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그는 고개를 돌려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뒷모습도 익숙한데……. 아, 운청휘로군! 돌아왔다고 들었지만,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귀공자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호위들을 보았다.
“가서 막아.”
“예!”
대답과 함께 뛰어나간 호위들이 운청휘의 앞길을 막아섰다.
“음?”
운청휘의 얼굴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하하하, 운청휘, 3년만인데 옛 친우와 회포 좀 풀어야지?”
귀공자가 큰소리로 웃으며 다가섰다.
“실종된 3년 동안 도적 소굴에 갇혀 있었다지? 쯧쯧. 천우성 제일 기재가 3년이나 아무것도 못 하다니. 무위까지 퇴보했으니, 이젠 제일 기재라는 말이 아깝군.”
귀공자가 비꼬듯 계속 지껄였다.
“게다가 돌아오자마자 한 일이 운씨세가의 소가주 자리를 뺏은 거라니. 주제도 모르고 운양청과 결투까지 약속한 걸 보면 이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다른 사람의 것을 뺏기 좋아하는 성정만큼은 변하지 않았구나?”
“주둥이를 함부로 놀리는 건 여전하군.”
귀공자를 알아본 운청휘의 말투에도 날이 서 있었다.
“볼일이 끝났으면 이만 가도록. 너를 상대할 기분이 아니다.”
화복을 입은 귀공자의 이름은 장용, 장씨무관의 소관주다.
3년 전 그도 사소연을 사모하는 남자들 중 하나였다. 마지막엔 결국 운청휘가 이겼지만.
“하하하!”
장용이 냉소를 흘렸다.
“운청휘. 아직도 내가 3년 전과 같다고 보는 건가? 지금의 너 따위는 내 상대가 못 돼. 아, 이걸 3년 전에 말해 줄 걸 그랬네. 사소연이 황성 엽씨세가와 혼약을 맺은 일, 기억하지? 사소연이 네놈과 만나고 있을 때 성사된 혼약이야. 사소연도 동의한 거라고! 이게 무슨 의미겠어? 네놈은 배신당했다는 거 아니겠어? 하하하!”
장용이 운청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웃어 댔다.
운청휘의 안광이 차갑게 식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로군.”
장용의 말대로, 사소연은 운청휘를 배신했다.
그녀가 몸을 던져서 죄책감을 없애려 한 것도, 자신 스스로가 운청휘를 배신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운청휘는 배신을 용납하지 않았다. 굳이 용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때문에 3년 전의 진실을 운청휘도 사소연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상관도 없는 장용이 저렇게 떠들어 대다니.
운청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살심이 동한 것이다. 눈으로도 보일 만큼의 살기가 피어올랐다.
“장용, 저자가……!”
주루에서 쫓아 나오던 사소연이 장용이 지껄이는 내용을 듣고 아미를 구겼다.
“이제 나와 운청휘는 정말 끝이야…….”
사소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실이 드러났으니, 운청휘와 떳떳이 마주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장용 이 죽일 놈의 새끼!”
사소연의 살기가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보다 운청휘의 출수(出手)가 빨랐다.
운청휘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바로 장용 앞에 나타났다.
훙!
섬뜩한 소리와 함께 운청휘의 중장(重掌)이 날아들었다.
“흥! 말했잖아! 지금의 너는 나한테 안 된다고. 먼저 들어와 준다면 고맙지!”
장용도 콧바람을 내뿜으며 일장으로 운청휘의 중장을 받았다.
두 손바닥이 부딪치며 장용을 뒤쪽으로 튕겨냈다.
쾅!
거리에 있던 노점상들이 장용의 몸에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났다.
“쿨럭…….”
장용이 기침을 하며 연신 피를 토해냈다. 온몸의 뼈가 조각난 것 같은 격통이 몰려왔다.
“소관주님!”
세 호위가 급히 뛰어가 장용을 일으켜 세우며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소관주님, 괜찮으십니까?”
“어떻게 이런……!”
장용은 고통도 잊은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저놈의 일장도 받아 내지 못했다고? 분명 무위가 성경 3단계로 퇴보했다고 했는데……!”
지금 운청휘의 무위가 성경 4단계였으니 장용이 놀라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지켜보던 사소연도 경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용과는 달리 그녀는 빠르게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렸다.
‘잡혀 있는 3년 동안 수련의 기회가 없다고 했지만, 꼭 퇴보했다고 볼 수는 없어. 아니면 성경 4단계까지만 하락했거나…….’
거짓으로 무위를 알린 것도 더 쉽게 운씨세가의 계승권을 가져오기 위해서일 것이라 사소연은 생각했다.
모두가 운청휘의 무위를 성경 3단계로 알고 있을 때 결투에서 4단계, 나아가 5단계의 실력을 보인다면 충분히 허를 찔러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사소연이 작게 중얼거렸다.
