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장용이 공포와 원망이 뒤섞인 눈으로 운청휘를 노려보았다.
그의 복부에서 폭발한 것은 내장이 아니라 무인들이 영력을 담아두는 공간인 영해였다.
영해가 파괴되면 지금까지 익힌 무공이 폐해지는 것은 물론 앞으로도 익힐 수가 없었다.
운청휘의 형 운현도 영해가 파괴되어 무공을 수련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독해? 도련님의 자비로 죽지 않은 것만으로 행운인 줄 알도록. 내일까지 장씨무관에서 은자 십만 냥을 준비하지 못하면 넌 죽은 목숨일 것이다!”
운몽이 흉신악살(兇神惡煞) 같은 얼굴로 냉소를 뱉었다.
“도련님, 장덕열 그자에겐 장용이 하나뿐인 아들입니다. 아마 어떻게든 구하려고 할 겁니다.”
장덕열은 장씨무관의 관주였다.
운몽이 말한 은자 십만 냥은 장씨무관이 내놓을 수 있는 최고 액수였다.
“그렇군요. 아저씨를 번거롭게 했습니다.”
운청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은자 십만 냥이라면 군영진(聚靈陣)의 재료를 살 수 있었다.
군영진은 이름 그대로 주변의 일정한 거리 내에 있는 영기를 한곳에 모으는 진법이다.
운청휘는 운씨세가로 돌아올 때부터 정원에 군영진을 배치할 생각이었다. 다만 재료들을 다 구하려면 은자가 오만 냥 이상 들기에 고심하던 중이었다.
운청휘의 허락이 떨어지자, 운몽은 장용을 가두고 장씨세가에 사람을 보내 돈을 가져오라고 전했다.
상황이 정리된 것을 본 운청휘는 운몽과 헤어져 세가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밥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운몽이 찾아왔다.
“도련님, 장덕열이 가져온 은자 십만 냥입니다.”
운몽이 품에서 전표를 꺼내 내려놓았다. 한 장에 은자 오천 냥짜리 전표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운청휘는 머리를 끄덕이며 전표를 받았다.
“아저씨. 이제 세가로 돌아와 저를 도와주십시오.”
운씨세가에서 운청휘가 완전히 믿고 있는 사람은 얼마 안 된다. 백부님과 형님, 그리고 눈앞에 있는 운몽이 전부였다.
노집사 운원림은 아직 완전히 믿기엔 어려웠다.
“도련님, 저도 그러고 싶은데 장로님들이 허락하지 않을 듯합니다.”
운몽이 낙담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운몽도 운씨세가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멀리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파인에게나 붙을 법한 별호는 둘째 치더라도, 그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주는 위압감이 상당했으니까.
“상관없습니다.”
오싹한 살기가 운청휘의 두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 세월 운몽은 운씨세가의 칼이었다.
세가의 온갖 더러운 일은 모두 운몽이 뒤에서 처리했었고 이렇게 악명을 떨친 것도 너무 많은 살인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인 사람들도 모두 운씨세가의 적이거나 적이 될 사람들이었다.
모순되게도 운씨세가의 자제들은 그런 그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그를 멀리했다.
“장로들이 높은 곳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봅니다. 죄다 본분을 잊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리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도련님, 지금 무슨 말씀을……!”
운몽이 화들짝 놀라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방금 그 말은 운청휘의 아버지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아니 될 말이었기에.
가주자리는 세습이었다. 그리고 네 장로의 자리도 세습이다.
보통 가주의 자리는 가주의 직계후인만 승계가 가능했고 장로의 자리도 그들의 직계만 승계할 수 있었다.
운청휘의 말은 이를 무시하고 세가의 규칙을 깨버리겠다는 말이었다.
“아저씨, 솔직하게 답해 주십시오. 세가에 불만이 있지 않습니까?”
운청휘가 운몽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운몽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내뱉었다.
그의 두 눈은 이미 쓸쓸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도련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지금까지 세가에 충성을 바쳤습니다. 공도 제법 세웠고요. 그런데 그동안 세가는 저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도련님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제는 불만을 넘어 증오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일에 대해서는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세가에서든 뒷일을 맡을 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세가뿐이겠는가, 나라도 마찬가지다. 안정된 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뒤에서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며 죽음을 각오로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운청휘는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몽은 그의 인생 선배인 동시에 그의 수하였다. 운청휘의 입장에서는 운몽의 말이 큰 위안이 되었다.
“아저씨. 간지러운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제가 보증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세가가 아저씨를 저버리는 일은 없습니다.”
운청휘가 정중히 말했다.
“도련님……!”
운몽의 흉측한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말을 들었으니 이제는 운씨세가를 위해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었다.
왜 이렇게까지 감정이 북받치는지 운몽은 모를 것이다. 운청휘가 한 말의 영향도 있지만, 자연스럽게 흘린 포식자의 기세에 감화되었다는 사실도.
운청휘가 선제가 된 후 얻은 진정한 포식자의 기세는 선계의 선인들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감염되어 운청휘에게 충성을 맹세하곤 했다. 평범한 인간인 운몽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아저씨, 제가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분부만 내리십쇼.”
운몽의 얼굴에 무엇이든 하겠다는 결심이 어렸다.
“이것들을 구해오십시오.”
