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슬라브식 스트리머-44화 (44/57)

〈 44화 〉 그녀와 그녀 (3)

* * *

“이리나!”

냉장고 앞에 쓰러져 있던 이리나를 발견한 달퐁.

그녀는 서둘러 신발을 벗어던지고 이리나에게 달려갔다.

“이리나! 괜찮아요?!”

다행히 의식이 남아 있는 것인지, 이리나는 작게 신음성을 흘리며 몸을 미약하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에 달퐁은 찬 바닥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몸을 붙들고, 낑낑대며 부축해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아래로 떨구고 있던 이리나의 고개가 스윽 올라간다.

달퐁의 고동색 눈빛과 이리나의 잿빛 시선이 허공에서 충돌한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 달퐁은 순간 표정을 굳혔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리나의 고운 눈매가, 슬픔과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던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은 표정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가는 메말라 있을 뿐이었다.

그 이질감에 달퐁이 혼란을 느끼는 사이, 축 늘어져 있던 이리나의 팔이 슥 움직여 어디론가 뻗어졌다.

이내 그녀의 손이 달퐁의 겉옷 자락을 붙잡았다.

달퐁은 자신의 옷을 꽉 붙들고 놓지 않는 그녀의 행동에 당황했으나,

곧 이리나의 창백한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마샤… 니예 하디(가지 마)…!”

“어, 에?”

절박함이 가득 묻어 있는 그녀의 중얼거림.

그것을 순간 이해하지 못 한 달퐁의 사고가 잠시 정지해 있는 동안, 이리나는 달퐁을 놓아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울음기 섞인 말을 이어나갔다.

“[거기로 가면 안 돼…! 그 개새끼가 죄다 터뜨릴 거야!]”

“…!”

그에 이리나가 붙들고 있던 밤색의 소녀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안 된다며, 가지 말라며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파악해 낼 수 있었다.

이리나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한편, 달퐁 본인 또한 시간이 될 때마다 이리나의 모국어를 조금씩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달퐁은 그 목소리에 가득 들어찬 감정이 고스란히 자신의 마음속에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리나는 애원하고 있었다.

기억 속의 누군가를 달퐁에게 투영하여, 한 팔로 자신의 허리를 껴안고 다른 손으로 겉옷의 소매를 강하게 쥐어 잡은 채, 상반신을 기대며 매달리고 있었다.

반쯤 머리에 걸쳐져 있던 다이아스 모자가 그 움직임에 벗겨진다.

달퐁 앞에서 항상 모자에 가려져 있던 이리나의 백금빛 머리카락은, 그녀의 마음속을 대변하듯 거친 모양으로 잘려 있었다.

결코 단정하다고 할 수 없는 그 머리 모양새에, 달퐁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살고 싶다면서…!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다고 했잖아…!]”

“….”

“[마샤, 안 돼. 제발 죽지 마. 가지 마.]”

“이리나….”

아직 알아듣기 힘든 러시아어들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어떠한 단어 하나만큼은 달퐁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마샤.

이리나가 몇 번이고 연호하던 그 단어는, 누군가의 이름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마샤를 부르짖던 이리나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과 그리움이 듬뿍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인가.

그에 달퐁은 조금씩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을 보며 자꾸 피식 웃던 이리나.

무심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고선 흠칫 놀라는 이리나.

이 쪽과 눈을 마주치고, 발작을 일으키며 괴로워하는 이리나.

자신이 그녀에게서 예전의 본인을 떠올리고 보다 친근하게 다가갔듯이,

이리나 또한 지금껏 자신과 마샤를 겹쳐 보며 그러한 반응을 보였던 건가.

그렇게 생각을 이어나가던 달퐁은, 이내 정신을 퍼뜩 차렸다.

전말이 어찌 되었든 간에, 자신은 이리나의 뒷사정을 캐내려고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다.

우선은 이리나를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달퐁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이리나를 따라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두 팔로 이리나의 목어깨를 감싸며 꼬옥 안아 주었다.

“마샤…!”

씁쓸한 알코올의 향이 물씬 풍기는 와중에, 달퐁은 그녀의 등을 손바닥으로 약하게 두드려 주며 머릿속으로 자신이 배웠던 러시아어를 쥐어짜냈다.

마샤를 찾지 못 해 이토록 그리워하고, 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만큼은 그녀가 원하던 마샤가 되어 이리나를 위로해 주리라.

누군지는 몰라도, 저한테 빚진 거예요. 마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달퐁은 입을 열고 앳된 목소리를 이리나의 귓가에 전달했다.

“야 브 포랴드케.”

(난 괜찮아.)

“…!!”

“스파시바, 따바리쉬.”

(고마워, 동무.)

따뜻한 어조로 그렇게 러시아어를 속삭여 주면서도, 달퐁은 한편으로 마음을 졸였다.

기초 중의 기초에 해당되는 회화인지라, 그것이 제대로 이리나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을 지 염려되었던 것이다.

허나,

때로는 온갖 미사여구보다 한 마디의 간단한 말이 더욱 효과적으로 작용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달퐁의 품에 안긴 이리나의 눈이 한순간 크게 뜨여졌다.

