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고급인력 구출작전 (3)
* * *
비록 급여를 받지 않고 활동한다고 해도,
관리자들은 결국 커뮤니티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바치고자 모인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커뮤니티의 관리에 나름의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언가 대형 떡밥이 등장하거나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때 곧장 비상사태임을 알리고 잔여 인력을 동원하기 위해 비상 연락망 기능을 하는 채팅방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관리자들의 채팅방은 비상 상황 발령 외에도 분탕충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거나 커뮤니티 규정에 대해 논의하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활용되어 왔으며,
이용자들의 꼬장에 멘탈이 박살난 누군가가 푸념을 늘어놓으면 다른 이들이 적당히 달래 주어 업무로 복귀하게 만드는 힐링캠프의 역할 또한 하고 있었다.
말이 힐링이지 결국엔 관리자 일에 지쳐 가는 이들이 탈주하지 못 하도록 붙잡아 두는 억제기라고 보아도 무방했지만, 어찌 되었든 오늘도 ‘시루갤 노예방’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채팅방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최적화:
[님들]
[저 오늘까지만 일함 ㅅㄱ]
그 때,
억제기, 아니. 힐링캠프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의 일을 하다가 갱신 알림을 보고 채팅방을 들여다 본 관리자들은,
해당 인원의 닉네임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최적화.
길어야 3~4개월이면 벗어던지는 푸른 완장을 1년 이상 착용하고 있는 베테랑이자,
이 자리의 누구보다 커뮤니티의 관리에 열성적으로 임하는 고급 인력이다.
완갈통:
[ㅋㅋ점마 또 발작 일으키누]
도트박이:
[시즌 348번째 탈주선언ㅋㅋㅋ]
카스조아:
[또 리버스짤 도배당함?]
그러한 인재가 관리자를 그만두겠다 외치고 있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다른 이들의 반응은 미적지근하기 그지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최적화는 이전에도 채팅방에 찾아와서 관리자직 못해먹겠다며 투덜거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다른 이들과 다르게, 그는 타 관리자들이 애써 열심히 달래줄 필요도 없었다.
최적화는 마음속에 쌓인 응어리를 풀어놓는 것만으로 정신력을 회복하고,
이제 일하러 가보겠다면서 쿨하게 돌아갔던 것이었다.
과연 닉네임대로 완장에 최적화된 몸이라고 불릴 만한 인간이었다.
처음엔 정말로 그가 도망가 버리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던 그들이었지만,
비슷한 상황을 몇 번이고 반복하게 되니,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저렇게 분노를 쏟아내고 나면 다시 기운을 내서 일을 하러 가는 사람이었으니,
관리자들은 오늘도 응당 그럴 것이라는 생각으로 적당히 그의 말을 받아 줄 뿐이었다.
최적화:
[ㄴㄴ]
[오늘은 발작 아님]
[지금 기분 아주 조크든요]
헌데, 오늘은 뭔가 최적화의 상태가 이상했다.
분탕들을 욕하지도 않고, 커뮤니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떡밥에 대한 불평을 내놓지도 않았다.
지극히 이성적인 투로 말을 이어나가는 그의 모습에 관리자들이 의문을 표했다.
완갈통:
[? 그건 또 뭔솔임]
[기분좋아서 탈주하겠다는 거?]
카스조아:
[ㅋㅋㅋ돆깨비냐 무슨]
[기분이 좋아서 기분이 좋지 않아서 기분이 적당해서]
주딱:
[?]
도트박이:
[주딱 왔네]
[저쉒 또 런한다고 난리치고 있음]
채팅방이 그렇게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술렁거리고 있자,
이내 관리자들의 우두머리인 주황색 완장 주딱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음표 한 개로 존재 여부를 알린 주딱은 이내 최적화에게 질문을 던졌다.
주딱:
[머임 갑자기]
[오늘 상태 멀쩡해 보이는데]
[먼 일 있음?]
그의 물음에 잠깐 말이 없던 최적화는,
이내 한 마디로 대답을 마쳤다.
최적화:
[저 취직함]
허나,
그가 적어 놓은 네 글자의 파급력은 무지막지했다.
하루 종일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던 관리자가 직장을 얻었다는 것은, 단 한 가지를 의미했다.
더 이상 커뮤니티 관리에 사용할 시간이 없으니, 관리자 직을 그만두겠다는 것이었다.
