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선제인 운청휘는 아쉬울 게 없었다. 원한다면 어떤 여자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
인간계의 황제조차 삼천 후궁을 거느리고 있는데, 선제인 운청휘가 원한다면 삼천이 아니라 삼백만, 삼천만의 후궁을 거느릴 수도 있었다.
같은 선제인 지요여제마저 운청휘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달리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자신을 배신한 사소연에게 운청휘가 손을 내밀 리 만무했다.
만약 사소연이 선계에서 운청휘를 만났더라면, 골백번은 더 죽었을지도 모른다.
한 세계의 패권을 쥔 운청휘에게 배신자의 말로는 늘 죽음뿐이었으니까.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운청휘, 네가 한 말 꼭 기억해 둬! 이 사소연을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꼭 알려 줄게!”
사소연은 마지막 발악을 해댔다.
“정말로 죽고 싶은 건가? 당장 나가도록!”
운청휘의 축객령이 떨어졌다.
“보복 같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거라. 그때는 너와 세가 모두 세상에서 지워 주마.”
“하하. 걱정 마. 보복하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을 거니까.”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죽은 사람 보듯 운청휘를 바라봤다.
“한 달 뒤 임위가 천원학원에서 돌아올 거야. 너는 몰랐겠지만 석 달 전 이미 월경 1단계라고 했어. 뿐만 아니라 황성의 대세가인 상관세가의 눈에 들어 혼약도 맺었고.”
엽씨세가와 마찬가지로, 상관세가는 황성의 사대 세가에 속했다. 사대 세가가 황성에 미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었기에, 황실에서도 그들을 예우했다.
“너희 둘의 원한만으로도 임위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난 똑똑히 기억해. 3년 전, 네가 임위를 이긴 건 단순한 격파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무너뜨린 거였어. 임위의 성격이라면, 돌아오자마자 널 찾아내 설욕하려고 하겠지. 네 상대가 못 된다고 해도, 천원학원이나 상관세가가 돕지 않겠어? 그들이 운씨세가를 지우는 건 일도 아니야. 알겠어? 너나 네 세가도 여기까지라고! ……널 찾아온 건 이 난관을 헤쳐갈 수 있는 도움까지 주려고 했던 것도 있었어. 그런데 넌 나까지 모욕해? 좋아. 한 달 뒤,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직접 와서 확인할게. 호호호!”
사소연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떠났다.
“실망하겠군!”
사소연이 떠나서야 운청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본제는 인간일 때도 선제의 추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런데, 임위, 상관세가, 천원학원 따위가? 우습지도 않구나!”
허풍이 아니었다. 비록 전성기의 무위는 아니라지만, 지금으로서도 충분히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할 정도는 되었다.
운청휘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선제의 정혈, 참천신검의 검집, 다양한 진법이 있었다.
그중 십방인뇌진법은 삽시간에 도시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흉진(凶陣)으로, 대가가 크기에 최후의 수단으로 보류해 두었다.
“보아하니 그곳에 다녀올 때가 되었군…….”
운청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계획대로라면 무위가 월경으로 들어서기 전에는 그곳에 발을 들이지 않기로 했었다. 너무도 위험했기에.
“그전에 무언가 조치를 취해야겠어.”
***
초저녁 무렵.
운청휘는 백부 운한, 사촌 형 운현, 천수혈도 운몽, 태상장로 그리고 다른 수뇌부들을 전부 소집했다.
사람들이 모두 모이자 운청휘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갔다.
“저는 한동안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동안 여러분은 백부님을 중심으로 세가를 이끌어주십시오. 만약 백부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 그때 제가 어찌해도 탓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백부님, 지금은 성경 8단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성경 9단계에 오르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 무슨…….”
운한이 격동된 눈으로 몸을 떨었다.
“형님은 영해가 복구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반드시 매일 약욕(藥浴)을 하십시오. 또한 그 일은…… 돌아오면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알았다, 청휘야!”
운청휘가 말하는 그 일은 운현의 복수를 뜻했다. 말뜻을 알아챈 운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믿을 수 있는 가족이 주는 안정감을 느낀 것이다.
“태상장로님, 제가 없는 동안 세가의 안전은 태상장로님께 맡기겠습니다.”
“맡겨두거라!”
태상장로가 걱정 말라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몽 아저씨, 약탕의 제조 방법을 잊지 마십시오. 이제부터는 혼자 만들어야 합니다. 여기에 있는 모두의 몫까지 만들어 주십시오.”
“예, 도련님!”
“저희까지 약욕을 시켜 주시다니……!”
운청휘의 말에 수뇌부들의 눈에 감동의 빛이 스쳤다.
모든 안배를 끝마친 운청휘는 운한의 무위를 올리기에 열중했다.
운한의 무위가 성경 9단계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백부님, 이제 막 성경 9단계로 올라서셔서 실력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부터 한 달간 약욕 외에도 상대를 찾아 대련을 하시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운청휘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태상장로님께서 성경 9단계의 수준으로 백부님을 상대해 주십시오.”
“청휘야. 이번에 나가면 한 달이나 걸리는 것이냐?”
운한이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예.”
운청휘는 머리를 끄덕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온다고 해도 세가에 잠시만 머물 생각입니다. 세가의 걸림돌만 해결하면, 부모님과 채하를 찾아 떠나려 합니다.”
