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슬라브식 해명 (4)
* * *
시청자들이 난리를 치거나 말거나,
이리나는 그렇게 의자 팔걸이 위에 가만히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에 사람들은 순간 정지화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무릎에 걸쳐 놓고 있던 팔을 스윽 움직여 마우스를 딸깍이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숙련된 슬라브 스쿼트로 안정감을 유지하며 능숙하게 손을 뻗어 컴퓨터까지 조작하는 스트리머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채팅으로 초성과 함께 일말의 감탄을 내뱉었다.
그에 이리나는 시청자들에게 보이지 않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씩 웃었다.
이왕 캠을 켜는 김에 처음부터 그들에게 임팩트를 갈겨주면 좋겠다 싶어서 의자 팔걸이에 발을 디디고 슬라브 스쿼트를 보여준 것인데, 생각 이상으로 반응이 뜨거웠다.
시청자들에게는 충분히 고난이도의 자세로 보일지 몰라도, 사실 그녀에게는 아니었다.
옥상의 좁은 난간 위에서 균형을 잡고 쪼그려 앉아 스코프 없는 모신나강으로 저격질을 하던 이리나에게, 이런 의자 팔걸이 위에서 버티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의자 바퀴가 없어 안정적이고 팔걸이도 철제 프레임으로 이루어져 튼튼한 상태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 내막이야 어쨌든 간에, 아무튼 시청자들이 좋아해 주는 것 같으니 된 거다.
이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우스를 움직여 배경음악 러시안 샹송의 음량을 살짝 낮추었다.
그리고는, 오늘 방송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환영하다.
슬라브식 해명 시간이다.”
그 나직한 목소리에,
임팩트 넘치는 슬라브 스쿼트에 신경이 쏠려 있던 시청자들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지금 저런 기행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내 자신들이 이리나의 방송에 쳐들어온 이유를 상기해 낸 그들은,
어제 커뮤니티에서 발생한 보드카 진실공방을 종결 짓기 위하여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로 채팅창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그녀의 멘트를 보아하니 이미 커뮤니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기에, 그들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해명방송 스타트를 누가 이렇게 끊냐고 미친련아ㅋㅋㅋ]
[해]
[ㅋㅋㅋ첨부터 어질어질하네]
[빨리 보드카 갖고와]
[명]
[해]
[책상에 보드카 어디갔누]
[명]
한 글자 채팅을 마구 올려대는 이들에 의해 제대로 된 문장들이 순식간에 휙휙 올라가게 되자,
이리나는 단어 하나를 채 읽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는 그 갱신 속도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결국 채팅에 분당 1회 제한을 걸고 나서야, 채팅창의 불길이 그나마 잠잠해졌다.
“채팅창 방화 금지하다, 카레예츠들.
보드카 곧 가져오다.”
그렇게 말한 이리나는 머리에 쓰고 있던 헤드셋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내 앉은 자리에서 폴짝 뛰더니, 곧바로 다리를 오므려 의자 바닥 위로 착지했다.
그리고는 그 자세에서 부드럽게 이어지듯이 날랜 몸동작으로 팔걸이를 뛰어넘어, 순식간에 캠 화면 바깥으로 사라져 버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의자 위에서 모습을 감춰 버린 스트리머.
그에 1분 1채팅은 너무하다, 벌써부터 기강 잡는다며 불평을 내뱉으려던 시청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
[어디갓서]
[폰 잠깐 봣는데 왜 사라짐?]
[의자갖고 야마카시를 하네ㅅㅂㅋㅋ]
[슬라브식 탈출 개빠르누ㅋㅋㅋ]
[야마카시가 아니라 파쿠르다 일뽕련아]
[야마카시 일본이랑 상관없는데 개소리야 십련이]
[와!야마카시아시는구나!야마카시는파쿠르의창시자다비드벨이속한프랑스의]
설명충의 벽돌 채팅 테러와 더불어 뜻밖의 상식 싸움으로 채팅창이 한바탕 난리가 나고 있을 때,
저지 소매에 감싸인 스트리머의 두 팔이 화면에 쑤욱 모습을 드러냈다.
병목이 붉게 포장되어 있는 큼지막한 병과 푸른 글씨가 몸체 한복판에 새겨진 유리병이 그녀의 양 손에 하나씩 들려 있다가, 컴퓨터 책상 위에 턱턱 얹힌다.
술에 관심이 많던 일부 시청자들은 그것들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해낼 수 있었다.
레즈노프 보드카, 그리고 컴플릿 보드카였다.
