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슬라브식 스트리머-36화 (36/57)

〈 36화 〉 과거의 망령 (1)

* * *

사장에 의해 최고 속도가 5km/h 깎여나가기는 했지만,

헬스장에서의 질주는 꽤나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계속해서 나를 안달복달 못하게 만들던 가슴 속의 답답함이, 런닝머신 위에서의 폭주로 인해 어느 정도 씻겨 내려가게 된 것이다.

갈아입을 옷가지를 가져오질 않아서 샤워실을 이용하지 못 하게 된 건 예상하지 못 했지만, 그거야 뭐 다음부터는 제대로 여벌옷까지 가져오면 될 일이었다.

앞으로도 운동을 하기 위해서 이 곳을 계속 다니게 될 테니까.

집 밖은 골목의 구조 자체가 일직선이 아니고, 중간 중간 자동차와 행인들에 의해 진로를 방해받을 수도 있었기에 앞뒤 안 가리고 달리기엔 상당히 제한이 많았다.

허나 헬스장은 달랐다.

처음부터 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장소이고, 30km/h의 속도로 마음껏 달릴 수 있는 런닝머신까지 존재한다.

신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여서 몸속에 쌓여 있던 갑갑함을 풀어내기에 아주 알맞은 곳이었다.

물론 사장은 내가 풀스피드로 달리는 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지 아직은 25로 속도 제한이 걸려 있었지만, 계속해서 헬스장을 방문하며 신뢰를 쌓으면 언젠가 다시 최고 속도로 복귀할 수 있겠지.

그 자리에서 6개월 이용권을 결제한 나는, 다음 날부터 매일같이 대협 피트니스에 가서 마구 뜀박질을 했다.

자신을 사용해 주길 바라는 대가리 아래의 부속품들을 쉴 새 없이 작동시켜 주며, 원래 세계로 귀환한 뒤에 빈둥거렸던 몫까지 더해서 런닝머신 위를 질주했다.

벨트 위에서 떨어지지 않게 빠르게 다리를 내뻗으며 달리고 있을 때마다 운동 기구들 너머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그렇게 신경이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원래 세계에서 게임이나 하고 앉아 있다 보니 성격이 좀 유해졌나.

그 도시에서의 시절 같았으면 바로 시선 마주쳐서 눈으로 쌍욕을 해 줬을 텐데.

온갖 좆같은 일을 겪으며 버티다 보니 그렇게 한 성깔 하게 되긴 했지만,

나보다는 그 쪼만한 년이 특히 그렇게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질색했었다.

자기 몸집 작은 걸로 얕보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 그 눈깔들을 죄다 뽑아버리고 싶다며 투덜대곤 했다.

그럼 난 어떠냐면서 내가 존나게 빤히 바라봐 줬더니,

잠시 뒤에 작달막한 몸을 부들부들거리더니 그 좆같은 시선 치우라며 주먹을 쥐고 달려들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 모신­나강 개머리판에 대가리를 얻어맞고 진압되었다.

“흐흫.”

그 유쾌하다면 유쾌하다고 할 수 있는 도시의 ‘일상’에 픽 웃음을 터뜨리자,

내 옆에 앉아 있던 조그마한 몸집의 밤색 머리칼 소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 왜요?”

“아니다.”

“뭐지. 아침부터 술 마셨나 이 사람?”

내 얼버무림에, 달퐁은 미간을 슬쩍 좁히며 머리를 내 쪽으로 슬쩍 들이밀었다.

고운 밤색의 머리카락 밑으로 귀여운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스으 냄새를 맡는다. 내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알코올의 향기를 체크하려는 모양이었다.

갑작스러운 소녀의 접근에 흠칫할 법도 했지만, 내 마음은 별 반응 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반의반밖에 남지 않은 정체성이 제 기능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도시에서의 그 년과 눈앞의 소녀를 겹쳐 보고 있어서 기묘한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덕에 그런 것인지.

