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선제귀환-15화 (15/430)

제15화

“온전한 너는 내 비장의 한 수였는데……. 검집만 남았어도 내 비장의 한 수는 너로구나.”

살기가 더욱더 짙어졌다. 그러나 운청휘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참천신검은 마지막 패였다.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꺼내들지도 않았다.

“빚을 받을 때도 된 것 같고.”

운청휘는 참천신검을 쥐지 않았다. 그리고 얼굴을 돌려 동쪽을 바라보았다.

“응? 노부를 발견한 것인가?”

동쪽으로 백여 장쯤 떨어진 곳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백발의 노인이 놀라 중얼거렸다.

“태상장로님, 청휘가 네 장로의 협공을 받고 있습니다. 더 지체하시면…….”

운한이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말했지만 끝을 맺지 못하고 말허리가 잘렸다.

“걱정하지 마시게, 노부가 있는 한 청휘가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네, 다만…….”

태상장로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가 보기엔, 청휘는 아직 실력을 감추고 있단 말이지…….”

***

“운청휘가 부상을 입었네! 이 기회를 잡아야 해!”

운청휘에게 압도당하는 동안 대장로의 마음에는 울분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러니 운청휘가 부상을 입은 지금이 울분을 털어낼 기회였다.

선두에 선 대장로가 운청휘에게 달려들자, 그 뒤를 세 장로가 살수를 펼치며 뒤따랐다.

“나설 생각이 없나 보군.”

태상장로는 움직일 낌새가 없었다. 운청휘는 살기를 더욱더 짙게 흩뿌리며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여기에 시체 더미를 만들어도, 날 탓할 수 없겠지.”

별안간 운청휘의 몸에서 핏빛 기운이 일렁이며 잔상만이 남았다. 이윽고, 운청휘는 순식간에 대장로의 앞에 도달하였다.

“이럴 수가…….”

멀리서 지켜만 보던 태상장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운청휘의 속도가 배는 빨라져 있었다.

“이런! 아무래도 무위를 일시적으로 높이는 금약을 먹은 모양이군!”

태상장로는 운청휘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금약이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어떤 종류든, 무위를 일시적으로 높이는 약은 신체에 돌이킬 수 없는 후유증을 남긴다.

쾅!

굉음과 함께, 허공에서 운청휘와 대장로의 중권이 맞부딪쳤다.

“쿨럭……!”

또다시 피를 한 움큼 내뱉은 대장로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세 장로의 살초가 운청휘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다 죽여 주마!”

대장로의 몸이 땅에 닿기도 전에, 운청휘의 발이 그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콰직!’하는 소리와 함께 대장로의 가슴이 움푹 파였다. 운청휘는 그 반동을 이용해 삼 장이나 뛰어오르며 세 장로의 살초(殺招)를 가볍게 피해냈다.

동시에 한 손으로는 권법을 펼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장법을 위아래로 뿜어내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훙! 쾅!

권법과 장법의 연계 공격이 이 장로와 사 장로의 머리에 직격했다. 다음 순간, 수박이 으깨지는 듯한 섬뜩한 소리와 함께 뇌수가 공중으로 흩뿌려졌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삼 장로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영해에 운청휘의 일권이 내리꽂히고 있었다.

쿵!

맹렬한 기운이 영해를 압도했다. 곧이어, 영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비비에게 감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목숨은 거두지 않을 테니, 당장 꺼지도록!”

매서운 목소리로 말하며, 운청휘가 삼 장로를 땅에 처박았다.

“내, 내 영해가……!”

땅에 처박힌 삼 장로는 고통도 잊은 채 영해가 있던 자리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의 무위가 사라진 것이다.

네 장로를 따라왔던 수뇌부들은 그저 멍하니 운청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목격한 잔혹한 광경에, 그들은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운씨세가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던 네 장로 중 셋이 죽었다. 그중 둘은 머리가 터져 처참한 꼴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삼 장로는 목숨을 건졌지만 영해가 흩어져 무위를 완전히 잃었다.

“이쪽으로 온다!”

“도망쳐! 네 장로가 협공해서도 못 이겼는데, 우리라고 당해낼 수 있을까!”

운청휘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향하자, 수뇌부들은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운청휘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저들은 모두 네 장로의 사람들이다. 머리를 제거했으니, 손발도 쳐야 마땅하지 않은가.

운청휘는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펑펑펑!

십여 명의 수뇌부가 운청휘의 장법을 피하지 못했다. 모두 일장에 절명했고, 가장 멀리 도망친 자도 이십 보를 채 내딛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죽었구나. 다 죽었어…….”

급히 달려왔지만, 아무것도 막을 수 없던 태상장로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네 장로 중 셋이 죽고, 하나는 무공이 없구나. 다른 이들도 세가의 핵심 전력이었거늘…… 전부 죽어 버리다니.”

태상장로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들이 없다면, 세가는 이대로 몰락할지도 몰랐다.

“운휘야……!”

운현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지만, 기겁하긴 마찬가지였다. 운청휘의 무위에 놀라고, 나이에 맞지 않은 잔혹함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세가에 독이 되었으면 되었지, 이로울 것 없는 자들입니다. 살려 두면 어디에 쓰겠습니까?”