허나 채팅으로 아는 척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책상 옆에 서 있던 이리나가 의자에 털썩 앉아 헤드셋을 착용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앞으로 보드카 두 병을 슥 끌어와서, 뚜껑 부분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들겼다.
“레즈노프 보드카, 컴플릿 보드카.
오늘 방송 중 복용 예정이다.”
허나 시청자들은 그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팔걸이 위의 슬라브 스쿼트 같은 비범한 자세 대신 그냥 평범하게 의자에 앉게 되자,
몸의 높이가 그만큼 아래로 내려오면서 캠 화면에 그녀의 머리가 포착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곧바로 스트리머의 얼굴을 확인하려던 시청자들은,
이내 김이 팍 새고 말았다.
그녀는 다이아스의 로고가 정면에 새겨진 캡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기에,
얼굴의 절반 이상이 모자챙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자;]
[ㅅㅂ 모자 먼데]
[얼공 제대로해 십련아]
[와꾸 씹창이라 공개 못하누?]
[이쁜거같은데?]
[저게 씹창이라는 쉒들은 여자 못만나봤음?]
[왜 광역딜넣냐 시1발련이]
[머리 하얀거 ㄹㅇ 루스끼 아니냐??]
[염색아님?]
[슬라브스쿼트 조질때부터 알아봤다ㅋㅋㅋ]
[헤으응러시아눈나헤으응러시아눈나헤으응러시아눈나]
물론 모자 아래로 반쯤 드러난 오똑한 코와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입, 갸름한 턱선 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의 외모가 평균 이상이라는 것을 짐작해낼 수 있었다.
또한 뒷머리 쪽으로 삐져나온 백금빛 머리칼이 이국적인 느낌을 가미하고 있었기에,
시청자들은 이리나라는 사람이 정말로 러시아계 여성이건 아니건 간에, 적어도 본인의 외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컨셉으로 자신들을 기만하고 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의 특징에, 시청자들은 실소하게 되었다.
[저거 츄리닝도 다이아스임?]
[삼선보니까 다이아스 맞는듯]
[ㅋㅋㅋ다이아스한테 얼마 받았누]
[ㅁㅊ 모자도 다이아스네ㅋㅋㅋㅋ]
[아까 양말도 삼선 있었음;]
[먼ㅅㅂ 온몸에 삼선을 둘러쳐놨냐ㅋㅋㅋ]
다이아스 모자에 다이아스 저지, 다이아스 레깅스, 다이아스 양말까지.
다이아스 홍보 모델이라도 되는 것 마냥,
이리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이아스로 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Oy.”
슬라브식 다이아스 사랑을 마주하게 된 시청자들이 채팅창을 다이아스로 가득 메우는 것을 보게 된 이리나는, 저지 지퍼를 죽 내려서 그 안에 입고 있던 티셔츠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그 하얀 셔츠에도 역시나 다이아스 로고가 당당히 새겨져 있었다.
“다이아스 의상. 매우 좋다.
이것 입을 경우 편의성 증가하다.”
[ ㅜㅑ;]
[지퍼 빠꾸없이 내려버리누 ㅜㅑ]
[저거 안에도 다이아스임?ㅋㅋㅋㅋ]
[다이아스안에 다이아스 ㅅㅂㅋㅋ]
[이게 그 마트료시카인가 뭔가 하는 그거냐]
[미친련...미친련...]
[이분 키보드마우스도 다이아스꺼 쓸듯]
채팅창에 올라온 특정 문장을 보게 된 이리나가 웹캠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허나 무언의 광기와도 같은 집착의 기운이 모자챙 밑으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듯한 모습에, 시청자들은 키보드 또는 스마트폰 액정을 두드리다 말고 흠칫하게 되었다.
“다이아스 키보드, 마우스 존재하나?
어느 곳 위치하다?”
[드립이야 미친련아ㅋㅋㅋㅋ]
[컨셉 어질어질하네ㅅㅂㅋㅋㅋ]
[다이아스 뒷광고 멈춰!!!!!!!!!!!]
[정신나갈거같애정신나갈거같애정신나갈거같애]
얼굴 일부 공개 이후 불어 닥친 다이아스 광풍에 잠시 목적을 잃고 떠돌던 방송은,
이내 이리나가 보드카 두 병의 입구 부분을 웹캠 근처에 들이대면서 다시 정상화되었다.
“해명 계속하다.
이것 포장 제거 이전의 새 제품이다.”
[새거 맞음?]
[술잘알 등판해주세요]
[뚜껑에 껍질있는거 보니까 맞는듯]
[님 술최몇?]
