으니까 빨리 이거부터 열어 보세요.”

이후, 달퐁의 도움을 받아서 가로로 길쭉하게 생긴 웹캠을 컴퓨터와 연결했다.

녀석을 대충 모니터 위에 올려 두고 송출 프로그램과 연동해서 테스트를 진행하자, 모니터 쪽에서 바라보는 내 방의 풍경이 그대로 화면에 보이게 되었다.

허나 정면에 베란다 창문이 있어서, 역광 때문에 뭔가를 그 앞에서 보여주기엔 영 적합하지 못 했다.

“그럼 그냥 캠을 여기 올려 버리죠.”

“하라쇼.”

차선책으로 웹캠을 컴퓨터 본체 위에 올려놓아서 각도를 옆으로 틀어 버리자, 이번에는 꽤 괜찮은 비주얼이 나왔다.

캠이 바라보는 쪽은 벽으로 막혀 있었기에 방의 모습이 잘 노출되지도 않았고,

창문을 통해 비쳐 들어오는 역광을 차단해낼 수 있을 뿐더러,

보드카가 올라갈 컴퓨터 책상 위의 풍경도 제대로 비춰 줄 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한 달퐁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조명이 없어서 좀 어둡긴 한데, 지금은 필요 없을 거 같아요.”

“확인했다.”

웹캠의 세팅을 마친 뒤,

나와 달퐁은 보드카 해명 방법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어제 말했던 것처럼, 이게 그렇게 큰일까진 아니에요.”

“기억하다.”

“뭐 논란이 크게 터져서 막 온 커뮤니티가 불타고, 막 상황 심각해지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시루갤에서 자기들끼리 얘기하다가 결론이 안 나니까 직접 이리나한테 물어 보기로 한 게 끝이에요. 사실상 컨텐츠 하나 만들어준 거예요, 걔들이.”

달퐁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진지한 해명이라기 보단 컨텐츠 쪽에 가까운 듯 했다.

물론 보드카에 대한 것이 진실이라는 가정 하의 이야기였지만, 나는 무척이나 당당했다.

오히려 보드카에 대한 내 진심이 거짓으로 치부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에요?”

“보드카 음용 장면, 실시간 공개하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달퐁은 그렇게 말하며 웹캠을 가리켰다.

“마시는 거 보여줘야 되는데, 얼굴 공개 할 거냐고요.”

“얼굴?”

확실히, 보드카를 마시는 걸 제대로 보여주려면 그냥 보드카를 들었다 내렸더니 양이 줄어 있더라. 정도로는 부족했다.

아예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선 내 입에 보드카 병이 꽂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야 했다.

“한정 공개하다.”

“…한정?”

나는 달퐁의 질문에 그렇게 답하며,

그 때까지 머리에 눌러쓰고 있던 다이­아스 모자의 챙을 손가락으로 퉁 튕겼다.

늦은 오후가 되었을 무렵,

오프라인 상태였던 이리나의 방송에 Live 마크가 떡하니 붙었다.

채팅창을 사용하기 위해 이리나를 팔로우해 놓았던 시청자들은,

팔로워 혜택 중 하나인 방송 시작 알림이 휴대폰에 도착했음을 확인하고 곧바로 이리나의 방송에 몰려갔다.

보드카에 대해 해명하라며 성토의 메시지를 마구 날리려던 그들은,

아무것도 없이 새까맣기 그지없는 화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해]

[?]

[명]

[???]

[머임]

[해]

[오자마자 방송 터졌누?]

[명]

해명 릴레이와 이 상황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반응이 마구 뒤섞여 채팅창이 불타오르고 있자,

이내 무언가 흥겨운 관악기의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러시안 샹송 계열의 곡을 신나는 분위기로 재편곡한 음악이 배경에 깔리자, 갑작스레 동구권의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다.

[브금 깔 시간에 화면부터 틀라고 아ㅋㅋ]

[해]

[왤케 흥겨움]

[빨리문열어빨리문열어빨리문열어빨리문열어빨리문열어]

[명]

시청자들의 바램을 이뤄 주듯이,

시꺼멓기만 하던 화면에 변화가 생겼다.

누군가의 컴퓨터 책상을 모니터 옆에서 비스듬히 바라본 듯한 풍경이, 화면 가득 나타난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내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이리나가, 그녀가 캠을 켰다!

그에 사람들은 캠 화면 위에서 재빨리 눈을 굴리며,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당사자의 모습을 찾아내려 했다.

이내,

그들은 눈을 의심하게 되었다.

화면에 드러난 스트리머는,

의자의 팔걸이 위로 훌쩍 올라타서 한 쪽에 한 발씩 두 발을 디딘 채,

다리를 크게 벌리고 유연한 자세로 쭈그려 앉아 있었던 것이다.

팔걸이 사이의 간격이 꽤나 멂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우 안정적이고 숙련되어 있는 슬라브 스쿼트를 구사하며 의자 팔걸이 위를 점령 중이었다.

다행히도 캠의 각도에 의해 가랑이 부분은 허벅지에 적절하게 가려짐에 따라 수위가 지켜지고 있었다.

대신 그녀가 입고 있는 다이­아스 레깅스에 새겨진 하얀 삼선 무늬가 카메라 정면으로 비춰지며, 다리 방향을 따라 유연하게 굽이치면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린 그들은,

서둘러 시선을 위로 옮겨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려 들었다.

허나,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캠의 시야는 그녀가 정상적으로 의자에 앉았더라면 충분히 머리가 노출되었을 각도였다.

하지만 의자 팔걸이 위에서 저런 기묘한 자세로 버티고 있는 탓에,

어깨 위부터는 아예 화면 바깥으로 넘어가 버려서 얼굴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고난이도의 슬라브 스쿼트와 더불어 슬라브식 얼굴 엄폐까지 목도하게 된 시청자들.

흥겨운 러시안 샹송과 함께, 채팅창이 뜨겁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이건 뭔데 씹ㅋㅋㅋㅋㅋ]

[어케 앉았누;]

[ㅋㅋㅋㅋ얼굴 안보일라고 저래 앉은거?]

[균형감각 ㅆㅅㅌㅊ]

[다이아스바지 뒷광고 에반데ㅋㅋㅋ]

[걍 캠을 내려 미친련아ㅋㅋㅋㅋㅋ]

[트루 슬라브인 인정합니다]

[엄마저눈나이상해엄마저눈나이상해엄마저눈나이상해]

[방송틀자마자 시1발 내가 뭘보고있는거임]

[이게 그 슬라브식 캠방인가 먼가 하는 그거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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