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슬라브식 해명 (5)
* * *
시청자들로 하여금 러시아란 어떤 곳인지 고뇌하게 만들어 준 충격과 공포의 보드카 병나발 쇼가 성황리에 종료되고,
술을 그냥 가만히 앉아 마시는 단계를 넘어서,
보드카를 마시면서도 어제의 그 실력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리나는 시티 오브 루인을 실행했다.
시청자들에게 송출되는 화면에는 구석에 캠 영상을 위치해 놓고,
게임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화면에선 캠이 보이지 않게 설정한 이리나.
모니터가 하나밖에 없으니 생각보다 제한 사항이 많다.
그런 생각으로 이리나는 속히 보조 모니터를 구입하고자 마음먹으며, 게임이 로딩되어 나타난 로비에서 창고를 열어젖혔다.
여러 장비들이 난잡하게 쌓여있던 답답한 풍경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15레벨을 달성하여 자유시장을 해금했기에,
그녀에게 쓸모없는 아이템들을 전부 시장에 밀어 넣은 것이다.
창고가 난장판이 되어 있는 것을 무척이나 아니꼬워하던 일부 정리 매니아들이, 그녀가 15레벨에 도달하자마자 1,000원 후원으로 당장 창고부터 손보라며 몰아붙인 덕이었다.
허나, 그렇게 깔끔해진 창고를 흐뭇하게 둘러보던 시청자들은, 이내 또 다른 불편 요소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템 다 팔았는데 왤케 좁아보이누ㅅㅂ]
[창고 칸 원래 저리 작았음?]
[무료계정인거 안보이냐 병1신아]
[모를수도있지 왜 시비냐 시1발련이]
[빤쓰(안전 보관함) 4칸따리인거 킹받네ㅅㅂ]
이리나의 계정은 아무런 패키지를 구입하지 않고 무료로 생성한 것이었기에,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창고의 공간과 안전 보관함의 크기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에 시청자들이 채팅창을 통해 불편을 토해내자,
이리나가 몇 개의 채팅을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입을 열었다.
“본인 뉴비이다.
그러므로 무료 계정 사용한다.”
게임을 시작한 지 아직 일주일도 안 되었기에,
자신을 뉴비라고 칭하는 이리나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물론 도끼 하나로 중무장한 사람을 돌려 깎아 죽이는 그녀의 실력을 잘 알고 있던 시청자들은, 그 설명에 만족하기는커녕 오히려 채팅창을 뜨겁게 달굴 뿐이었다.
[여기 뉴비가 어딨누 미친련아ㅋㅋㅋㅋ]
[아ㅋㅋ 늒네는 무과금이 국룰이지]
[언레 늒네라 보급빤쓰 입는대자너ㅋㅋㅋ]
[늒네컨셉 개꼴받네 ㄹㅇ]
[어제 씹퐁한테 받은돈 다 어디갔냐]
[보드카 80만원어치 질렀나봄ㅅㅂㅋㅋ]
“씹퐁…? 아, 달퐁.
해당 자금, 보조 모니터 구입에 사용 예정이다. 거금 기부 감사하다, 카레예츠들.”
[감사하면 빨리 컴플팩 지르라고 ㅅㅂ]
[누가 보조모니터에 90을 꼬라박누;]
[눈나 모니터 쓸만한거 40따리도 많으니까 컴플팩사줘 시1발제발]
[컴플팩살때까지숨참는다흡]
[빨리업글해빨리업글해빨리업글해빨리업글해빨리업글해]
스트리머의 시티 오브 루인 실력이 영 좋지 않은 것은 넘어갈 수 있어도,
창고와 안전 보관함 공간이 좁아터진 무료 계정으로 꿋꿋이 버티고 있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는 그들이었다.
절대 초심자라고 할 수 없는 실력으로 사람들을 쥐어 패고 다니기에 뉴비 실드조차 제대로 효과를 볼 수 없는 이리나라면 더더욱 말이다.