[서리톡톡 원툴임]
[? 그거 2도따리 아니냐]
[술찌쉒이었누ㅋㅋㅋㅋ꺼져]
[신뢰도 떡락하는거 개웃기네ㅋㅋㅋㅋ]
[2도따리 20병 합쳐야 보드카도수됨ㅋㅋㅋ]
알코올에 길들여지지 않은 시청자가 괜히 나섰다가 채팅창에서 마구 조리돌림 당하는 사이,
짤랑 하는 효과음과 함께 후원이 도착했다.
[술알못 님이 1,000원 후원했습니다.]
‘캡 밀봉 멀쩡한거 같긴 한데 그거 딱 까면서 소리도 같이 들려주십쇼’
[말투보니까 닉값 못하는거 같은데;]
[ㅋㅋㅋ도네에서 술냄새나누]
[포장 까보셈ㄱㄱ]
“하라쇼.”
술을 알지 못 한다는 후원 닉네임과는 다르게 무언가 신뢰감이 느껴지는 그 내용에 시청자들이 호응하자,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이리나는 후원 당사자가 요청한 대로 헤드셋 마이크를 병에 가까이 가져다 대고, 두 보드카를 새 것에서 개봉품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쯔즈즉 하고 경쾌한 파열음을 내며, 컴플릿 보드카의 뚜껑을 감싸고 있던 은색의 비닐 포장이 뜯겨나갔다.
이어서 레즈노프 역시 뚜껑에 힘을 주어 돌리자,
뚜껑을 최초에 고정시키고 있던 금속 조각이 비틀리며 까드득 하고 개봉음이 터져 나온다.
누가 봐도 새 보드카의 봉인을 뜯는 듯한 그 모습과 소리에 시청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찰진거보소]
[새거 ㅇㅈ합니다]
[나도 알콜마렵네 아ㅋㅋ]
[새거맞잖아 시1발련들아]
[ㅋㅋㅋ2도따리쉒 뿔났누]
[보드카얘기하는데 꼽사리낀 술찌가 잘못했네ㅋㅋ]
[ㄹㅇㅋㅋ]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며 억울해하는 2도에게 사람들이 덕담을 날려주는 동안,
곧 날아온 후원에 의해 최종 검증이 완료되었다.
[술알못 님이 1,000원 후원했습니다.]
‘ㅇㅈ’
“확인 완료하다?”
그것을 확인한 이리나는,
곧바로 레즈노프 보드카의 붉은 병목 위에 얹혀 있는 뚜껑을 빙빙 돌려 입구에서 제거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시청자들이 설마 하는 사이,
그녀는 큼지막한 보드카 병을 집어 들어,
그대로 입에다가 병 입구를 꽂아 넣고 내용물을 입 안으로 흘려보냈다.
냉동고에서 꺼낸 레즈노프가 미지근하게 식기 전에 어서 맛보고 싶어 안달이 나 있던 이리나였기에, 그녀는 목울대를 몇 번이나 움직이며 보드카를 물마시듯 꿀꺽꿀꺽 들이켰다.
차가운 40도의 생명수가 이리나의 입안에 알코올의 싸함과 함께 냉기를 퍼뜨리고, 뒤이어 목구멍으로 부드럽게 넘어가 뱃속을 뜨뜻하게 덥힌다.
컴플릿이 깔끔한 쪽에 가깝다면 레즈노프는 좀 더 부드러운 느낌이 강조되어 있었기에,
특유의 매끄러운 목넘김을 선보이며 이리나를 만족시켜줄 수 있었다.
그렇게 시청자들에게 보드카 병나발 쇼를 보여주던 이리나는, 이내 병을 입에서 떼어내어 다시 컴퓨터 책상에 턱 내려놓았다.
병목 바로 아래까지 차 있던 투명한 액체의 수위가 어느 새 상당히 내려가 있었다.
“흐흫.”
알코올이 머릿속으로 녹아들어감에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녀는 기분 좋게 웃었다.
40도의 보드카를 물처럼 들이켰음에도 아무런 변화 없이 태연하기 그지없는 이리나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경악성을 내뱉었다.
[???]
[레즈노프 마신거 맞음?]
[보드카라매 미친련아ㅋㅋㅋㅋ]
[이게 루스끼쉒들 평균임? 개무섭네;]
[보드카 일케 스무스하게 마시는 새1끼 첨봄ㄹㅇ]
[보드카향 나는 물이었누 아ㅋㅋ]
[ㅋㅋㅋ술찌쉒들 진짜 광기에 정신 못 차리는거 보소]
[러시아는 어떤 곳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