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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식 스트리머-47화 (47/57)

〈 47화 〉 슬라브식 복귀 (2)

* * *

이리나가 이 게임­ 매드 트럭 시뮬레이터를 택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시티 오브 루인은 게임 특성상 조우하게 되는 모두가 적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 살벌한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잠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만든다.

그러한 치열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없는, 비교적 평화로운 느낌의 게임을 골랐던 것이었다.

물론 타이틀에 매드(Mad)가 붙은 시점에서 이 게임이 평범한 트럭 운전 시뮬레이션 게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이리나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봐야 운전 게임인데,

설마 하드코어 FPS보다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한 생각으로, 이리나는 자신의 앞에 놓인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게임의 로딩을 기다렸다.

진짜 해명도 안 하고 이 게임으로 밀어붙이는 거냐며 시청자들이 채팅창에서 떠들어 대고 있었으나, 그녀는 거기에 시선만 흘끗 던졌을 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러시안 샹송의 반주를 따라 흥얼거렸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컴퓨터를 켜지 않았기에 정확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던 이리나는, 달퐁의 연락을 받고서야 자신의 스트리머 게시판­ 트랙이 실시간으로 화끈하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리나는 웬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했니 뭐니 소리치면서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군데군데에서 보이는 것에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게시판을 훑어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갑작스레 스트리머 생활에 위기가 찾아왔나 했더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핵을 사용했다는 증거도 없고 그러한 정황 자체도 포착되지 않아서 별다른 의심도 받지 않고 있는 마당에, 몇몇 인간들이 자신 망하는 꼴 보겠답시고 여기저기서 분탕질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유쾌하게 넘어갈 수 있었던 보드카 해명과는 다르게, 이번 건은 이리나의 기분을 더럽히기에 충분했다. 그 노스코프 저격 플레이에 녹아든 5년 간의 고생과 경험을 고작 불법 프로그램 따위로 치부하려는 저들의 행동이 무척이나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짜증이 차오르면서도, 이리나는 냉정한 사고를 유지했다.

병신에게는 먹이를 주지 말라는 격언이 있듯이, 굳이 저런 놈들에게 일일이 반응해 줄 필요는 없었다.

시티 오브 루인이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이유 중에는 핵에 대한 신속하고 철저한 대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핵 신고가 접수되면 빠를 경우 하루, 아무리 늦어도 3일 이내에 모든 분석 및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대놓고 핵을 사용하는 이들은 그 수명이 채 일주일을 가지 못 했다.

그렇기에 핵무새들의 분탕에 의한 강제적인 의혹이 발발한 지 4일째가 되는 내일쯤이면, 이리나의 오이늅 계정 생존 여부가 모든 것을 결정 짓게 될 예정이었다.

물론 이리나가 계정 정지를 당할 확률은 극히 낮았고,

만약 사측의 판단 착오로 계정이 정지된다고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캠으로 화면을 비추든, 어떤 방법을 쓰던 간에 불법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고스란히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리나가 내일 계정의 상태를 보고 진행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 시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게임사 측의 분석과 그 결과이기 때문에, 그녀가 굳이 해명하겠답시고 먼저 나설 이유가 전혀 없었다.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흉흉한 것도 아니니,

이리나는 그저 어거지로 해명하라며 떼를 쓰는 이들을 트럭으로 밀어내 버릴 뿐이었다.

게임의 로딩이 완료되고, 곧장 튜토리얼이 진행되었다.

그녀는 어떠한 트럭의 운전석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제서야 이리나는 입을 열어 시청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음. 반갑다 따바리쉬들. 어제 휴식 충분히 취했다.”

[오늘은 총겜 말고 트럭겜임?]

[ㅋㅋㅋ트랙 불타는데 혼자 드르렁했누]

[방장 매니저 언제뽑아ㅅㅂ]

[따바리시가 머여]

[김치맨 시1발아 몇번 설명하냐]

[오늘 첨왔는데 모를수도 있지 십련이]

아무 생각 없이 따바리쉬의 뜻을 물었다가 쌍욕을 얻어먹게 된 유입 시청자가 화를 내는 동안,

이리나는 레이싱 휠에 달린 버튼으로 시야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매드 라는 이름이 붙기는 했어도 기본적으로 시뮬레이션 게임이었기에, 트럭의 운전석을 충실하게 구현해 놓은 모습이었다.

그 풍경을 둘러보던 이리나는, 이내 흠. 하고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사실, 그녀는 운전에 익숙하지 못 했다.

도시 내의 자동차들은 모두 망가지거나 내부 부품들이 사라져 있어 작동이 불가능했고,

설령 ‘바깥’에서 차량이 유입된다 해도 곳곳에 설치된 철조망과 바리케이드, 지뢰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주행이 어려웠다.

따라서 이리나의 운전 경험은 어떤 미친 인간이 장애물이나 지뢰 등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 있도록 마개조를 시켜 놓았던 군용 지프를 탈취해서 몰아 본 정도가 전부였다.

사실상 일반적인 운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리나는 게임을 진행하기 전에 미리 운전 방법을 공부하여 보다 능숙하게 트럭을 몰 수 있도록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이리나의 계획에 달퐁이 태클을 걸었다.

너무 게임을 잘 하는 모습만 시청자들에게 보여 주면 재미가 없다며,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맨땅에 헤딩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조언을 해 주었다.

그렇게,

운전대 앞에 앉아 있는 이리나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게 되었다.

그래도 그 놈의 군용 지프를 타고 질주해 본 경력이 있었기에,

어떻게 하면 차가 앞으로 나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던 그녀였다.

일정 영역에 파랗게 선이 그어져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목적지를 앞유리창 너머로 바라보며,

이리나는 자신 있게 핸들을 붙잡았다.

“저쪽으로 이동한다.”