뭐가 됐든 간에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겠다. 미친년 같으니라고.

그런 생각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나는 모자챙이 뒤로 가도록 눌러쓴 다이­아스 모자를 만지작거렸다. 고개 돌릴 때마다 모자챙 거슬리니까 차라리 뒤로 돌려버리라는 달퐁의 의견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에이씨, 알콜 냄새. 글케 마시면 속 안 쓰려요?”

결국 알코올의 기척을 감지해냈는지 그렇게 물어 오는 소녀.

그에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하루 일과를 보드카와 함께 시작하는 놈한테 뭐 하러 그런 걸 물어 보냐.

“내부 정상이다.”

“아니, 러시아 사람들은 신체 구조가 다른가…?

암튼 간에, 빨리 이거나 보세요.”

눈을 깜빡이며 어이없어하던 달퐁은 이내 손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작은 탁자 위에는 책이 하나 놓여 있었다. ‘러시아인을 위한 한국어 문법’.

표지의 타이틀 그대로 러시아권 사람들의 한국어 학습을 위해 만들어 놓은 교재다.

달퐁이 일찍부터 우리 집에 쳐들어온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방송 중에 깔짝깔짝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에, 답답한 나머지 아예 직접 만나서 교재를 하나 펼쳐들고 제대로 된 한국어를 내 대가리에 집어넣으려는 것이었다.

그냥 학원을 가면 되지 않나 싶었지만, 달퐁이 검색해 준 어학원의 등록비를 보고 마음을 접었다. 저 돈이면 헬스장이 몇 개월이냐.

그 외에도 내게 있어서 달퐁은 이 세계에서 그나마 가장 연이 깊은 사람이고, 그녀의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도시의 그 년을 떠올리게 해서 상당한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활동을 계기로 자주 얼굴을 맞대게 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혼자 침대에 기대앉아서 술이나 마시고 있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달퐁이 나를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이유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내 한국어가 답답해 뒤지겠다며 직접 교재 들고 쳐들어오는 그 실행력 엄청난 호의를 차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좀 더 친해지면, 언젠가 말해 주겠지.

그런 생각으로, 나는 내 옆에 앉아서 열심히 교재를 설명해 주는 달퐁의 밤색 머리통을 바라보며 옅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보면 볼수록 되게 쓰다듬기 좋게 생겼네.

도시의 그 년도 이런 느낌이었는데.

사실 도시 놈들이 걔를 그렇게 쳐다봤던 것도 나와 같은 생각이 들어서 그랬던 거 아닐까.

그래. 머리통에 이렇게 손바닥을 얹고, 슬슬 문질러주면서 느껴지는 이 찰진 그립감을 체험해 보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근데 내가 지금 누구 머리를 만지고 있는 거지.

“…뭐 해요?”

“…!”

약간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에, 나는 흠칫하며 상대의 밤색 머리통에서 재빨리 손을 떼어냈다.

생각을 이어나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달퐁의 머리에 손을 댄 모양이었다.

이런 미친년이.

계속 도시의 기억을 끄집어내더니 결국 사고를 치는구나.

원래 세계에 돌아온 이후로 제일 커다란 당황감을 느끼며, 얼른 그녀에게 사과했다.

“Извини. 아니, 미안하다.”

두 손을 서로 쥐어 잡아 허튼 짓을 하지 못 하게 봉인하며 달퐁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분노라기 보단 의문에 가까운 감정이 담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머리는 왜…?”

“실수했다.”

“아니, 뭔 실수를 하면 사람 머리에 손을 얹어요?”

“….”

그러게. 내가 왜 그런 지랄을 했을까.

기껏 한국어 가르쳐주러 왔는데 거기에 집중해야지, 왜 딴 생각을 해 가지고.

달퐁의 물음에 할 말이 없어진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그녀의 손길이 톡톡 내 어깨를 건드려 온다.

