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스승과 제자들 (5)
* * *
콰앙!!
발밑에서 굴러가는 섬광탄의 폭발에 휘말리게 된 달퐁.
그 여파에 뒤로 밀려난 달퐁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방향을 잃고 헤매인다.
그녀가 착용하고 있던 전술 헤드셋 덕에 청각은 지켜낼 수 있었지만,
강력한 섬광을 코앞에서 직면하는 바람에 시각을 완전히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와아아악!! 뭔데! 저 암것도 안 보여요!”
“진정하다. 포복 자세 권장한다.”
“포복?! 포복…. 알았어요!”
시야 한복판에 둥그렇게 남은 새하얀 섬광의 잔상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완전히 암전된 것에 크게 당황하던 달퐁은, 이내 들려오는 이리나의 침착한 목소리에 정신을 다잡고 얼른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의 옆에 있었던 이리나의 상태가 염려되어, 달퐁이 입을 열었다.
“님은 괜찮아요? 저 진짜 아예 시야가 시꺼매졌는데!”
“문제없다. 엄폐 성공했다.”
허나 그 걱정은 별 쓸모가 없었다.
어쩐지 자기 혼자 침착하더라니, 이미 잽싸게 몸을 숨겼던 모양이었다.
덤덤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대답에, 달퐁이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투덜거렸다.
“아이씨, 치사하게 자기만 숨고!”
“불가항력적 상황이다.”
“그런 말은 또 어케 아는 거야… 님 한국어 못한다는거 컨셉이죠?”
“아니다.”
“뭘 아니에요! 어려운 단어는 죄다 알면서 어떻게 문법만 그따구냐고요!”
그건 내가 더 궁금해, 이 새끼야.
속으로 그런 말을 중얼거리며, 이리나는 박스 뒤에서 웅크리고 있던 몸을 추슬렀다.
달퐁은 무방비한 상황에서 섬광탄에 직격 당하게 되어 당분간 무력화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으나,
다행히도 이리나 쪽은 아슬아슬하게 엄폐물 뒤로 몸을 숨겨 폭발의 여파를 받지 않은 덕에 시각의 상실을 막아 낼 수 있었다.
그녀 또한 전술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멀쩡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시멘트 포대 뒤에서 섬광탄 핀 뽑는 소리가 들려왔었지.
우리가 창고 안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거기서 대기를 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창고 안에서 파밍을 하다가 우연히 우리를 만나서 섬광탄을 던진 것인가.
그러한 생각과 함께 엄폐물에서 빠져나온 이리나는,
자신의 의문을 곧바로 해소시킬 수 있었다.
타다닥!
“…!”
“뭐야? 이거 이리나 발소리에요?”
상대는 어느새 빠른 속도로 시멘트 포대를 뛰어넘어, 그녀가 숨어 있던 상자의 지척까지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무장 없이 도끼만 들고 있는 게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기동력으로 접근해 온 그는, 상자 뒤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던 백금빛 단발의 헌터에게 곧장 서슬 퍼런 도끼날을 선사해 주었다.
그 역시 도끼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사나이였던 것이다!
그에 백금의 헌터는 이를 악물고 소총을 쥐어 잡은 두 손의 파지법을 바꾸며,
자신의 머리를 향해 횡으로 날아오는 도끼에 맞서 개머리판을 올려쳤다.
타이밍 맞게 들어간 AK소총의 근접 공격이 카각. 하고 불길한 소리와 함께 도끼날을 쳐냈다.
정확한 순간에 맞받아치지 않으면 결코 성공시킬 수 없는 근접 공격의 방어.
근중거리 이상의 교전이 주를 이루는 평소라면 결코 접할 일이 없을 그 기술이 빛을 발했다.
허나 그 반동에 소총을 든 이리나의 두 손이 크게 밀려나며,
그녀는 일시적으로 상대를 조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자신의 일격이 막힐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순간 스카프 위로 드러난 남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는 상대가 잠시 무력화된 순간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발을 내딛어 자세를 잡았다.
목표는 백금빛 단발 머리칼이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통이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이기는 했으나, 목숨이 달린 급박한 상황에서 그런 것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녀의 머리를 쪼개 버리고, 승리를 쟁취해낼 것이다.
그것만을 생각하며, 사내는 다시금 도끼를 횡으로 휘둘러 상대의 두부를 노렸다.
