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그녀와 그녀 (4)
* * *
어느 샌가,
나는 깨끗한 원룸으로 돌아와 있었다.
작은 탁자 앞에 앉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와 컴퓨터 책상, 싱크대와 그 밑의 세탁기 등등.
원래 세계로 돌아온 뒤 내게 주어진 그 방의 풍경이 맞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지?
분명 그 놈의 게임을 하다가 코피가 터진 뒤,
거지같은 발작이 제대로 도져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휘적거리다가 쓰러졌을 텐데.
그 다음에는, 밤색 머리칼을 가진 마샤가 내게 돌아와서 나를 위로해 주고….
아니. 아니야. 그건 마샤가 아니라
“[뭔 생각이 그리 많아?]”
“?!”
갑작스럽게 옆에서 들려온 앳된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급히 옆으로 틀자,
거기에는 어느 새 옅은 회갈색 머리를 어깨 밑으로 내리고 있는 소녀가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내 입에서 자연스레 단어 하나가 새어 나온다.
“…마샤?”
눈매가 살짝 위로 치켜 올라간 그녀는, 그런 내 반응이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갑자기 왜 불러?]”
“[아니….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냐?]”
지금의 상황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내가 그렇게 질문을 던지자,
마샤는 뭔 소릴 하냐는 듯 탁자 위를 탁탁 두들겼다.
“[왜 있기는. 니가 같이 한국어 공부하자며.]”
“[…한국어?]”
그에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고개를 돌려 탁자를 바라보자,
거기에는 한국어를 공부할 수 있는 교재가 펼쳐져 있었다.
상당히 낯익은 내용. 이건 분명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책이었다.
그래. 마샤가 아니라,
마샤와 똑 닮은 그녀가 한국어 공부를 하자고 가져왔던
“[자, 준비 됐어요?]”
“…?!”
그 때,
화장실에서 밤색 머리칼을 지닌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이라도 씻은 듯, 두 손을 휙휙 털어내며 이 쪽으로 걸어온다.
바닥에 물 다 튀잖아, 임마. 수건으로 닦고 오라고.
아니, 이게 아니라.
달퐁은 또 왜 여기 있는 거야.
그것도 존나게 똑같이 생겨 먹은 마샤랑 같이.
괴상하게 찡그려진 내 얼굴을 본 달퐁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 모습이 마샤와 똑 닮아 있어서 더 기분이 이상하다.
“[으응? 이리나는 표정이 왜 그래요?]”
“[몰라. 아까부터 좀 이상하던데. 너 대낮부터 또 보드카 빨았냐?]”
달퐁의 물음에, 말문이 막힌 나 대신 마샤가 대신 답해 주며 투덜거린다.
이게 대체 무슨 지랄이야.
달퐁 저 년은 언제부터 러시아어를 잘 하게 된 거고, 둘은 또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지.
나는 언제 이 새끼랑 같이 달퐁한테 한국어를 배우게 된 거고?
저절로 머리를 붙잡게 만드는 이 혼란스런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자,
어느 새 내 옆으로 다가온 달퐁과, 아까부터 옆에 앉아 있던 마샤가 동시에 내 팔을 양쪽에서 붙잡는다.
“허?!”
양 팔에서 느껴지는 두 소녀의 손길에 흠칫하고 있자,
좌우에서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와 귀를 간지럽힌다.
“[이리나. 괜찮아요?]”
“[마녀. 괜찮냐?]”
동시에 짓쳐드는 두 명의 물음에, 등골이 오싹해진다.
이건 뭔가 위험하다. 아니, 위험하다고 해야 하나. 묘한 위기감이 느껴진다.
내 팔을 붙잡은 그들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비현실적인 힘이 나를 단단히 속박하고 있다.
그에 경악하여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려 애쓰는 사이,
밤색과 옅은 회갈색의 소녀는 양 옆에서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 새 내 시야의 반절씩을 차지한 두 소녀의 얼굴.
약간의 인상과 표정의 차이만 있을 뿐, 서로 완전히 닮아 있는 그녀들이었다.
그 모습에 약간의 공포까지 느끼고 있는 나에게 면상을 가까이 들이댄 둘은,
동시에 입을 열어 그 앳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째서인지, 그 한 마디만큼은 한국어로 들려왔다.
“일어나요.”
“일어나.”
“Cyka!!”
“와아아악!!”
걸쭉한 욕지거리와 함께, 상반신을 벌떡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느껴지는 푹신한 침대와 이불의 감촉.
방금까지 탁자 앞에 앉아 있던 몸뚱아리는 어느 새 침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둘러본다.
옅은 회갈색 머리의 소녀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뭣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뭔가 혼이 나간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달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연다.
“아이씨, 놀랬잖아요. 몸은 좀 괜찮아요?”
“허?”
그 앳된 외침 속에 담겨진 한국어를 듣고, 그제야 현실감이 돌아온다.
두 소녀가 옆에서 나를 붙들고 있던 것은 역시 꿈이었나.
당연히 그렇겠지. 그 거지같은 도시의 그 년이 여기에 올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옆머리를 긁적이고 있자니, 이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달퐁이 침대 곁으로 다가온다.