“3년 동안 심계도 늘었어. 그에 비해 인내심은 없는 것 같지만……. 이렇게 일장에 장용을 해치운다면 운씨세가에도 전해질 텐데. 운양청도 대비를 해야 할 거야.”
사소연이 몰랐던 건 운청휘는 실력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정오에 이미 성경 4단계인 운월을 죽여 시체를 대장로에게 보내버렸으니까.
“뭘 멍청하게 보고만 있어? 빨리 가서 저놈 죽여 버리지 않고!”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장용이 찢어질 듯 눈을 흘기며 소리치자, 장용의 세 호위가 협공을 펼쳤다.
“장용의 호위들 무위는 모두 성경 5단계인데, 도와줘야 하나?”
사소연이 중얼거리다 멈추고 머리를 저었다.
‘만약 운청휘의 무력이 그대로라면, 같은 단계라 해도 셋쯤은 거뜬할 거야. 퇴보했다고 해도, 밀리고 있을 때 도와줘도 늦지 않아. 그러면 마음의 빚 정도는 지울 수 있을 테지.’
사소연은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소연은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아차렸다.
“휘 도련님, 늦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별안간 주루에서 피 냄새를 물씬 풍기는 중년 남자가 날아왔다.
“괜찮습니다. 아주 사소한 일입니다.”
짙게 풍기는 피 냄새에 운청휘는 그를 알아보았다.
천수혈도 운몽. 성경 7단계에 이른 그는 운씨세가에서 파견되어 주루의 주인을 맡고 있었다.
“일개 장씨무관 따위가 감히 휘 도련님을 건드리다니? 죽고 싶은 모양이로구나!”
운몽이 허공을 뛰어넘어 운청휘 옆에 내려섰다.
마침 장용의 호위 셋도 협공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운몽이 광폭한 기세를 뿜으며 세 호위를 향해 달려들었다.
펑! 펑! 펑!
소리와 함께 호위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왼쪽 가슴에 육안으로도 보이는 선명한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심장이 터져 죽은 것이다.
“천수혈도 운, 운몽!”
장용은 운몽이 나타날 때부터 이미 두 눈에 공포가 가득했다.
운몽, 그는 운씨세가에서도 이름난 살수로 그의 손에 죽은 자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그러다 보니 세가 내에서도 다들 그를 두려워했다. 그가 세가를 나와 동승주루에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만, 운몽은 자신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다. 오직 운씨세가를 위해서만 손에 피를 묻혔다.
“휘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돌아오셨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운몽이 몸을 돌려 운청휘를 바라보며 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왼쪽 눈을 지나 턱까지 내려오는 섬뜩한 칼자국이 있었다.
그런 얼굴로 웃으니 더욱 해괴했다.
몸에서 풍겨 나오는 피 냄새까지 더해지니, 시산혈해(屍山血海)를 뚫고 나온 살신 같은 인상마저 주었다.
“괘념치 마십시오. 마땅히 제가 찾아뵈어야 했습니다.”
운청휘는 거리낌 없이 운몽을 대하는 한편, 후배의 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운몽을 진심으로 존중했다.
운몽의 얼굴에 난 흉터는 그가 운청휘의 아버지를 대신해 맞은 칼자국이었으니까.
운몽도 그럼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운청휘의 앞에서 늘 자신을 낮추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운청휘를 늘 아들처럼 여기고 있었다.
“아쉽게도 도련님의 부모님과 채하 아가씨가 실종되셔서…….”
운몽이 한숨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찾아낼 겁니다.”
그들이 천검종에 있다는 건 운청휘도 알고 있었다.
실력이 너무나 부족하기에 나설 수 없지만, 지금의 회복세라면 찾아 나서는 일도 머지않았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야겠습니다. 지금은 저 성가신 파리를 치우는 게 우선입니다.”
운청휘가 장용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운, 운청휘!”
장용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운청휘가 삼사 장 가까이 다가오자 등허리가 서늘해졌다.
살기, 그것은 살기였다.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넌 상대를 잘못 고르는 군.”
운청휘가 장용에게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휘 도련님, 멈춰 주십시오.”
운몽이 장용의 옆에 서서 운청휘를 제지했다.
“예?”
운청휘가 이상하다는 듯 운몽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운몽은 손속에 정을 두는 성정이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까 장용의 호위들을 그렇게 일장에 죽이지 않았을 것이니까.
“장용 같은 부류는 죽이나 살리나 도련님에게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살려서 이놈 목숨을 이용하여 장씨무관에 팔아 버리시지요.”
운몽이 몸을 돌려 운청휘를 바라봤다.
“도련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저씨의 말대로 하죠. 다만…… 지은 죄가 없던 것이 되진 않습니다.”
운청휘는 장용의 복부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펑!
배에서 뭔가 폭발하는 소리가 나더니 장용이 연신 피를 토해냈다.
“운청휘, 이…… 이 독한 놈, 내 영해를 폐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