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슬라브식 스트리머-37화 (37/57)

〈 37화 〉 과거의 망령 (2)

* * *

바로 옆에서 대가리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여준 탓인지,

교재를 보고 대화를 나누며 한국어 공부를 하는 동안, 달퐁은 고동빛 눈동자를 이따금씩 내 쪽으로 향하며 눈치를 살폈다. 중간에 또 언제 지랄을 할 지 몰라 불안했던 모양이다.

보드카 좀 마셔 주면 환청이든 환각이든 싹 사라지니까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다만 이미 슬라브식 숙취라고 되도 않은 변명을 지껄여 놓은 탓에, 중간에 냉동고 문을 열어서 보드카를 꺼내 마시는 건 불가능했다.

최대한 발작이 일어나지 않도록 생각의 흐름을 제한시키며, 한국어 공부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약간의 성과는 있었다.

이미 단어들은 많이 알고 있으니, 그것들의 뒤에 조사를 붙여 좀 더 문장을 자연스럽게 구성하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수십 번의 지적과 함께 피드백을 왕창 받으며 달퐁과 더듬더듬 회화를 이어나갔고, 그 결과 조금이나마 한국어 실력이 돌아오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하루 공부한 것 치곤 꽤나 고무적인 성과다.

‘무엇’의 사례를 생각해 봤을 때, 과연 그게 오래 갈 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부를 마치고 달퐁이 여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본인의 집으로 돌아간 뒤,

나는 곧바로 냉동고를 열어젖혀 차디찬 컴플릿 보드카 병을 꺼내들었다.

음산한 핏빛의 뚜껑을 빙글빙글 돌려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던 40도의 생명수를 서둘러 목구멍으로 넘긴다.

입 안에 서리가 맺힐 것만 같은 냉기를 가득 품고 있던 알코올은 식도를 타고 넘어가 뱃속을 뜨뜻하게 만들어 준다.

“…!”

컴플릿 보드카의 깔끔한 목넘김을 즐기고 있던 나는,순간 입에 들어 있던 생명수를 유리병으로 역류시킬 뻔했다.

이런 시발. 우리 보드카 친구한테 몹쓸 짓을 저지를 뻔했네.

미안해, 컴플릿 동무.

근데 방금 내가 동무의 병뚜껑을 무슨 색깔이라고 했었지?

나는 곧장 뚜껑을 들고 있는 손아귀를 눈높이까지 스윽 들어올렸다.

손에 쥐어져 있던 컴플릿 보드카 병뚜껑.

그것은 깔끔한 은색을 띠고 있었다.

“허.”

그 멀쩡한 모습에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힘없이 아래로 떨궜다.

가지가지 하네, 진짜. 본격적으로 대가리에 지식을 집어넣었더니 부작용이라도 일어난 건가.

보드카를 다시 냉동고 안에 넣어 놓고, 베란다로 나가서 건조대에 널어 두었던 저지와 티셔츠, 레깅스 등을 챙겨들었다.

대협인지 머협인지, 아무튼 그 헬스장으로 운동이나 하러 가자.

존나게 달리다 보면 달퐁이고 그 년이고 죄다 머릿속에서 날려 버릴 수 있겠지. 한국어 공부도 한 김에 오늘은 최고 속도로 달리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볼까.

­기이잉. 위이잉.

싱크대 아래의 세탁기 안에서 다이­아스 특유의 삼선 디자인이 새겨진 옷가지들이 빙빙 돌아가는 것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이내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결국 30km/h는 허락받지 못했지만, 대신 조금이나마 한계 속도를 상향 받아서 그 중간쯤인 27 정도로 질주할 수 있었다.

하드­바스의 강렬한 베이스 대신 심장 박동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버텨내야 한다.

지금부터 그 거지같은 도시로 다시금 걸음을 내딛어야 하니까.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큼지막한 레즈노프 보드카­ 달퐁이 오늘 새로이 가져 왔던 녀석을 들어 올려 한 모금 들이킨다.

