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싸움.
일인일수(壹人壹獸)는 공간의 통로에서 밖으로, 다시 안으로 드나들길 반복하며 치열하게 맞붙었다. 그 여파로 괴멸된 성신(星辰)의 수가 일만에 달했다.
결과는 양패구상(兩敗俱傷).
운청휘는 일신의 무위를 소진하고, 참천신검과 아공간 반지도 잃어버렸다.
혼돈 영수의 상황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무위를 소진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전성기의 혼돈 영수는 몸집이 큰 산 하나와 비슷했다.
게다가 손짓 한 번에 구름과 비를 부르고 재채기 한 번으로 폭풍을 일으키는 위력을 발휘한다.
본모습으로 돌아간 혼돈 영수는 그대로 공간의 통로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대로 통로 어딘가로 가버린 줄 알았는데, 운청휘와 함께 천성대륙으로 넘어온 것이라니…….
지금의 모습을 보니 회복 속도도 운청휘를 앞서고 있는 듯했다.
격돌을 통해 녀석의 무위가 자신보다 높은 성경 6단계라는 것도 알아낸 운청휘다.
상대가 혼돈 영수만 아니었다면 어느 경지든 맞섰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필경 녀석은 자신과 같은 경지의 존재였다. 속도도 전투력도 결코 운청휘의 아래가 아니었다.
자연히 전투의 양상은 한쪽으로 기울 터였다.
무엇보다 혼돈 영수도 정혈을 태워 순간이나마 실력을 끌어올릴 수 있었다. 운청휘가 선제의 정혈을 쓰듯이, 혼돈 영수도 혼돈의 정혈을 쓸 수 있다.
“진정 본제(本帝)를 죽이기로 결심을 굳힌 게로구나.”
운청휘는 한숨을 삼키며 가라앉은 눈빛으로 혼돈 영수를 바라보았다.
혼돈 영수는 원망이 맺힌 눈으로 앞발을 들어 목을 긋는 동작을 했다.
“웨오오오오옹!”
“후후, 그래, 본제를 흡수한다면 적어도 선천생령까지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자질도 배로 늘어날 터. 다만…….”
운청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본제가 목숨을 지킬 비장의 수조차 없을 것 같으냐?”
***
웅웅웅!
운청휘의 등 뒤에서 참천신검의 검집이 진동을 하며 울음을 토했다.
“이번에는 네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구나!”
운청휘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집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빈 검집이건만, 주위를 압도하는 기세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야옹!”
검집을 알아본 혼돈 영수가 겁에 질린 듯 으르렁거렸지만, 곧 검집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다시 공격할 준비를 했다.
“야옹!”
혼돈 영수의 신형이 번개같이 움직이며 눈 깜짝할 사이에 운청휘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참천!”
운청휘가 손을 뻗자 허공에 떠 있던 검집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지는 검격!
우우우웅.
소름 끼치는 통곡성과 함께 붉은 기류가 검집을 타고 일렁였다.
그 순간, 지진이라도 난 듯 지면이 갈라지고 허공에 불꽃이 튀었다.
“야옹……!”
검집에서 쏟아지는 기운에, 혼돈 영수는 다시 공포에 사로잡혔다. 피하려고 했지만, 검집에서 쏟아지는 기운이 한발 빨랐다.
퍼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붉은 기운이 대지를 가르고 지나갔다.
땅이 파이며 반경 삼십여 장에 이르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겨났다.
그 가운데, 피투성이가 된 혼돈 영수가 널브러져 있었다.
가까스로 숨만 붙어 있는 혼돈 영수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저 검집을 휘둘렀을 뿐인데, 이런 패도적인 힘이라니.
운청휘의 상황도 좋지는 않았다. 검집을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영력이 다 소진된 듯했다.
운청휘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도, 살았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음? 아직도 숨이 붙어 있는 건가?”
녀석의 생사를 확인하던 운청휘가 중얼거렸다.
“고금을 막론하고 혼돈 영수를 노예로 부렸다는 말은 없었다. ……그렇다면, 본제가 그 선례를 만들어 주마!”
운청휘는 남은 영력을 끌어모아 재빠르게 혼돈 영수에게 날아갔다. 날렵하게 만든 수인(手印)이 혼돈 영수의 등에 찍혔다.
텅!
그러나, 보이지 않는 기운이 운청휘의 수인을 튕겨냈다.
“뭐지? 어째서 계약이 되지 않는단 말인가?”
의외였다. 선계에서도 수많은 영물을 노예로 부렸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설마 녀석의 출생 신분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혼돈 영수는 혼돈에서 태어난 태초의 생명으로, 동시에 우주에서 가장 존귀한 종족 중 하나였다.
선계의 선제조차 노예로 부릴 수 없는 종족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용족이었다.