이내 바닥에 설치해 놓았던 페달에서 맨 오른쪽의 것을 꾹 밟는 이리나.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에 바닥의 액셀과 운전대를 번갈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던 이리나는,

곧 시동을 걸어 보라는 시스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Oy.”

시동도 안 걸고 액셀을 밟으려 했었던 건가.

시동 걸려 있는 것만 뺏어 타서 깜빡하고 있었네.

그런 생각을 하며, 이리나는 백금빛 머리칼이 모자 밑으로 살짝 튀어나온 옆머리를 긁적였다.

[?ㅋㅋㅋㅋ]

[방금 뭐한 거임ㅋㅋ]

[눈나 시동부터 걸어..]

[시동도 안키고 풀악셀 밟네ㅋㅋㅋ]

[이게 늒네지 아ㅋㅋ]

불타는 게시판에 대한 얘기로 채팅창을 시끌벅적하게 만들고 있던 시청자들은, 이리나가 방송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그 미숙한 모습에 곧 웃음을 머금게 되었다.

총이나 도끼를 들고 느긋하게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시티 오브 루인의 고인물 오이늅은 어디로 가고, 시동을 켤 줄 몰라 운전대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초보 운전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어찌어찌 트럭에 시동을 거는 것에 성공한 이리나.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전진하겠다는 생각으로 페달을 콱 밟았다.

허나 이번에도 트럭은 전혀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허?”

다시금 고개를 갸웃하며 의문을 표하던 그녀는,

또 다른 메시지를 발견하고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변속기의 레버를 조작하지도 않고 운전을 시작하려 했던 것이었다.

[?? 기어 안바꿈?]

[레이싱겜 아니야 미친련아ㅋㅋㅋ]

[아니 ㄹㅇ 늒네였네;]

[암것도 모르고 걍 꼬라박는 거였음?]

[이럴거면 휠 왜샀는데ㅋㅋㅋㅋ]

나 운전 미숙이오 라고 써 붙여 놓은 듯한 그녀의 모습에 시청자들이 웃어대고 있을 무렵, 운전대 옆에 부착된 레버를 만지작거리던 이리나가 마침내 기어를 진행 쪽에 놓는 데 성공했다.

그 순간, 트럭이 우렁찬 배기음과 함께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녀가 기어를 바꾸는 동안 계속해서 액셀을 밟고 있었기에,

중립에서 진행으로 넘어가는 순간 이때다 하고 달려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였다면 기어에 큰 무리가 가해지는 행위였겠지만,

이 유사 시뮬레이션 게임은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트럭을 급출발시켰다.

“?!”

[급발진 무엇;]

[악셀 밟고있었네ㅋㅋㅋㅋ]

[급출발 불법이야 눈나..]

[방장한테 차 맡기면 하루만에 망가질듯ㄹㅇ]

[빨리 핸들 돌려ㅅㅂㅋㅋ]

뜬금없는 전속 전진에 황급히 이리나가 기어 레버에서 손을 뗐다.

핸들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빙글빙글 돌려대며,

어떻게든 방향을 틀어 트럭을 목적지로 향하도록 만들기 위해 애썼다.

다행히 이리나의 노력이 빛을 발하여,

그녀의 트럭은 파랗게 반짝이고 있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허나,

이리나의 발은 여전히 액셀을 꾸욱 밟고 있는 중이었다.

[??? 이분 어디감]

[체크포인트 찍고 있누ㅋㅋㅋ]

[왜 속도가 계속 올라가냐ㅋㅋㅋㅋ]

[풀악셀 멈춰!!!!!!!]

당연하게도 목적지를 쌩하니 지나쳐 버린 이리나의 트럭은, 곧장 창고의 벽으로 돌진했다.

그에 아연실색한 이리나가 열심히 핸들을 돌려 창고와의 정면충돌을 피해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한쪽으로 몸체를 기우뚱하면서도, 트럭은 어떻게든 방향을 꺾어 충돌 사고를 모면해 냈다.

핸들을 꼭 붙잡은 채, 이리나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허나 안심하기에는 아직 이르렀다.

창고를 피해 낸 그녀의 눈앞에,

어떠한 구조물이 곧장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뭉툭한 권총처럼 생긴 주유기들과 호스로 연결되어 있는 직사각형의 기계들.

그것들이 줄지어 나란히 서 있는 가건물로, 이리나의 트럭이 무섭게 돌진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가건물의 위쪽에 적혀 있는 글자가 이리나의 눈에 들어왔다.

[Gas Station]

(주유소)

그 뜻을 알아챈 그녀가 미처 핸들을 꺾을 새도 없이,

이리나의 풀악셀로 속도가 마구 붙어 있던 트럭은 그대로 주유소를 들이박았다.

­콰아앙!!

튜토리얼에서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주유소는 기름과 함께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 화마는 곧장 이리나의 트럭을 덮쳐서 커다란 고물 덩어리로 만들어 버렸다.

네가 저지른 짓을 감상해 보라는 듯이, 카메라가 3인칭으로 전환되어 트럭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한다.

“….”

이리나는 대형 캠프파이어가 되어 활활 불타는 자신의 트럭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그녀의 방송을 지켜보고 있던 시청자들은 트럭 대신 채팅창을 뜨겁게 불태우기 시작했다.

[ㅋㅋㅋㅋㅋㅋㅋ]

[ㅁㅊ 박아도 거길 꼬라박네ㅋㅋㅋ]

[튜토리얼에서 트럭 터뜨리는건 첨본다 시1발ㅋㅋㅋㅋ]

[난 저기 주유소 있는줄도 몰랐음ㅋㅋㅋㅋ]

[방장 트랙처럼 활활 타누ㅋㅋㅋ]

[음주운전이 이렇게 위험합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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