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운월은 운청휘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도 모르고 멋대로 지껄였다.
“네 실력을 좀 보고 싶어서 이 몸이 직접 행차하셨다 이 말씀이야. 네가 운양청 형님과 대결을 할 자격이 있는지도 궁금하고, 미리 말해 두는데 나한테서 세 초식 이상 받아 내지 못하면 넌 운양청 형님과의 대결할 자격이 없어!”
운청휘는 그 순간에도 시간을 재고 있었다.
단이 완성되기까지 정말 찰나의 시간만을 남겨 놓고 있었는데, 이 멍청한 놈이 다 망쳐놓았다.
신식으로 단로 내부를 살피니 서른세 개의 취기단 중 열일곱 개가 폐단으로 변했다. 과반이 넘는 수였다.
그 순간, 운청휘에게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죽여주마!”
훙!
파죽지세로 뻗어나간 중권(重拳)이 공기마저 찢으며 바람을 일으켰다.
“흥!”
운월이 기다렸다는 듯 권으로 맞받아쳤다. 운청휘의 실력을 보러 왔으니 먼저 공격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쾅!
공기가 떨리며 한 층의 충격파가 일었다.
“끄아악!”
두 주먹이 부딪히는 순간, 운월의 팔에서 뼈가 깨지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그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갔다.
펑!
운월은 기혈이 뒤틀려 땅에 떨어지기 바쁘게 입에서 연신 피를 토해냈다.
“이…… 이게 뭐야. 운청휘! 무위가 성경 3단계로 내려갔다고 들었는데! 뭐, 뭐야! 오지 마!”
운월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성경 4단계인 자신의 무위만 믿고 운청휘를 도발했던 운월은 이제 겁에 질려 허우적대고 있었다.
“말할 필요도 없구나. 그만 죽어라!”
거인이 개미 한 마리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처럼, 지금의 운청휘는 운월과 같은 평범한 무인에게 살기를 품기 어려웠다.
그러나 거인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곱게 넘어갈 수는 없는 법.
운청휘는 싸늘한 얼굴로 운월을 내려다보았다.
“운청휘, 사…… 살려 다오! 내 이모부님이 누군지 알지 않느냐? 대장로님이다! 날 죽이면 이모부님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그래? 대장로도 오라고 하던지.”
콰직! 운청휘는 그대로 운월을 발로 밟았다. 가슴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휘 도련님……!
이제 겨우 일어난 운원림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다가왔다.
“휘 도련님. 운월 공자를…… 죽이신 겁니까?”
운청휘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이런 놈들은 살려 둘 수 없지. 임 노야(林爺爺), 하인을 시켜 시체를 대장로에게 보내게. 그리고…….”
운청휘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대장로에게 이 말도 전하도록. 시비를 걸려거든, 그럴듯한 놈으로 고르라고.”
“……예, 휘 도련님!”
노총관 운원림은 숨을 깊이 들이켰다. 3년 사이, 운청휘는 알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손속도 무자비해졌다.
운원림은 모를 터였다. 선제 시절의 운청휘가 다른 선제들처럼 비정한 학살자는 아니어도, 죽여야 할 자를 앞에 두고 망설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이건…….”
운청휘가 손가락을 튕기자 취기단 하나가 운원림의 수중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도련님……!”
짙게 풍겨오는 단약의 냄새에, 운원림은 감격에 차 무릎을 꿇고 몸을 숙였다.
취기단의 거래 가격은 무려 은자 천 냥이다.
운원림의 일 년 봉급이 이백 냥이 조금 넘는 걸 감안하면, 구경하기도 힘든 물건이었다.
“임 노야.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젊었을 때 몸을 크게 상해 무위가 성경 3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나?”
운청휘는 무심하게 던진 말이지만, 운원림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았다.
누구에게도 알린 적 없는 일이, 운청휘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임 노야의 충성심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은 부족하군. 임 노야가 하기에 따라 그 병을 치료해 줄 수도 있고 꿈에 그리던 실력을 가지게 해줄 수도 있네.”
운청휘가 말하는 부족함은 운원림의 허술한 호법이었다.
만약 운원림이 죽기를 각오하고 운월을 막았더라면, 취기단이 완성될 시간은 충분히 벌었을 것이다.
다만, 그런 각오를 품은 충심을 아무에게나 요구할 수는 없으니 운청휘도 그를 크게 탓하지 않았다.
“예, 휘 도련님!”
운원림은 운청휘의 말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격앙된 목소리로 답했다
“그만 물러가도록.”
선계의 선제로 군림하면서 하인을 부리는 법을 터득한 그에게 운원림의 이런 달라진 태도는 놀랍지 않았다.
운원림을 보내고 방으로 돌아온 운청휘는 망쳐 버린 취기단을 다시 단로에 넣었다. 취기단의 효능은 잃었지만, 방법을 바꾸어 다른 단약을 만들 생각이었다.
적독단.
이름 그대로 적색의 극독이다.
이 적독단 하나를 희석해 쓰는 것만으로도 최대 일만 명을 독살할 수 있었다.
때로는 상대를 독살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걸, 운청휘는 선제 시절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반 시진쯤 흘렀을까, 적독단의 정제가 끝났다.
언뜻 보기엔 극독이라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향기와 맑은 적색을 지닌 적독단이 완성되었다.
