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슬라브식 스트리머-42화 (42/57)

〈 42화 〉 그녀와 그녀 (1)

* * *

이리나의 집에 처음 방문할 당시에, 달퐁은 약간 걱정이 되었다.

항상 보드카를 마셔 대며 거친 말투를 사용하는 상대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

집 내부 상태가 그리 긍정적일 것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인터넷이나 기타 미디어를 통해 가끔씩 이슈가 되는 주류 매니아들의 집안 풍경.

방구석에 술병이 높게 쌓여 있다거나 알코올 냄새가 쩔어 있다던가 하는 그러한 광경을 생각하고 있었던 달퐁이었다.

그렇게 달퐁은 나름 비장한 마음으로 이리나의 현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지만,

이리나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자신의 예상이 모조리 빗나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의 풍경은 멀끔하기 그지없었다.

벽도 바닥도 깨끗하고, 술병 같은 게 굴러다니지도 않았으며, 알코올 냄새가 배어 있지도 않았다.

보드카를 마셔 대는 러시아 한량의 방이라고 하기엔 무척이나 단정한 광경이었다.

그에 보드카 운운하던 것이 모두 컨셉이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살짝 의구심이 들었지만,

자신의 선물인 웹캠보다 별 생각 없이 사들고 온 보드카 한 병을 더 반기는 모습과 함께 그녀의 냉동고 속에 들어찬 컴플릿 보드카들을 목격하게 되면서 모든 의심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달퐁이 예상하고 있던 방탕하고 우울한 생활 대신 나름대로 정돈된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듯한 이리나의 모습에, 달퐁은 속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혼자서 술을 마시며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치고는 그녀의 상태가 무척이나 양호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허나, 그러한 달퐁의 생각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리나와 좀 더 친해질 겸, 그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 위해 이리나의 집에서 한국어 교재를 펼쳐들었을 때가 그 시발점이었다.

갑자기 혼자 피식피식 웃고는 그 묘한 매력을 지닌 잿빛의 눈으로 자신을 빤히 쳐다보더니, 뜬금없이 손을 들어 자신의 정수리에 얹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이리나.

그 거칠면서도 어딘가 상냥한 손길에 흠칫한 달퐁이었지만, 이리나는 오히려 그녀보다 더욱 당황한 기색으로 달퐁에게 사과를 해 왔다. 마치 방금 전의 행동은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실수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는 내용이었지만,

이리나는 그 직후 명백히 비정상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눈을 마주한 그녀의 잿빛 눈동자가 거세게 떨리더니,

이내 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꽉 악물고 모자에 덮인 머리를 두 손으로 콱 움켜쥔 것이다.

그에 깜짝 놀란 달퐁이 이리나를 불렀으나,

백금빛의 그녀는 고운 미간을 찡그리고 무척이나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러시아어 같은 것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이리나는 왜 이토록 괴로워하고 있는 것인가?

자신과 눈을 마주한 것이 문제였나? 허나 이미 서로 몇 번이고 얼굴을 본 사이인데, 이제 와서 그게 문제가 될 수 있는 건가?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달퐁은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앞에서 무언가에 시달리듯이 고개를 움츠리고 끙끙대는 이리나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뭐가 어찌 되었든 간에, 그녀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자신까지 덩달아 가슴이 울컥할 정도로 처절하게 괴로워하는 이리나를 어서 구해 주고 싶었다.

두 손과 팔로 머리를 감싸 안은 이리나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커다랗게 그녀의 이름을 외치자, 그제서야 달퐁의 목소리에 반응한 이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멍한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는, 이내 길다란 속눈썹이 담긴 눈꺼풀을 몇 번이고 내렸다 올리며 흐릿한 잿빛 눈에 초점을 되돌렸다.

이리나는 이내 고개를 살짝 틀어 달퐁의 얼굴을 마주했다.

순간 그녀가 또 다시 발작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흠칫했던 달퐁이었지만, 다행히도 이리나는 별 다른 이상 반응 없이 그저 두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본인의 어깨를 부여잡고 있는 달퐁의 두 손을 붙잡을 뿐이었다.

그녀의 손은 상당히 차가웠다. 방금 전의 발작에 대한 여파가 아직 남아 있던 것인지, 미세한 떨림이 달퐁에게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리나는 달퐁을 안심시키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려 보이며 그저 숙취일 뿐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달퐁은 그러한 이리나의 말과 행동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숙취로 인한 두통과 어지럼증이 그렇게 갑작스레 찾아올 리도 없었고,

무엇보다 이리나가 괴로워하는 그 모습은 단순한 숙취에 시달린다기엔 너무나 절박해 보였다.

이리나가 주장하던 숙취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달퐁은 이리나의 안색을 살피며 스스로를 꾸짖어 댔다.

집안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당사자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 판단하다니. 이 얼마나 안일한 생각인가.

다행히 그 이후로는 이리나가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지만, 최초에 목격한 그녀의 발작은 이미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달퐁으로 하여금 마음을 놓지 못 하게 만들고 있었다.

홀로 방구석에서 괴로워하는 그 고통과 무력감을 잘 알고 있기에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이내 달퐁은 속으로 경악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이리나는 이미 스트리머로서 몇 번이나 방송을 진행해 오고 있었다.