한껏 올라간 눈꺼풀 아래로 잿빛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며 감정의 동요를 여지없이 나타냈다.

밤색 머리카락의 마샤가, 자신을 꼭 안아 주었다.

상냥한 손길로 등을 두드리며, 그 앳된 목소리로 감사를 전한다.

나는 괜찮다고,

더 이상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리나로 하여금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과거의 망령에게 붙들려 있던 마녀를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마녀의 귓가를 맴돌던 총성이 모습을 감춘다.

그녀의 비강을 자극하는 화약의 냄새가 흩어져 사라진다.

이리나의 몸을 짓누르던 전장의 무거운 공기가 옅어진다.

“…읏.”

도시의 마녀에서, 다시금 이리나로 돌아온 그녀.

이리나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했다.

그 한 마디가 듣고 싶었다.

너를 잃은 죄책감에 고통의 진창으로 빠져들어가는 자신에게, 많은 것은 필요 없었다.

그냥, 네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내게 욕을 하든 뭘 하든 간에,

그 앳된 음색을 들으며 실없는 미소를 지어 보고 싶었다.

“흐, 으윽.”

입에서 억눌린 소리가 새어 나온다.

눈매가 일그러진다.

잿빛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진다.

옷깃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팔을 뻗어 상대를 마주 끌어안는다.

이젠 너무 늦었지만,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이 자리에 와 버렸지만,

어찌 되었든,

지금이라도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다.

괜찮다고, 고맙다고 말해 주어 고맙다.

밤색 소녀의 가녀린 몸을 꽉 껴안은 채,

이리나는 그녀의 좁은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상처 입은 맹수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것이 이리나의 입에서 작게 흘러나왔다.

눈물 대신 미련을 흘려보내며,

그녀는 한참 동안 상대의 품 안에서 어깨를 들썩였다.

“휴우.”

바닥에 흩뿌려진 보드카 병 조각과 40도의 독주를 전부 치워 낸 달퐁은, 이내 탁자 앞의 의자에 털썩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방 안에서 술 냄새가 좀 가시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슥 돌려 침대 쪽을 쳐다보았다.

그 위에는 이리나가 가지런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이불까지 잘 덮은 채,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에 빠져 있었다.

물론 전부 달퐁의 작품이다.

그녀를 꼬옥 안고 오열하던 이리나가 정신적인 피로를 감당하지 못 했는지 그대로 잠들어 버렸기에, 작은 체구로 어떻게든 낑낑대며 이리나를 옮겨 침대 위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드러난 고운 백금빛의 속눈썹을 바라보던 달퐁은, 이내 시선을 살짝 옮겨 이리나의 머리칼 쪽을 살폈다.

본인이 직접 손질하기라도 했는지, 대충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만 여기저기 잘려 있었다.

좀 돌려서 말하자면 상당히 단정치 못 한 헤어스타일이었고,

그냥 아주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거지꼴이었다.

이래서 볼 때마다 모자를 쓰고 있었구나.

머리를 가리고 있다는 건 본인도 자기 머리 상태를 알고 있다는 뜻일 텐데.

지금까지는 누군가와 교류할 일이 없어서 그렇게 방치해 두고 있었던 것일까?

사고가 거기까지 진행되자, 달퐁은 자연스레 이리나의 과거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녀는, 과연 무슨 연유로 한국에서 혼자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 것일까.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것이기에, 그토록 힘들어 하는 걸까.

뭐가 되었든 간에, 결코 긍정적인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탁자에 턱을 괴고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는, 이내 다시금 이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당사자에게 듣기 전까진 알 수 없는 일이다.

허나 그 과거가 본인의 정신을 무너뜨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굳이 그것에 대해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이리나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런 생각으로 이리나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던 달퐁은, 이내 또 다른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자신은 어째서 이토록 이리나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암흑기를 연상시키는 그 모습을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마음으로 다소 성급하게 대면을 하기는 했지만, 과연 그 뿐일까?

이리나에 대한 측은지심만으로 그녀를 이렇게 돌봐 주고…. 돌봐준다는 표현이 맞나? 맞겠지. 내가 도와 준 게 한둘인가? 방송에 스마트폰에 한국어에, 이제는 쓰러진 거 구해주기까지 했는데.

아무튼, 그렇게 이리나를 돌봐 주는 자신의 마음을 과연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깨지기 쉬우면서도 엄청 아름다운 유리 조각상을 보호하고 싶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무언가 그럴듯한 표현을 떠올리기 위해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들기며 생각에 빠져 있던 그녀는, 이내 이불깃이 스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어느새 허공에 두고 있던 시선을 다시 내려 이리나를 쳐다본 달퐁은,

그녀의 얼굴에 무언가 곤란한 듯한 표정이 서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희미한 신음성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설마 자는 중에도 발작이 도진 건가 싶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달퐁이 서둘러 침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바로 그 순간,

이리나가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쑤카!!”

“와아아악!!”

박력 넘치는 러시아식 기상에 화들짝 놀란 달퐁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리나의 욕설과 달퐁의 비명이 한 데 뒤섞여 방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