갓 태어난 용족도 마찬가지로, 이들의 존귀함은 타고난 것이자 영혼에서 나오며, 모든 생령을 아우르기 때문이다. 혼돈 영수 또한 용족 못지않은 존귀함을 지녔기에 운청휘가 노예로 부릴 수 없을 터였다.
운청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혈통만 놓고 보자면 혼돈 영수가 용족보다 월등하다. 만약 다른 선제들이라면, 이 녀석에게 그것을 썼을 것인가?’
운청휘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그는 결정을 내렸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들이라면 그렇게 했을 터!”
선제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하나 있다.
선제들은 하나의 제노(帝奴)를 둘 권한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선제만이 거둘 수 있는 종이었다.
상대가 인간이든, 요괴이든, 용족이든 제한이 없었다.
이 제노는 선제에게 충성해야 하며, 모든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설령 그것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일이라 해도.
더욱이 제노는 선제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부상을 대신 입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대신 죽을 수도 있었다.
치명상을 입었을 때나, 천수가 다했을 때 제노에게 부상을 옮기거나 수명을 뺏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제노는 하나만 거둘 수 있었기에, 운청휘를 포함한 아홉 선제는 아직 제노를 만들지 않았다.
두 번째 목숨이나 다름없는 제노를 거둘 땐 신중해야 하기에.
유일하게 제노를 거둔 허원선제는 십대 선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로, 소문에 의하면 선고시대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때부터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천수를 다했을 때 제노를 대신 죽였기 때문이다.
“혼돈의 시기에 태어난 혼돈 영수, 이놈이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왔는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확실히 본제보다 수명일 길 터. 더구나 온전한 혼돈 영수의 힘은 절대 본제의 아래가 아니니, 이놈을 제노로 거둔다면 선제를 노예로 부리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운청휘는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일각이 지나자 정교한 수인이 완성되었다.
운청휘는 망설임 없이 수인을 혼돈 영수의 이마에 찍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무형의 기운이 생겨나, 운청휘와 혼돈 영수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운청휘와 혼돈 영수의 영혼이 연결되는 순간이며, 운청휘가 생각만으로 혼돈 영수의 생사를 완벽히 장악한 순간이었다.
“소가주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호위복을 입은 진무가 구덩이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좀 전의 격돌에 놀라 달려온 것이다.
“이, 이자는 운호 원주가 아닙니까?”
진무는 운호의 시체를 발견하고 기함했다.
“내가 죽였다.”
운청휘는 머리를 들어 진무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보탰다.
“이자는 세가를 배신하고 임씨세가와 내통하였지. 그보다, 진무. 가지고 있는 단약이 있는가?”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 평범한 것들이라…….”
진무는 황급히 약병을 꺼내며 몸을 날려 구덩이 밑으로 뛰어내렸다.
운청휘는 약병을 열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지금부터 내 호법을 서도록.”
진무에게 호령한 운청휘는 가부좌를 틀고 운기를 시작했다.
상처가 깊어 몸 상태가 온전치 못했다. 단약을 전부 흡수하는 데 한 시진을 꼬박 쓰고 나자, 그래도 운청휘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혈색이 돌아왔다.
“진무. 운씨세가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은가?”
운기를 마친 운청휘는 머리를 들어 진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
그 말을 들은 진무가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리해 주신다면, 소가주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진정한 운씨세가의 일원이 되려면, 운씨 성을 받아야 한다. 운씨세가의 추종자들에게 그보다 더한 명예가 있을까?
“지금부터 이 영약원은 자네…… 운무가 책임자다.”
그만 일어나라는 듯, 운청휘가 손을 내저었다.
그가 사람을 부리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공로를 세우면 상을 내리고,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내린다.
방금은 운무가 급한 상황에서 나타나 단약으로 운청휘를 도왔으니, 상을 내리는 게 맞다.
배신이나 하는 운호 같은 자들보다는 운무가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운무는 책임질 일이 늘어나겠지만, 영약원의 원주가 되었으니 꿈에 그리던 직위 상승을 이룬 셈이다.
이렇게 보면 운청휘가 수하를 다루는 솜씨가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운청휘에게는 적은 대가를 치르고, 수하에게는 가장 필요한 상을 주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운씨세가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
운청휘는 시선을 돌려 혼돈 영수를 내려다보았다.
“일어나라. 언제까지 죽은 척하고 있을 것이냐?”
그러면서 혼돈 영수를 발로 건들이자, 녀석이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 댔다.
“야옹!”
혼돈 영수는 운청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예전과는 달리 녀석의 눈에 맺힌 것은 원한이 아닌 공포였다.
생사가 운청휘의 손에 달렸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억울하더냐? 그래도 참아라. 본제의 제노가 된 것이, 네 일생에서 가장 큰 기연이라는 것을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운청휘는 잠시 침묵했다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본제는 그렇게 너그럽지 않아. 한 번만 더 그런 눈으로 본다면, 그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