하지만 백금빛의 헌터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의 힘이 가득 실려 있는 도끼날이 자신에게 닿기 전에, 무너져 있던 자세를 회복한 그녀는 역으로 사내에게 접근하며 소총을 치켜올렸다.
까가각!
묵직한 도끼와 정면충돌한 AK소총의 프레임이 삐걱이며 비명을 질러댔다.
마치 자신은 이런 무식한 대결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항의하는 듯 했다.
휘청.
또 다시 공격에 실패한 사내는 연속된 일격을 모두 받아쳐진 반동으로 시야가 뒤흔들렸다.
계속해서 몰아붙인다면 결국 승기를 가져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그는 다시 고개를 바로잡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사내의 앞에 있던 상대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자신의 총이 상대의 공격을 그리 많이 버틸 수는 없을 것이라 직감한 이리나가, 근접 공격의 방어로 인해 약간의 공백이 생겨난 틈을 타서 재빨리 자세를 낮추고 몸을 미끄러뜨려 사내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간 것이었다.
비슷한 장소에서 그녀가 행한 적이 있었던,
시야의 빈틈을 이용해 상대의 옆으로 슬라이딩하여 뒤를 노리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 때의 상황을 동일하게 재현시킬 수는 없었다.
지금은 이리나의 수중에 도끼 한 자루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몸놀림이 비교적 둔해져 있어 그토록 빠르게 상대의 뒤를 점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사내는 그리 늦지 않은 시점 이리나가 감각적인 슬라이딩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간에, 그녀의 행방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몸을 돌린 사내는,
높이 치켜들고 있던 도끼를 눈앞의 백금빛 정수리 위로 내리찍었다.
이것으로 일단 한 대.
상대의 완전한 침묵까지 절반을 나아가는 것이다.
콰직!
“!”
그러나,
도끼날은 목표에 닿지 못하고 귀 옆을 스치며 이리나의 어깨에 틀어박혔다.
마지막 순간에, 그녀가 상체를 옆으로 스윽 기울여 도끼를 피해낸 것이다.
그에 흠칫한 사내가 재빨리 도끼를 회수해서 추가타를 날리려 들었지만,
이미 사내의 가슴팍에는 단단한 AK소총 개머리판이 휘둘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퍼억. 소리와 함께 몸을 떠밀린 그가 두세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반격은 사내의 몸뚱아리에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총기로 무장한 이를 상대로 거리를 벌리게 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치명적이었다.
“….”
잠시 흔들리던 시야를 바로잡은 사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어깨를 피로 물들인 채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는 백금빛 헌터와,
그녀의 단발머리 아래에 자리 잡은 한 쌍의 무심한 잿빛 눈동자였다.
AK소총의 방아쇠울에 들어가 있던 가녀린 손가락이 스윽 뒤로 당겨졌다.
차칵.
“!?”
“?!”
하지만,
사내에게 들이밀어져 있던 총구는 결코 화염을 뿜지 않았다.
무언가 안에서 걸린 듯 맥 빠지는 충돌음을 내뱉으며, 별 반응 없이 잠잠할 뿐이었다.
몇 번이고 묵직한 도끼날을 받아 냈던 소총이,
결국 중요한 순간에 말썽을 일으킨 것이다.
“…!”
그녀의 총에 탄 걸림이 발생했다는 것을 깨달은 사내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장 도끼를 치켜들며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털그덕.
아니.
정확히는 달려들려 했다.
그 직후 자신의 얼굴에 날아온 묵직한 무언가에,
사내는 돌진을 하다 말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 상대가 들고 있던 AK 소총이었다.
고장 난 소총을 냅다 사내에게 던져 버린 이리나는,
상대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멀쩡한 어깨를 움직여 빠르게 허리춤에서 보조 무기를 꺼내들었다.
소총과 마찬가지로 NO.2 탄환을 가득 머금고 있던 마카로프 권총.
녀석은 지금까지 묻혀 있던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알리겠다는 듯이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불꽃을 뿜어냈다.
탕탕! 탕탕탕!
방어구 없이 노출된 사내의 하반신에서 피가 튀어 오른다.
사정없이 박혀 들어간 총알이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어 놓는다.
이리나의 정확한 조준과 반동을 제어하는 그 손놀림은 단숨에 상대의 두 다리를 박살내어 놓기에 충분했다.
그에 본인의 유일한 장점인 기동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 사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도끼를 허리춤에 패용하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항복의 제스처였다.