물론 취직을 한다고 해서 여가 시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을 커뮤니티 관리에 사용하며 피곤한 몸을 더 혹사시킨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고, 그것은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실상 지금 이 순간은,
누구보다 커뮤니티에 헌신한 베테랑 관리자의 은퇴 선언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카스조아:
[???????]
[실화냐]
도트박이:
[시1발 선생님 잠깐만요]
[아직 떠나보낼 준비가 안도ㅒㅆ는데]
완갈통:
[않이 에바임 진자루다가]
[님 가면 이미지윾동 누가 잡으라고ㅅㅂ]
그에 다른 관리자들은 대번 패닉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몇 개월 단위로 갈아치워지는 관리자직이기에,
정들었던 동료가 떠나간다는 아쉬움 따위는 없었다.
문제는 지금껏 그가 맡아 오던 막대한 양의 업무였다.
최적화는 지금껏 커뮤니티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분탕과 혐짤 도배, 싸움꾼 등 커뮤니티를 더럽히는 종자들을 빠르게 검거하여 박살내고 있었다.
24시간 돌아가는 CCTV 같은 존재인 최적화 덕에 다른 관리자들은 위키 사이트에서의 정보 수집, 게임사의 공지사항 공유나 대회 개최 알림 등 여러 가지 업무에 부담 없이 집중할 수 있었고,
실제로 최적화가 푸른 완장을 차고 있던 1년 동안 갤러리는 상당히 무탈하게 운영되어 왔다.
헌데 그런 그가 완장을 내려놓게 될 경우,
자연히 최적화의 빈 자리로 인해 생기는 공백을 누군가 감당해내야 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타 관리자들이었다.
최적화만큼은 아니지만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날벼락을 맞게 된 이들은 그의 탈주 소식에 당연히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가지 마라. 너 없으면 갤 망한다 등등 관리자들의 곡소리가 한동안 이어졌지만,
결국 그들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대가도 없이 1년 동안 쉬지 않고 대형 커뮤니티를 관리해 온 것만 해도 이미 대단한 업적이다.
이 짓거리를 그만두고 취직해서 사회로 뛰어들겠다는 사람을 자신들이 무슨 수로 막겠는가.
완갈통:
[저쉒 탈주하는걸 라이브로 볼줄이야]
[ㅂㅂ 수고했음]
카스조아:
[시잇팔 한동안 갤관리 개빡세겠네]
[바쁠때만 완장 잠깐 차면 안되냐 진자루다가]
도트박이:
[시즌 349번째 탈주선언은 못듣겠누ㅋㅋ]
[잘가라 완최몸]
관리자들은 나름 베테랑에 대한 경의를 담아 작별 인사를 건네주었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수장이 최적화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주딱:
[그래 뭐]
[님한테는 차마 가지 말라는 소리 못하겠음]
[지금껏 해온 걸 내가 봤으니까]
[1년동안 수고 많았으요]
[ㅂㅂ]
채팅방에서 퇴장되었습니다
주딱의 인사를 끝으로, 더 이상의 메시지가 갱신되지 않는 화면.
스마트폰으로 그것을 들여다보던 장완은, 이내 폰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주욱 켰다.
1년 동안 이어 오던 업무를 드디어 내려놓게 되니,
그는 무언가 홀가분하면서도 시원섭섭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이내 그러한 감정을 털어내고, 다시 커뮤니티를 둘러보며 완장으로서의 마지막 업무를 재개했다. 이 대가 없이 고통 받는 노동도 이젠 끝이라는 생각에 절로 의욕이 솟아오른다.
오늘 완장 스팀팩 빨았냐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빠른 일처리 속도를 발휘하며 커뮤니티의 교통정리를 진행하다 보니,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졌다.
00시에 근접해 오자, 1년 동안 겪어 왔던 수많은 일들이 뇌리를 스쳐지나가기 시작한다.
교묘하게 어그로를 끌어 이용자들의 의견을 갈라치려 들던 분탕들, 그리고 온갖 바리에이션이 존재하는 끔찍한 이미지
그 시점에서, 장완은 옆머리를 손바닥으로 빠악 때려 머릿속을 초기화시켰다.
그딴 흉측한 것들을 주마등으로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오니, 마침내 자정이 되어 날짜가 넘어갔다.
장완은 작업표시줄 구석의 시계를 확인하고 커뮤니티를 새로고침했다.