운청휘는 냉랭하게 말하며 태상장로를 돌아보았다.

“어디에 쓰느냐고? ……하하하! 알고는 하는 말이냐? 세가가 제대로 움직이려면 이들이 있어야 한단 말이다! 네 녀석 혼자 운씨세가 전체를 책임질 수 있단 말이냐?”

태상장로는 분노가 극에 달하다 못해, 조소를 흘렸다.

“못할 게 어디 있겠습니까.”

운청휘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태상 장로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그 순간, 운청휘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에 태상장로는 하마터면 그의 말을 믿을 뻔했다.

“빚 같은 것에 연연하진 않습니다만, 태상장로님의 빚은 참으로 하찮군요.”

덤덤히 말을 마친 운청휘가 몸을 돌려 걸어 나갔다.

그의 말에 태상장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도 무인으로서 수치를 아는 인간이다.

태상장로는 변명하듯 운청휘의 등을 향해 소리쳤다.

“나는…… 나는, 네 녀석이 감춰 둔 패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확인하면 나서려고 한 것이야! 하지만 금약을 쓸 줄은 몰랐다!”

“감춰 둔 패? 정말 비장의 한 수를 썼다면, 태상장로라도 무사할 수 없을 겁니다!”

운청휘가 내지른 고함이 멀리서 들려왔다.

주제에 맞지 않은 보물은 오히려 독이 된다고 했던가. 전성기의 억만 분의 일도 되지 않는 지금의 실력으로는, 참천신검을 노출시켜 봤자 위험에 빠질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검집을 알아차렸다면, 가족을 제외하고 모두 죽여 입을 막을 작정이었다.

가족이라고 해도, 어떻게든 그 기억에 손을 쓰려 했겠지만.

태상장로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금약에 대해서, 운청휘는 설명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명색이 태상장로라는 자가, 고작 그 정도 안목이란 말인가?

운청휘는 어떤 약도 먹지 않았다. 그저, 선제의 정혈(精血)을 한 방울 태웠을 뿐이다.

“잠깐! 멈추거라!”

거침없이 걸어나가던 운청휘의 앞을 뒤따라온 태상장로가 막아섰다.

“뭡니까?”

운청휘는 짜증스러움을 숨기지 않고 아미를 구겼다.

“네 장로의 심복들과 가족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러나 그는 운청휘가 입을 열기도 전에 다시 말을 이었다.

“잡초를 자를 때 뿌리를 남겨 두면 또다시 자라는 법. 칼을 뽑았으니, 전부 죽이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느냐…….”

운청휘의 얼굴에서 짜증이 조금 옅어졌다.

‘이 늙은이. 우유부단한 줄만 알았더니 아니었군. 장로들의 심복이나 가족은 오히려 세가의 걸림돌이 될 터. 걸림돌은 치워야 하는 법이지.’

운청휘가 태상 장로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운몽 아저씨에게 처리를 맡길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태상장로님께서 언급하셨으니, 직접 맡아 주십시오.”

뒤에서 따라오던 운몽이 그 말에 깜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운청휘가 태상 장로에게 명령하고 있었기에.

그러나 더 놀랄 일은 뒤에 있었다.

태상 장로는 노하기는커녕 되려 기뻐하며 운청휘에게 말했다.

“알겠다. 노부가 나서마. 다만 삼 장로 일가는…….”

운청휘는 태상 장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그들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나머지는 태상장로님 뜻대로 하십시오.”

운청휘가 삼 장로에게 다소 너그러운 것은 그의 딸, 운비비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뒤를 따라다니며 오라버니, 오라버니라고 부르던 운비비.

그녀의 한마디가 삼 장로와 일가를 구한 셈이다.

어차피 무공도 폐했으니, 살려놔도 힘을 쓸 수 없을 것이다.

처소로 돌아온 운청휘는 운몽을 시켜 약탕을 준비했다.

방금의 전투로 선제의 정혈을 소모한 데다가, 가볍지 않은 부상도 입었다.

약탕의 힘을 빌려야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다.

“당장 임씨세가로 사람을 보내십시오. 임비화의 도전을 받아들인다고 전하면 됩니다. 날짜는 사흘 뒤, 목을 내놓을 각오를 하라 전하십시오.”

약탕 안에서 운청휘가 살기를 흘리며 말했다.

“네. 당장 그리하겠습니다.”

운몽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밖으로 나갔다.

운청휘는 약탕 안에서도 운기를 통해 상처를 치료했다. 사방이 어두워질 무렵에서야, 절반이 조금 넘는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다.

“임비화가 영약원을 언급하며 결투를 신청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군.”

운청휘는 감았던 두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내일 영약원에 가보면 알게 될 터. 마침 영약도 필요하니…….”

상념을 접으며, 운청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미 운청휘는 임씨세가를 이 땅에서 지워 버릴 작정이었다.

다만 결투를 3일 뒤로 미룬 것은 그동안 영약원을 살펴볼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임비화가 굳이 영약원을 짚어 결투를 신청했으니, 분명 영약원에 모종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