준비한 작은 병에 적독단을 넣어두고, 운청휘는 남은 열다섯 개의 취기단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만약 평범한 무인이 한 번에 이만한 양을 삼켰다면, 몸이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폭발해버렸을 터였다.
그러나 운청휘에게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기에, 이런 과감한 일이 가능했다.
운청휘가 방 중앙에 앉아 운기를 시작하자, 삼킨 취기단이 배 속에서 빠르게 분해되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영해(靈海)로 흘러 들어간 취기단의 기운은 이 각이 지나자 모두 흡수되었다.
그 결과, 운청휘의 무위는 성경 3단계에서 4단계로 회복되었다.
“……형님께서 오시는군!”
눈을 뜬 운청휘가 중얼거리자, 곧바로 그의 시야에 급히 달려오는 운현이 들어왔다.
“청휘야, 운월에게 손을 쓴 것이냐?”
운현의 얼굴에서 조급함이 묻어났다.
“너무 성급했구나. 운월이 우리 가문의 자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대장로의…….”
“형님, 그리 근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운현의 말을 자르며, 운청휘는 평온하게 대답했다.
“분별력이 있다면, 대장로는 그 일로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운청휘가 이토록 평온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가문에서 어떤 암투가 있든, 가문 내에서 해결해야 하는 것이 운씨 가문의 규칙이다.
다만 운월은 운씨 가문의 규칙에 간섭할 수 없었다.
그는 사실 대장로의 처가 쪽 친척으로, 본명은 진월이었다.
어릴 때 대장로가 그를 거두며 성을 운씨로 바꾸었지만, 운씨 가문의 진짜 자제가 아닌 셈이다.
운청휘와 운양청의 결투는 어디까지나 운씨 가문의 내부에서 일어날 일이다. 어느 쪽이 죽든, 운월과는 관계가 없다.
대장로의 친척이라 해도 무슨 권한으로 운씨 일가의 일에 참견한단 말인가.
운월은 주제넘게 나섰고, 행동에 걸맞은 최후를 맞이했을 뿐이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어.”
운청휘의 말뜻을 알아들은 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로가 미치지 않고서야, 진씨 가문의 운월을 위해 나서지는 않을 터였다.
“그보다 청휘야. 이제 대결까지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진정으로 운양청과 승부를 내려는 것이냐?”
운현의 얼굴에 다시 근심이 차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약속한 7일에서 벌써 3일이 흘러 버렸다.
“당연합니다. 후계자 자리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올라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운청휘가 눈에 살기를 띠며 말했다.
“혹시……, 나 때문이더냐?”
운현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물었다.
“예!”
운청휘가 형을 쳐다보자 운현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숙였다.
“청휘야, 그 일은…… 널 위해서라도 모르는 게 좋을 수 있어.”
운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에서 암담함과 지독한 복수심이 교차했다.
“그걸 알기에 먼저 후계자 자리를 차지한 다음 그 일에 대해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운청휘는 가문의 사람들을 반응을 보고 생각을 정리했다. 운현을 불구로 만든 자는 무위가 매우 높거나, 막강한 배경을 가졌거나 혹은 둘 다일 것이다.
운청휘가 후계자가 되어야만 운씨 일가의 힘을 움직일 수 있었다.
운한이 그렇게 못하는 것은 장로들의 견제가 있어서였지만 운청휘는 달랐다. 그의 수완으로 후계자 자리만 오르면 그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다.
물론 가문의 힘이 필요 없을 수도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운월의 시체가 대장로의 저택에 도착했다.
운월의 시체를 보고 대장로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고 미 부인은 통곡을 했다.
“운원림, 누가 운월을 죽였느냐?”
대장로가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운원림에게 물었다.
“대장로님께 아룁니다. 휘 도련님께서…….”
운원림은 대장로에게 그간의 일을 고했다. 운청휘가 단을 정제한다는 것은 빼고.
“대장로님. 그렇게 된 것입니다. 휘 도련님께서 장로님께 시비를 걸려거든 그럴듯한 놈으로 고르시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운원림은 그대로 몸을 돌려 물러났다.
대장로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운원림을 잡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통곡하던 미 부인이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운청휘 이 짐승만도 못한 놈! 이 빚은 네놈 목숨으로 받을 것이야!”
짝!
그러나 미 부인의 기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난데없이 대장로의 손이 미 부인의 뺨으로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쓸모없는 것! 네가 벌인 짓이더냐?”
별안간 따귀를 맞은 미 부인은 정신을 못 차리다 겨우 대답했다.
“다, 단지…… 운청휘가 아들과 대결한다기에…… 운월이에게 무위를 알아보라고…….”
“이…… 이런 멍청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대장로는 분풀이라도 하듯 다시 미 부인의 따귀를 때렸다.
“여봐라, 이 멍청한 년을 가두고 양청이가 돌아오기 전까진 누구도 풀어 주지 말거라!”
미 부인이 끌려가자, 대장로는 그제야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도 운씨 가문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다.
운월은 외부인이면서 집안싸움에 끼어들어 운씨 가문의 규칙을 깨트렸다.
운씨 가문의 일원인 대장로가 할 일이라곤, 운월의 시체를 살펴보는 것뿐이었다.
“상처는 두 곳. 하나는 팔뼈가 부서진 것이고 하나는 가슴이 내려앉았군.”
대장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그는 곧바로 운월의 사인을 알아차렸다.
일초 만에 팔뼈가 으스러지고, 저항도 못 해보고 가슴을 밟혀 죽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