그러자, 관리자에게 제공되는 인터페이스들이 전부 사라지고 평범한 이용자로서 사용할 수 있는 기능들만 남아있게 되었다.
마침내, 관리자에서 이용자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다.
그에 픽 웃은 장완은 이내 글쓰기 버튼을 클릭했다.
그리고, 관리자였던 유저로서 마지막 인사를 남기기 시작했다.
어제 이리나가 던져 놓았던 공식 답변의 떡밥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시티 오브 루인 커뮤니티.
이쯤 되면 이제 근접 무기도 상향할 때가 되지 않았냐며 열띤 토론을 벌이던 그들은,
이내 새롭게 올라온 게시글 하나를 보게 되었다.
[ㅂㅂ]
누군가에게 인사를 할 때 쓰이는 두 글자로 이루어진 제목.
별다른 흥미를 끌지 못 하는 그 타이틀을 보고 무심히 지나치려던 이용자들은,
그 게시글을 작성한 이의 닉네임을 확인하고 멈칫하게 되었다.
최적화.
시티 오브 루인 커뮤니티 시루갤을 관리하는 이들 중 한 명의 닉네임이었다.
커뮤니티가 시끌벅적해지거나 분탕이 나타나서 게시판을 어지럽힐 때마다 모습을 드러내어 정리 작업에 들어가는 이였기에, 시루갤의 이용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관리자 닉네임이 바로 최적화였다.
헌데, 그 최적화가 어째서 이런 제목의 글을 올린 것인가. 로그아웃을 깜빡했나?
그러한 의문을 가지며 고개를 갸웃하던 이용자들은, 이내 눈을 부릅뜨게 되었다.
상대의 닉네임 옆에 붙어 있던 표식이, 더 이상 푸른색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네모난 딱지는 일반 이용자를 의미하듯 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이용자들은 황급히 마우스를 움직여 게시글을 클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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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ㅂㅂ]
오늘부로 탈주한다
1년 동안 존나게 뺑이쳐서 현타 왔는데
마침 컨택이 와서 일자리가 생겨버림ㅎ
당분간 분탕 혐짤 컷이 좀 늦어져도 이해해줘라
완장들도 사람이다
분탕쉒들 명단이랑 아이피 리스트 만들어놓은건 삭제 안할거니까 안심하고
오이늅 핵무새들은 내가 아카이브 따서 사장님한테 전달했으니까 대가리 터질 준비해라
잘 있어라 무급노예들아
나는 월급 받고 사장님 트랙 관리하러 간다
엌ㅋㅋㅋㅋㅋㅋㅋㅋ
[댓글]
= 어어 점마 왜 하얘지누
= 차기주딱 돌아와!!!!!!
= 와 이쉒이 탈주를 하네ㅋㅋㅋ
= 완갈통: 아니 시1발아 사장님 뭔데
ㄴ 어?
ㄴ 어?
ㄴ 사장님 트랙이 설마 그거임?
ㄴ 오이늅 아카이브 땄대니까 빼박이네ㅋㅋ
ㄴ 좃이늅한테 컨택받은 거였네ㅁㅊㅋㅋㅋㅋ
ㄴ ◇최적화: 사장님 닉에 좃 붙이지 마라
ㄴ 도트박이: ???? 취직한다는게 시1발 오이늅이냐
ㄴ 카스조아: 왜너만컨택받아왜너만컨택받아왜너만컨택받아
ㄴ ㅋㅋㅋㅋ파딱들 패닉온거 개웃기네
= ㅇㅇ: ?
ㄴ 주딱 노예 NTRㅋㅋㅋㅋ
ㄴ 니 파딱 쩔더라 아ㅋㅋ
ㄴ 루스끼 자본에 차기주딱 뺏기고 정신 놨누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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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하던 푸른 완장을 이리나가 매니저로 데려가 버렸다는 소식에,
안 그래도 이리나의 떡밥으로 시끌시끌하던 시티 오브 루인 커뮤니티는 아주 화끈하게 불타올라 버렸다.
하지만 그 불길을 진압할 베테랑은 더 이상 관리자가 아니었고,
자신들의 숙적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분탕들과 혐짤 도배충들은 이때다 싶어 날뛰기 시작했다.
그 참상을 지켜보던 관리자들은 최적화를 그리 쉽게 보내준 것을 후회했지만,
그는 이미 원흉의 손아귀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