고개를 들어 그 고동빛 눈을 마주본다. 머리칼처럼 마샤의 것보다 훨씬 색이 진하다.
마샤 생각은 안 하기로 했는데. 또 이러네.
아니. 이제는 상관없나. 내게 괜찮다고 해 주었으니까.
잠깐만. 그 말은 누가 해 줬던 거지?
분명 바닥에 자빠져 있던 나를 일으켜 주고, 껴안아 주면서 그 앳된 목소리로 감사를 전해 주었는데.
그러한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아 풀리게 되었다.
마샤의 몸집과 마샤의 외모, 마샤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단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그에 나는 눈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달퐁.”
“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언젠가 그녀에게 배웠던 인삿말을 읊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어, 에?”
“달퐁이 나 위로했다. 그것 매우 감사합니다.”
“…아. 그거요.”
그러자, 상당히 복잡한 표정을 얼굴에 띄우는 달퐁.
그러더니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내게 말한다.
“그,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몸 조심하세요.
방송하다 그렇게 쓰러지면 큰일 나요.”
“음. 확인했다.”
“확인했다 말고, 제가 알려준 거 있잖아요.”
“…알았다.”
내가 마샤를 부르짖은 것에 대해서는 일부러 화제를 피해 주는 건가.
그녀를 붙잡고 온갖 지랄을 떨었으니 궁금할 법도 한데.
그토록 마샤와 빼닮아 있는 그녀였으나, 그 마음씨만큼은 차이를 보이는 듯 했다.
아니. 그런 것만도 아닌가. 분명 마샤도 틱틱거리긴 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고개를 살짝 털며 생각을 흩뜨려 낸다.
눈앞에 있는 건 달퐁인데, 언제까지 마샤랑 비교 질이나 할 거냐.
내가 머리를 흔드는 것을 목격했는지, 달퐁이 조심히 어깨를 짚어 온다.
“괜찮아요? 또 어지러운 거 아니에요?”
“괜찮다.”
“저번에도 그렇게 말해놓고 이 사단 났잖아요.”
“…이번은 정말 괜찮다. 현기증 없다.”
달퐁의 걱정에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이불에서 빠져나와 침대에 걸터앉은 나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달퐁.”
“네?”
“여기, 무슨 방법으로 진입했나?”
“아….”
당시에 집주인은 정신이 나가 있었으니, 분명 스스로 현관문을 따고 들어왔을 것이다.
현관문이 멀쩡한 걸 보면 부수고 들어온 건 아닐 텐데, 내가 달퐁한테 비밀번호를 알려 준 적이 있었나?
그런 내 물음에 찔끔한 달퐁은,
시선을 살짝 피하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그…. 저번에 비번 누르는 걸 봐가지고….”
“아.”
그 대답에, 내가 짧게 탄성을 흘렸다.
그게 아마 스마트폰 사고 같이 집에 갈 때였나, 언제였나.
아무튼 그 때 별 생각 없이 도어락 키패드를 삑삑 누른 게 달퐁에게 고스란히 보였던 모양이다.
마샤 역시 나와 같은 은신처에서 생활했었기에, 당연히 그 진입 방법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 마샤를 닮은 달퐁에게서 느껴지는 친근감 때문에 나도 모르게 경계심 없이 행동했던 것이었다.
잠깐 뒤에 실책을 눈치 채긴 했지만, 일반인이, 그것도 달퐁이 몰래 집에 쳐들어와 내게 암습을 가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별 생각 없이 넘어갔던 건데, 그 판단이 나를 살리게 될 줄이야.
“잘했다, 달퐁.”
“…? 잘했다고요?”
“비밀번호 모를 경우, 진입 불가능했다.
비밀번호 포착해서 나에게 도움 가능했다.”
“그렇긴 한데….”
뭔가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달퐁을 보며, 나는 한 가지를 더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달퐁은 나한테 지금껏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헌데 내가 과거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편한 어투의 러시아어로 그렇게 말해 줌으로써 나를 구해 주고, 마샤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는 것에 도움을 주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녀로 하여금 반말을 사용하게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친근감은 둘째 치고, 그 편이 내 정서 안정에 훨씬 도움이 될 듯싶다.
내가 지금껏 계속 그녀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고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달퐁이 계속 내게 존댓말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음. 달퐁.”
“그래도 비번을 그렇게…. 네?”
“반말 사용 가능하다.”
“…? 지금 반말 하고 있잖아요.”
존대를 때려치우라는 내 말에, 달퐁이 고개를 갸웃한다.
뭔가 내 말을 잘못 이해한 모양이다.
“아니다. 달퐁 나에게 존댓말 사용 중이다.”
그렇게 말한 뒤에야, 달퐁이 그 의미를 깨닫고 눈썹을 치켜올린다.
“그, 이리나한테 반말하라고요?”
“그렇다.”
“…갑자기요?”
“이미 러시아어로 나에게 반말 사용했다. 갑자기 아니다.”
“아니, 그건….”
“나 역시 달퐁에게 반말 사용 중이다.
나에게 존댓말 사용할 이유 없다.”
내 설득에 연신 어, 음, 거리며 애매한 표정을 짓던 달퐁은,
이내 납득한 듯이 픽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니, 알았어.
이렇게 하면 되지?”
“훌륭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