그리고는 모니터 화면에 띄워진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AK소총과 마카로프 권총을 장착하고, 방탄 레벨 5짜리 방탄복 이외의 다른 보호구를 껴입지 않아 백금빛의 단발머리가 훤히 드러난 캐릭터, 5Ynoob.

내 면상과 매우 흡사한 얼굴로 손에 들린 AK소총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오늘, 산업 단지 이외 다른 구역으로 진입한다.”

[오]

[드디어 좆업단지 탈출ㅋㅋ]

[제끼런쉒들 결국 청출어람 실패했네 아ㅋㅋ]

[이분 결국 야끼에 뚝배기 안맞음?]

[ㅇㅇ 좃퐁 없으니까 역으로 썰고 다님]

[좃퐁이 억제기였누ㅋㅋㅋ]

[눈나 한국어 ㅅㅌㅊ된거같은데 나만그러냐]

[몰?루]

[ㄴㄴ 원래 저랬자너]

여전히 팔로워 전용에 시간당 채팅 제한까지 걸어 놓았음에도, 채팅은 계속해서 주르륵 갱신되며 내 눈을 피해 위로 솟구쳐 올라가고 있었다. 할 말들이 뭐 그리 많은지 모르겠네.

그 중 몇몇 문장들을 잡아내어 읽어 보니, 아쉽게도 내 한국어 실력의 향상은 네이티브들에게 그리 와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긴. 조사 한 두개 더 붙이는 걸론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렵겠지.

아무튼, 그렇게 됐다.

여러 일을 겪다 보니 이제껏 산업단지에서만 게임을 플레이하고 있었는데,

오늘을 기점으로 새로운 구역에도 들어가 볼 생각이다.

물론 내 5년간의 경험은 산업 단지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어느 곳을 가도 헤매는 일은 없을 거다. 눈 감고 대충 아무 데나 떨궈 놔도 거기가 어디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 맥주에 물 탔다고 뒤통수 갈긴 그 십새끼, 아직도 생각나네.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 듯한 시청자들의 채팅에, 나는 맵 선택 화면에서 산업 단지에 놓여 있던 마우스 커서를 스윽 움직여 그 옆에 위치한 지역으로 옮겼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의 회색보다 자연의 녹색이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구역.

삼림 공원이다.

[선생님?]

[아 ㅅㅂ]

[좆업단지 탈출했더니 좆림을 가네ㅅㅂㅋㅋ]

[눈나 거긴 좀;]

[제끼런 저격은 절대 못하겠누 아ㅋㅋ]

[야끼저격 말고 찐저격 들어올듯ㅋㅋ]

시청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뜨거운 듯하다.

대충 지나가는 단어들을 잡아다 읽어 보니, 꽤나 떨떠름해하는 반응이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곳은 보통 산업 단지보다 교전 거리가 상당히 길다.

근중거리 교전의 비중은 낮고, 그 이상의 간격에서 총알을 주고받는 경우가 태반이다.

사실 교전이라는 표현도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

원거리에서 상대를 일방적으로 뚜드려 패는 저격수들이 존나게 많기 때문이었다.

엄폐물이 심심찮게 널려 있는 산업 단지와는 다르게 개활지가 많고, 또한 넓은 곳을 둘러볼 수 있는 고지대들이 여러 곳 존재해서, 도저히 저격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는 구역이었다.

다시 말해, 산림 공원은 저격수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넘버링이 높은 고관통의 탄환을 가득 챙겨들고, 스코프 달린 저격소총으로 불쌍한 유저들을 저 멀리에서 농락하려 드는 놈들이 수두룩한 장소다.

그건 현실에서도, 아니. 그 거지같은 도시에서도 마찬가지여서,

불가피하게 산림 지대를 지나가야 하거나 다른 목적이 있어 그 대자연의 공간에 찾아온 사람들을 노리는 저격수들이 상당히 많았다.

“걱정할 필요 없다, 카레예츠들.”

그리고 나는,

계약을 통해 그런 놈들을 족치고 다니던 사냥꾼이었다.

“충분히 자신 있다.”

시청자들에게 그렇게 단언하면서, 나는 보드카와 함께 산림 공원에서의 첫 게임을 시작했다.