“화내는 거 아니니까 저 봐봐요.”

그에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달퐁의 말대로 분노 같은 감정이 일절 드러나지 않은 그녀의 고동색 눈동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년의 눈은 무슨 색깔이었,

“…!”

이를 악물고, 모자에 감춰진 내 대가리를 콱 움켜잡았다.

“이리나?”

아니. 이제 그 새끼 생각은 그만하자.

과거의 기억을 계속 떠올려 봐야 좋을 게 없다.

방금과 같은 상황을 또 맞이하고 싶지는 않다.

달퐁은 달퐁이고, 그 년은 그 년이다.

자꾸 애먼 사람 엮으려 하지 말고 눈앞의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란 말이다.

“이리나! 왜 그래요?”

하지만 왜 그래야 하지?

달퐁을 집에 들여놓은 것도 도시의 그 녀석과 빼다 박아서 그랬던 거잖아.

과거에 기인한 그 친근감이 없었다면 과연 달퐁과 친해질 수 있었을까?

이제 와서, 둘을 따로 놓고 생각한다는 게 가능할 것 같냐?

“Нет(아냐)…. Нет…!”

“이리나! 이리나! 괜찮아요?!”

아니.

불가능한 일이야.

개짓거리 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라, 멍청한 년아.

넌 지금 달퐁을 달퐁으로 보지 않고 있잖아.

삐이—하고, 날카로운 소음이 귓가를 맴돈다.

런닝머신의 버튼 소리를 마구 뒤틀어 길게 늘여놓은 것만 같다.

머리를 움켜쥔 손에 힘을 더하며 고개를 움츠려도, 소리는 결코 멎지 않는다.

원래 세계의 평온함에 짓눌리고 있다.

가만히 휴식을 취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고,

스스로 몸을 혹사시키지 않으면 정신을 안정시킬 수 없다.

그럴 수록 거지같은 도시의 ‘일상’이 그리워진다.

달퐁이 아닌, 그 년이 있는 곳의 하루하루가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돌아가고 싶은 건가?

그 작달막한 몸집의 당돌한 년이 있는 그 곳으로?

그런데,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도시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년은­

“이리나!!”

“…!!”

달퐁의 앳된 외침이 이명을 헤치고 들어와 뇌리를 관통한다.

뭉그러져 가는 의식을 날카롭게 꿰뚫는다.

그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며 시야 주변을 메우고 있던 검은 안개를 치워낸다.

그러자, 달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니가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냐.

넌 잘못이 없잖아.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 하고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내가 멍청이인 거지, 너는 그저 내게 다가와준 것이 전부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두 손을 들어 올린다.

내 양 어깨를 강하게 부여잡고 있던 달퐁의 자그마한 손아귀를 붙잡아, 천천히 떼어 낸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원래 세계에 홀로 떨어진 나에게 전해 주었던 호의처럼 따스했다.

그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결코 달퐁을 곤란하게 해서는 안 된다.

정신 차리자. 나는 꽐라 마녀가 아니라 이리나다. 과거를 떨쳐내야 한다.

아직도 울상 짓고 있는 달퐁의 두 손을 놓아 주며,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였다.

“…괜찮다. 숙취 발생했다.”

“이게 어떻게 숙취에요! 괜찮은 거 맞아요?!”

“슬라브식 숙취다. 보드카 다량 음용할 경우 발생한다.

한국어 공부 계속 진행한다.”

“….”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던 달퐁은, 탁자에 내팽개쳐져 있던 한국어 교재를 다시 집어 들고 펼쳤다.

“병원 가 봐야 되는 거 아니에요?”

“괜찮다. 신체 상태 문제없다.”

“진짜죠? 맘 같아서는 그냥 제가 아까 준 보드카 다 압수하고 싶어요, 지금.”

“무엇?”

“무엇이라고 하지 말랬죠.”

“….”

보드카만큼은 안 된다.

그거 없으면 진짜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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