우리가 준 돈으로 당장 계정부터 업그레이드하라며 채팅창이 화르륵 불타고 있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리나는 고개를 작게 갸웃했다.
“현재 보드카 해명 진행 중이다. 시간 지연 괜찮나?”
[ㅖ]
[ㄱㅊ]
[빨리 업글 ㄱ]
[이건못참지ㅋㅋ]
이미 중대한 불편 요소를 발견해 버린 그들이었기에,
해명이고 뭐고 당장 그것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이리나를 보드카에 담가버릴 기세였다.
그에 이리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잠시 화면을 가리고 체크카드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유료 패키지 중에서도 제일 상위의 버전인 컴플리트 패키지를 구매했다.
자신에게 거금을 준 본인들이 그 돈으로 최상위 패키지를 지르라고 강력히 밀어붙이는데, 그것을 굳이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제일 높은 혜택을 주는 패키지인지라 그 가격이 10만원을 초과했지만,
이를 구입하고 남은 돈으로도 충분히 적당한 모니터를 구할 수 있으니 상관없었다.
물론 시청자들의 후원금은 아직 정산이 되지 않아 묶여 있었으나, 그녀의 계좌에 여유금이 남아 있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래. 5년 동안 하루에 1만원씩 지급한 그 돈 말이다.
그녀가 이전에 알아본 결과, 사실 5년은 1825일도 아니었다.
4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윤년이라는 것이 한 번 끼어서, 하루가 더 추가되어 1826일이었다.
그 와중에 만 원을 빼돌릴 줄이야. 악독한 새끼들.
그런 생각으로 기분이 나빠지려는 것을 레즈노프 보드카 한 모금으로 막아내고,
이리나는 마침내 컴플리트 패키지의 결제를 완료하여, 최상위 혜택을 받는 계정을 소유하게 되었다.
구매 인증 스크린샷을 업로드하면 커뮤니티에서 암묵적으로 추천 게시판에 올려 준다는 컴플팩 오너가 된 것이다.
“결제 완료하다.”
이리나는 그 말과 함께 다시 시청자들에게 화면을 송출시켰다.
곧바로 눈을 굴려 창고와 안전 보관함을 확인한 그들은, 편안함에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창고 공간이 배 이상으로 훅 늘어나고,
안전 보관함 또한 3x3의 9칸으로 확장된 것이다.
보기만 해도 든든해지는 그 광경에, 시청자들은 저마다 채팅창에 만족감을 표했다.
그에 픽 웃은 이리나는 다시 게임을 재개했다.
패키지를 구매하면서 부가적으로 획득하게 된 아이템들 중 자신에게 쓸모없는 것들은 전부 자유시장에 밀어 넣거나 NPC에게 팔아치운 그녀.
그리고는,
캐릭터에게 입혀져 있는 방탄복과 소총 등등 모든 무장을 압수하여 창고에 집어넣었다.
다시금 전술 헤드셋과 기본 의상만 착용하게 된 금빛 단발의 캐릭터가 항의하듯이 유저를 쳐다보았지만, 이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도끼만 들고 달려가는 플레이 도끼런을 준비했다.
“어제와 비슷한 조건 적용하여 진행한다.”
[음주야끼런;]
[아까 병나발 조진걸로 사실상 해명 끝난거 아니냐ㅋㅋ]
[뭔 개솔임 겜하는거까지 봐야지]
[저희 40도협회 일동은 러시아눈나를 지지합니다]
[술빨고 야끼런을 대체 어케하누 ㅁㅊㅋㅋ]
산업 단지로 진입하기 위해 로딩을 기다리던 도중,
짤랑 하고 시청자로부터 후원이 도착했다.
[적셔 님이 2,000원 후원했습니다.]
‘눈나 겜 시작하기 전에 한잔 하고 들어가’
그 후원 메시지에, 이리나는 컴퓨터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레즈노프 보드카 병을 다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슬라브식 음주, 술잔 사용 금지한다.
자신감 없을 경우 그것 사용한다.”