군영진에 필요한 열아홉 가지의 재료들을 차례대로 말한 운청휘는 이윽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은자가 남는다면 전부 만다라화(曼陀羅花)와 금선은화(金線銀花)를 사는 데 쓰십시오. 최대한 많이 부탁합니다.”
***
운몽이 떠나고 운청휘는 방으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영기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어제 서른여 가지의 인급상품 무공을 수련한 덕분에, 기를 흡수하는 속도는 천성대륙에 돌아왔을 때보다 훨씬 빨라져 있었다.
다만 이렇게 빨라진 속도로도 사방으로 흩어진 영기를 끌어 모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무리 물을 빠르게 마신다고 해도, 한 잔의 물로 갈증이 해소되지 않으면 다시 따라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그러나 물을 따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잔을 항아리로 바꾸면 더 많은 물을 담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항아리도 버리고, 아예 우물에 뛰어들어 마신다면 어떨까?
이와 같은 생각 끝에 운청휘는 군영진을 떠올렸다.
주변 수백 리에서 오천 리 내의 영기를 끌어 모을 수 있는 군영진을 활용한다면, 한 번에 충분한 양의 기를 흡수할 수 있다.
운몽에게 따로 부탁한 만다라화와 금선은화로는 약탕(藥湯)을 만들 생각이었다.
꽃잎 하나로 열 명의 성인도 독살할 수 있다는 만다라화와 금선은화.
워낙 독으로 유명하기에 두 꽃을 분말로 만들어 섞으면 약탕의 재료가 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연단사만이 정제가 가능한 연단과 달리, 약탕은 방법만 제대로 알면 누구나 제조가 가능하다.
운몽은 일처리가 빨랐다. 정오가 되었을 때, 그는 운청휘가 부탁한 모든 재료를 구해 돌아왔다.
“도련님, 여기 구입 목록입니다. 한번 보시지요.”
운몽이 목록이 적힌 종이를 내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저씨를 믿습니다.”
운청휘의 손바닥에서 단화(丹火)가 일더니 이내 종잇장을 삼켜 재로 만들어 버렸다.
운몽이 감격스럽다는 듯 미소 지었다.
은자 십만 냥에 해당하는 물건을 운청휘는 보지도 않고 그대로 태워 버렸다.
이는 운청휘가 그를 진심으로 신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운몽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의 안력으로 운청휘의 손바닥에서 응집된 것이 단화(丹火)라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는 곧 운청휘가 연단사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저한테 만다라화와 금선은화를 구해오라고 하셨군요…….”
두 꽃 모두 극독을 가지고 있어, 보통의 무인들은 쓰지 않는다. 하지만 연단사라면 다르다.
다만 군영진의 재료는 운몽이 보기에는 어디에 쓰려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운몽뿐만 아니라 천우성의 누구도 모를 터였다. 진법대사는 연단사보다 더 보기 드문 직업이니까.
“지금부터 정제를 해야 하니 밖에서 제 호법을 서 주십시오.”
“예, 도련님.”
명을 받는 운몽의 눈에서 흥분이 스쳤다. 운청휘의 말을 듣고, 운몽은 그가 연단사라 생각했다.
군영진에 필요한 재료는 성황기(星黃旗), 반용준(盤龍箋), 도목부(桃木符), 야명옥(夜明玉) 등으로, 모두 제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중에서도 진법의 눈으로 쓰일 성황기(星黃旗)는 운청휘의 피가 한 방울 필요했다.
반용준(盤龍箋)으로 시작한 제련은 한 시진 반이 지나서야 성황기(星黃旗)에 도달했다.
운청휘가 손바닥을 펼치자 흰색의 화염이 타올랐다.
활활활.
화염이 타오르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또르륵 소리와 함께 한 방울의 피가 운청휘의 손에서 빠져나와 성황기로 떨어졌다.
단화(丹火)로 태우자 피가 성황기에 스며들며 점차 하나가 되어갔다.
이 과정을 거치면 성황기는 운청휘의 신식과 연결된다. 운청휘가 원하면 언제든지 신식을 이용해 성황기의 간단한 동작 정도는 가능했다.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운몽은 미동도 없이 굳건하게 운청휘의 방문 앞을 지켰다.
신식으로 정원 전체를 뒤덮은 후 진법의 위치를 전부 확인하고, 준비한 재료를 챙긴 운청휘가 밖으로 나왔다.
영후백변신법을 펼쳐 기억해 둔 위치에 알맞은 재료를 넣자 이 각 후에 작은 군영진이 완성되었다.
군영진을 작동시키자, 사방 사백 리 안의 영기가 정원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정원 안의 영기가 배로 늘어났다.
운청휘는 양 팔을 벌리고 지붕 위에 섰다. 갑자기 넘쳐나는 영기가 그에게로 빨려 들어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운몽은 정원 안의 영기가 늘어나는 것은 알았지만, 배로 늘어나기까지 하자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 상황이 운청휘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운몽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형편없군. 사백 리의 영기를 모았는데 고작 두 배에 그쳤구나.”
운청휘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며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
“사, 사백 리……?!”
운몽은 그 말에 놀라움을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떴다.
‘이 영기들이 죄다 사백 리 밖에서 끌어온 것이라고?’
“도련님. 이것이 어찌 된 일인지요……?”
운몽이 침음을 삼키며 물었다.
“알려드리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정원에 군영진을 배치했을 뿐입니다.”
운청휘가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히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