“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리나는, 작게 숨을 내뱉으며 권총에 꽂혀 있던 탄창을 교환했다.
뭔가 급박한 싸움이 벌어지는 듯한 소리가 계속 들려옴에 입을 줄곧 다물고 있던 달퐁이, 이내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깨닫고 조심스레 목소리를 흘려냈다.
“…이리나? 뭔 소리가 계속 나던데, 이거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 본인 승리했다.”
“벌써요? 아이씨, 보고 싶었는데!”
사내의 공격을 방어해 내며 슬라이딩으로 빠져나가다가 어깨에 일격을 허용한 뒤, 개머리판으로 상대를 밀쳐내어 권총을 사용해 다리를 부수고 항복을 받아내기까지.
이 모든 과정은 달퐁의 시야가 회복되기도 전에 빠르게 진행되고, 신속히 마무리 지어졌다.
짧은 시간 동안 벌어졌던 이리나와 사내의 수준 높은 근접전.
그에 채팅을 치는 것도 잊고 덩달아 전투에 집중하던 시청자들은, 모든 것이 끝나고 나서야 이리나를 따라서 숨을 토해내며 채팅창을 뜨겁게 달구기 시작했다.
[와]
[님들 이제 숨셔도댐]
[뭘본거지 시1발;]
[도끼 쳐낼수도 있는 거였음??]
[이게..언레늒네..?]
[야끼만 나오면 레전드 찍네ㅋㅋㅋ]
[않이 폰보느라 못봤네 개시1발거]
[야끼맨도 고인물 아니냐 저거]
[킹이늅!킹이늅!킹이늅!킹이늅!킹이늅!]
[또락스가 웅장해진다..]
날아드는 도끼를 총으로 맞받아쳐내는 장면부터 시작해서 상반신을 기울여 치명타를 아슬아슬하게 회피해 반격하고, 총기 고장을 알아채자마자 상대에게 총을 던지며 권총을 꺼내드는 모습 등등.
잠깐의 시간동안 그러한 인상적인 장면을 몇 번이나 보여준 덕에,
채팅창의 열기가 식기까지는 꽤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어우, 이제 좀 보이네….”
그동안 시야를 회복한 달퐁이 몸을 일으켜 이리나 쪽을 바라보자,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는 백금빛 단발의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면, 허리춤에 도끼를 찬 사내가 이리나의 앞에서 양 손을 들어 올려 항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사람이랑 그렇게 열심히 싸운 건가. 하는 생각으로 상대의 모습을 훑어보던 달퐁은, 이내 탄성을 흘리며 특수 상호작용으로 그의 머리 쪽을 가리켰다.
“이리나! 얘는 마이크 있어요!”
“Oy.”
그에 치료를 마친 이리나가 상대의 전술 헤드셋을 살펴보자, 과연 달퐁의 말대로 마이크가 붙어 있었다. 게임 내 음성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마카로프 권총을 겨누며, 이리나는 본인 캐릭터의 입을 벌렸다.
기품 있는 미성의 목소리가 창고 안에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이거, 누가 시켰어?”
“오, 이번엔 제대로네요!”
[오]
[이거지]
[눈나 목소리.. 헤으응]
[저거만 들으면 한국인이누ㅋㅋ]
[ㄹㅇㅋㅋ]
상당히 어색함이 줄어들은 그 물음에, 달퐁과 시청자들이 환호했다.
물론 이리나의 언어 능력이 급상승한 것은 아니었다.
어색한 한국어로 도끼맨들을 추궁하는 것을 보다 못한 달퐁이, 아예 짧은 문장을 통째로 외우도록 시킨 것이다.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건 저 한 마디뿐이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딘가.
그런 생각으로, 달퐁은 이리나와 함께 남자의 답변을 기다렸다.
이리나의 게임 내 음성을 듣게 된 사내는 순간 흠칫하더니,
자신 또한 음성 기능을 활성화시키려는 듯이 잠시 몸을 꿈틀거렸다.
이내, 사내의 입이 열렸다.
상당히 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그 안에서 흘러나왔다.
“어…. 누가 시켰냐고요?”
“그렇다. 누가 시켰어?”
그 물음에,
사내는 다시금 어…. 하고 길게 추임새를 넣었다.
그리고는 어깨 위로 들어 올리고 있던 두 손을 내리더니, 검지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 손가락이 향하는 곳에는 이리나가 있었다.
“님인데요?”
“허?”
“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