그리고는 또 다시 병에 입을 대고, 보드카를 한 모금 들이킨 뒤 다시 책상에 내려놓는 이리나.
물이라도 마신 것처럼 자연스레 이어지는 그 동작에 시청자들이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감 문제가 아닌거 같습니다 선생님]
[저거 ㄹㅇ 물 아니냐ㅋㅋㅋㅋ]
[걍 한국식으로 마실란다;]
[보드카 대짜를 누가 1인1병으로 마시냐고 미친련아ㅋㅋㅋ]
시청자들이 그런 반응을 보이거나 말거나,
다시금 산업 단지에서 눈을 뜬 이리나의 캐릭터는 도끼 하나를 손에 꼬나들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는 시티즌 한 명을 뒤집힌 버스 근처로 끌어들인 다음,
조용히 버스를 빙 돌아서 녀석의 뒤통수에 도끼날을 콱콱 내려찍었다.
별다른 실수도, 긴장감도 없이 시티즌을 처치하고 흐흫 웃으며 다시금 보드카를 홀짝이는 이리나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이제 그녀의 음주 플레이를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허나, 스트리머가 곤란해 하는 것을 보고 싶던 일부 시청자들은 그녀가 이렇게 무난한 느낌으로 해명을 마치고 게임 플레이를 이어나가게 되는 것을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 중 하나가 행동을 개시했다.
[알중맨 님이 1,000원 후원했습니다.]
‘시민 킬 했으니까 보드카 한잔 더 ㄱ’
“확인하다.”
시청자의 후원에 이리나는 흔쾌히 보드카 한 모금을 더 입에 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총성이 들린 곳으로 뛰어가며 가볍게 철조망을 뛰어 넘었다.
그러자 방금 전의 후원의 의미를 이해한 다른 이에게서 1,000원짜리 후원 메시지가 도착했다.
[넘었네 님이 1,000원 후원했습니다.]
‘철조망 넘었으니까 보드카 ㄱ’
“…? 확인하다.”
이번에도 이리나는 망설이지 않고 보드카를 홀짝인 뒤, 다시 키보드를 잡았다.
그 뒤로도, 이리나가 무언가 행동을 할 때마다 한 번씩 보드카를 마셔 달라는 후원이 날아왔다.
그때마다 레즈노프 보드카 병을 들어 올려 한 모금씩 들이키는 이리나의 모습에, 시청자들은 서서히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온갖 행동을 근거로 삼아 이리나의 입에 보드카 병을 물리는 미니 술게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에 일부 짓궂은 시청자들은 계획이 잘 풀리고 있음을 느끼고 낄낄 웃었다.
그들은 아예 그녀의 주량이 감당하지 못 할 만큼 보드카를 쉴 새 없이 먹여서,
이리나가 위기를 느끼고 보드카를 거부하게 만들거나, 적정선 이상으로 취해서 게임 플레이가 꼬이도록 만들어 버리려는 것이었다.
스트리머는 그런 그들의 속내도 모르고 태평하게 시청자들과의 미니 술게임을 즐기며 보드카를 마셔 대고 있었으니,
그녀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을 때는 이미 한참이나 늦어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악질들은 단돈 몇 천원만으로 시청자들을 선동하여 이리나에게 계속해서 보드카를 주입시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렁이 님이 1,000원 후원했습니다.]
‘엎드렸으니까 보드카 ㄱㄱ’
“확인하다.”
그런데,
[미장원머리빗도둑 님이 1,000원 후원했습니다.]
‘방금 옆머리 긁적였으니까 보드카 ㄱ’
“음? 흐흫, 확인.”
무언가 이상했다.
[하체트 님이 1,000원 후원했습니다.]
‘도끼로 벽 긁었으니까 보드카’
“하라쇼.”
그녀가, 취할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야간병동 님이 1,000원 후원했습니다.]
‘힐킷 썼으니까 보드카ㅎ’
“자예비스.”