눈을 뜬 이리나의 캐릭터가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은, 군용 텐트들이 여기저기 설치된 소형 기지였다.

그것만으로 이 곳이 산림 공원의 어디쯤인지 파악한 그녀는, 곧장 AK소총을 챙겨들고 기지 옆의 숲으로 뛰쳐들어갔다. 개활지에서 오래 머무는 것은 자살행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리나가 숲 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들은, 약간의 우려 또는 기대가 마음속에서 피어나게 되었다.

산림 공원 특유의 숲 지형에는 침엽수들이 상당히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기에, 자칫하면 길을 잃게 될 확률이 매우 높았다.

현실적인 요소를 지향하고 있는 FPS인지라 간단한 미니맵조차도 주어지지 않아서,

게임을 얼마 플레이해 보지 않은 라이트 유저들뿐만 아니라 상당한 경험을 쌓은 고인물들조차도 방심하는 순간 길을 잃고 헤매게 되는 곳이 바로 산림 공원의 침엽수림이었다.

시청자들은 이리나가 그렇게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우려하는 한편,

자신 있어 하던 그녀가 숲 속에서 길을 잃어 당황해하는 장면을 나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티 오브 루인이라는 게임을 하면서 매사 침착하고 당당한, 그리고 때때로 보드카에 환장한 듯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슬라브식이라는 표현으로 정리되는 이리나의 기행을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가끔은 그렇게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 또한 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허나, 그런 생각으로 이리나의 숲 속 탐험을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들은 이내 여러 감정이 뒤섞인 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기대가 무색하게, 이리나는 망설임 없이 숲 속을 달려 그녀가 원하는 목적지 근처에 도달한 것이다.

“Oy. 저 곳에 대형 바위 보인다.”

[이걸 바로 찾네ㅋㅋㅋ]

[노잼]

[어케 찾았누;]

[아ㅋㅋ 요즘 언레늒네는 좆림 맵도 다 외우네]

[이쯤되면 사실 언레들이 좆고수인게 아닐까..?]

[지랄노]

[나 19렙인데 여기서 40분 헤맸음ㅅㅂ]

[? 제한시간 40분인데 어케 40분을 헤맴]

[그래서 미아* 됐다고 시1발아]

[앗]

(*미아 : MIA / Missing in Action.

제한 시간 내에 탈출하지 못 할 경우 MIA 처리 되어 모든 아이템을 잃게 된다.)

그에 아쉬움과 황당함 등을 채팅으로 쏟아내던 시청자들은,

이내 갑작스레 귓속을 파고드는 총성에 흠칫하게 되었다.

­타앙!!

시청자인 그들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을 스트리머가 감지해 내지 못 할 리 없었다.

위쪽에서 터져 나온 그 격발음에 이리나는 커다란 바위 근처로 접근하다 말고 즉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높은 확률, 바위 상단에 저격수 존재한다.”

저격에 특화된 맵인 만큼, NPC인 시티즌 중에서도 저격수가 존재했다.

그들은 이리나의 앞에 있는 커다란 바위와도 같은 곳 위에 스폰되어, 유저 저격수와 마찬가지로 원거리에서 총알을 날려 댔다.

따라서 지금 총을 쏘고 있는 상대가 유저인지, NPC인지는 아직 불명확한 상황이었다.

“….”

하지만 지금의 이리나에게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의 정체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이리나는 녀석을 반드시 잡아 죽이고 무기를 빼앗을 생각이었다.

“흐흫.”

이내 웃음을 흘리며, 이리나는 책상 위의 레즈노프 보드카 병을 집어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는 다시금 낮은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흐흐흫.”

그에 영문을 알 수 없는 시청자들이 연신 채팅창에 물음표를 띄워 댔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신경 쓸 수가 없었다.

날카롭다기보단 꽤나 둔탁한 느낌으로 사방에 울려 퍼지는 총성.

그 격발음이 너무나도 자신에게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모신­나강.

자신의 곁을 5년 동안 지켜 주었던 동반자의 그 둔중한 함성을,

과거의 망령이 지니고 있던 가장 커다란 기억의 조각이 내질러 대는 비명을,

그녀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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