그것도 얼굴과 머리칼을 제외한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캠 화면과 함께 말이다.

방송 도중에 그러한 발작을 겪게 된다면 상당히 치명적인 방송 사고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사실상 이리나의 방송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 이후로, 달퐁은 이리나의 방송을 모니터링하기 시작했다.

물론 자신의 방송도 있어서 주구장창 이리나만 신경 쓸 수는 없으니, 방송 매니저들 중 한 명을 이리나 쪽에 심어 두고 무언가 돌발 상황이 발생할 경우 보고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지만, 매니저로부터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말 그대로 무소식이 희소식인 상황이었으나, 달퐁은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방송 다시보기를 확인한 결과, 방송 중에 마시는 보드카의 양이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물론 슬라브식 숙취니 뭐니 하는 이리나의 변명을 믿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보드카의 지나친 복용이 발작에 영향을 줄 가능성 또한 염두하고 있어야 했다.

이후 이리나의 집에 다시 찾아가 한국어를 가르쳐 줄 때 이에 대해 넌지시 물어 보니, 불길하게도 그녀는 자신의 보드카 복용량이 늘어난 것조차 인지하지 못 하고 있었다.

마침 방송을 쉬는 날이기도 했기에, 달퐁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 뒤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직접 이리나의 방송에 들어가 그녀의 캠 화면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평소보다 묘하게 기분이 들떠 있는 듯한 스트리머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의문을 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달퐁의 입꼬리는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폭풍이 몰아치기 전에 유독 바다가 잠잠한 것처럼, 이리나의 그 높은 텐션이 유독 불안하게 느껴진 그녀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리나는 코 밑을 손등으로 훑어냈다.

그녀의 손등에는 새빨간 피가 잔뜩 묻어 있었고,

그 모습은 캠 화면에 고스란히 잡히게 되었다.

그에 눈을 부릅뜬 달퐁의 귓가로, 이리나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져 왔다.

“아. 오늘, 오늘 방송 종료한다. 미안해.”

방송이 꺼지기 직전에 들려 온 그 이질적이면서도 절박함이 묻어나오는 말투에,

달퐁은 등골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갑작스럽게 종료된 방송에, 덩그러니 남겨진 시청자들이 연신 채팅창에 물음표를 도배한다.

그 모습을 뒤로 하고, 달퐁은 서둘러 휴대폰으로 이리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별 일 아닐 거야. 그냥 코피가 터져서 얼떨결에 방송을 끄게 된 것이겠지.

방송 중 처음 겪는 일이라 당황해서 목소리가 그렇게 떨린 걸 거야.

신호음이 몇 번이고 이어지는 동안, 온갖 생각이 달퐁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 큰 문제는 아닐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녀는 통화가 연결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리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에, 달퐁은 곧장 겉옷을 챙겨 입은 뒤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택시를 잡아타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결과는 같았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지려 하는 골목 앞에서 멈춰선 택시.

서둘러 요금을 지불하고 차에서 내린 달퐁은 골목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연락이 끊겨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 지 알 수 없는 이리나를 만나기 위해 달음박질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달퐁의 마음 속 한 구석으로 작은 의문이 생겨났다.

그저 예전의 자신과 처지가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가.

자신을 이렇게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 과연 단순한 측은지심에 불과한 것인가?

그에, 달퐁은 이를 악물었다.

쓸데없는 의구심을 저 멀리 치워 버리며, 발을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갔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리나다.

그녀의 유일한 지인이 나서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이리나를 도와줄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러한 생각으로 헥헥대면서도 계단을 올라 이리나의 문 앞에 당도한 달퐁은, 서둘러 초인종을 누르고 현관문을 두드렸다.

“헥, 이리나! 헤엑, 안에 있어요!?”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숨을 몰아쉬며 이리나의 반응을 살피던 달퐁은,

그에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도어락의 키패드에 손을 대었다.

이리나가 달퐁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준 것은 아니었다.

허나 이전에 스마트폰 구입을 도와주고 같이 집으로 향할 때,

미처 눈을 돌릴 틈도 없이 그녀가 곧바로 키패드를 삑삑 눌러대는 바람에, 달퐁은 그 번호와 입력 순서를 고스란히 목격해 버리고 말았다.

이리나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지만,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달퐁을 집 안으로 들였다.

­삑. 삑삑삑.

비밀번호와 함께 그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달퐁은, 키패드를 누르면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은연중에 이런 상황이 생길 것을 대비해,

일부러 자신에게 비밀번호를 노출한 것은 아닐까.

­삐리릭!

그건 네가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이, 곧바로 도어락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그에 달퐁은 얼른 현관문을 당겨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그녀의 앞에 펼쳐진 광경에, 달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냉장고의 윗문은 열려 있어 텅 빈 냉동실을 훤히 드러내고 있었고,

바닥에는 보드카 병이 박살난 채, 집안 이곳저곳에 내용물을 흩뿌려 놓고 있었다.

씁쓸한 알코올의 냄새가 방 안을 맴도는 가운데,

방의 주인은 냉장고 앞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달퐁이 서둘러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이리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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