(존나게 좋다)
취하기는커녕,
무슨 술이 각성제로 작용하기라도 하는 것 마냥, 점차 스트리머의 텐션이 올라가면서 캐릭터가 빠릿빠릿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흐름에 그들이 당황하고 있을 무렵,
머릿속이 알코올에 절여져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 상태의 이리나는 복층 건물 벽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다.
탕! 타타탕!
그 때,
그녀는 건물 안에서 총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포착했다.
곧바로 건물 벽에 바짝 붙은 이리나는, 슬금슬금 건물의 입구로 다가갔다.
잠시 대기를 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밖으로 나오려는 듯이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발걸음 소리가 지척까지 가까워지고,
방탄복 차림에 가방을 맨 헌터(유저)가 소총을 손에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한 손에 도끼를 쥔 채 입구 근처에서 몸을 낮추고 있던 이리나.
그녀는 곧바로 몸을 확 일으킴과 동시에,
아래에서 위로 도끼를 올려쳐 헌터의 턱주가리에 어퍼컷마냥 도끼날을 꽂아 버렸다.
퍼어억!
“!!”
불시의 일격에 화들짝 놀란 헌터가 상대에게 총구를 겨누기도 전에,
이리나는 재빠른 몸놀림을 십분 활용하며 유저를 휙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신에게 도끼를 꽂은 괴한을 쫒아 다시 건물 내부로 뛰어 들어간 헌터.
그는 계단 위로 상대가 뛰어올라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에 헌터는 견착을 풀지 않은 채로 천천히 계단을 향해 다가갔다.
불의의 기습을 두 번 다시 허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허나 그가 계단에 다다랐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잠잠하기 그지없었다.
한 대를 갈긴 뒤 자신이 중무장인 것을 확인하고 그대로 도망치기라도 한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헌터는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계단에 발을 턱 디뎠다.
그러면서 고개를 들어 올려 계단 위쪽을 바라보는 순간,
헌터는 자신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덮쳐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계단의 난간 너머에 숨어 있던 이리나가,
상대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를 포착하고 그대로 난간을 뛰어넘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린 것이다.
채 방아쇠를 당길 틈도 없이,
그의 정수리에 도끼날이 내려찍혔다.
콰직!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헌터의 몸뚱아리.
흐릿해져가는 시야 너머로, 백금빛의 단발머리가 휘날렸다.
“흐흫.”
[와]
[이게 되네 ㅁㅊ]
[술빨고 하는거 맞냐ㅅㅂㅋㅋ]
[나 이거 암살겜에서 본거가틈]
[야끼 개좋아보이는데 정상이냐ㅏ??]
[니도 방장쉒처럼 술빨았음?]
[어케알앗짛ㅎ]
[ㅋㅋㅋ채팅에서 알콜냄새나누]
[오이늅!오이늅!오이늅!오이늅!오이늅!]
머리에 도끼를 두 번이나 맞아 그대로 절명한 유저를 화면 너머로 바라보며,
이리나는 작게 웃으면서 보란 듯이 보드카 병을 집어 들었다.
“유저 킬 성공하다.
이것 또한 보드카 한 모금 마시다.”
[?ㅋㅋㅋㅋ]
[후원도 안했어 미친련아ㅋㅋㅋㅋ]
[지가 그냥 마셔버리네ㅋㅋㅋ]
[술게임 파괴자;]
[저걸 벌써 다 마셨누 ㅁㅊㅋㅋ]
[진짜 시1발 러시아는 어떤 곳일까…?]
누군가 미니 술게임의 일환으로 보드카를 마시라는 요구가 담긴 후원을 하기도 전에,
이리나는 내용물이 얼마 남지 않은 레즈노프 보드카 병을 입에 꽂고 병나발을 불어 버렸다.
주량이 한계에 달해서 곤란해 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아예 자기가 먼저 이유를 들이대며 40도의 알코올을 들이키는 그녀였다.
스트리머를 곤경에 빠트리기는커녕 방송 분위기를 띄우고 명장면까지 만들어 주게 된 그 상황에, 악질들은 고개를 푹 떨궜다.
완벽한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