천성대륙에 돌아온 후로도, 운청휘는 한순간도 가족들을 잊지 못했다.
애초에 갖은 고난을 감수하고 선계를 떠난 이유도 부모님과 채하를 보기 위해서였다.
삼천 년. 가족과 헤어져 선계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삼천 년의 긴 세월도,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막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는 그리움이었다.
살아만 있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만날 수 있다.
그 생각이 운청휘를 버티게 해 주었다.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운청휘 못지않게 그를 그리워한 가족들은 사정이 다를 터였다.
그들은 운청휘가 살아 있는 줄 모른다. 그러니 자식을 그리는 부모의 마음이 오죽할까.
걱정이 슬픔이 되고, 슬픔이 절망이 되어가며 결국엔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 남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라도, 운청휘는 서두를 수밖에 없다.
간절히 만나고 싶기도 했지만, 가족들이 겪고 있을 오해와 고통을 하루빨리 풀어 주고 싶었다.
그 전에, 운현의 복수를 먼저 해야겠지만.
정혼자에게 배신당하고, 영해를 잃은 것도 모자라 팔이 잘렸다. 하나같이 피눈물이 날 법도 한데, 운현은 이 모든 일을 한 번에 당했다.
백 배, 천배로 돌려줘도 모자랄 원한이다.
다만 임위의 무위가 석 달 전에 월경 1단계에 올라선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후로도 수련에 정진했다면, 월경 2단계는 아니더라도 뭔가 수를 마련했을 터였다.
임비화가 폭혈단을 써서 순간적으로 무위를 올린 것처럼, 임위라고 비장의 수를 생각하지 못할까.
어쩌면 왕급중품이나 왕급상품의 법보를 준비할 수도 있었다.
사소연의 말대로라면 임위는 이미 상관세가의 사위다. 상관세가의 재력으로 왕급중품이나 상품의 법보는 어렵지 않게 구할 테니, 임위가 빈손으로 오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임위를 죽인 후의 일도 생각해야 한다.
제자를 잃은 천원학원과 사위를 잃은 상관세가가 임위의 일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어쩌면 운씨세가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임위를 죽이는 것보다 사후의 일을 대비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 한 달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
꼬박 하루를 달려, 운청휘와 혼돈 영수는 목적지인 흉수산맥에 도착했다.
흉수산맥은 천원왕조에서도 위험하기로 이름난 곳으로, 십여 개 왕조의 땅을 가로지르며 우뚝 솟아 있었다. 워낙 넓다 보니 그 안에 사는 흉수들의 수를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휘이이이이잉…….
갑자기 스산한 바람이 불며 운청휘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기령. 한 달간 잘 부탁하마. 내 무위의 회복은 너와 나 하기에 달렸구나.”
기령은 운청휘가 혼돈 영수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야오오옹!”
기령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크게 울자, 몸에서 백색의 화염이 피어올랐다. 신기하게도, 불꽃이 일렁이는데 주변은 변함없이 서늘했다.
“온도는 없지만 모든 걸 태워버리는 화염. 혼돈지화(混噸之火)…….”
운청휘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중얼거렸다.
“화염 중 제일이라는 천화가 네 몸에서 피어날 줄, 누가 알았을까.”
이 드넓은 우주에서 하늘과 땅에 의해 잉태되는 화염이 있어, ‘천화’라 불렸다.
천화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화염으로, 작은 불씨만으로도 천지를 흔들고 모든 불 위에 군림하는 힘이 있었다.
다만 그 수가 매우 적어, 선계에서도 천년에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 했다.
설령 나타났다고 해도, 천화를 얻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만물을 태우는 천화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으려 했으니까.
선계 십대 선제 중 하나인 운청휘도 천화를 얻지 못했다.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다른 선제들에 비해 살아온 시간이 짧기에 천화를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니 운청휘가 기령에게서 피어난 천화, 혼돈지화를 보고 감탄할 수밖에.
천화가 가진 파괴력도 굉장한 것이지만, 운청휘는 천화의 또 다른 강점을 알고 있었다.
천화로 단약을 정제하면 뛰어난 품질의 단약을 만들 수 있다.
연제 속도와 효율도 보통의 불로 연단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지금 운청휘의 무위만으로는 왕급의 단약을 정제할 수 없겠지만, 기령의 천화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기령의 천화를 빌린 운청휘는 왕급 하품의 복령단을 정제해 냈다.
순조로운 시작이었다.
***
운청휘와 기령이 흉수산맥의 외곽에 들어선 지도 삼 일이 흘렀다.
삼 일간 힘을 합친 둘은 오십여 마리의 흉수(凶獸)를 사냥했고, 여덟 개의 내단(內丹)을 얻을 수 있었다.
영수와 달리 지능이 없고 포악하여 그저 살육과 파괴를 추구하지만, 흉수는 버릴 것 하나 없는 보물덩어리였다. 가죽과 뼈는 가공하면 갑옷과 무기가 되고, 살과 피는 보약으로 쓸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값진 것은 내단이다.
성경 8단계 이상의 흉수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는데, 그나마도 나오는 확률이 들쑥날쑥하여 얻기가 쉽지 않았다.
어둠이 내려앉자 운청휘와 기령은 임시로 마련한 거처에 돌아왔다.
높이가 십 장쯤 되는 나무를 위에서부터 파내 만든 동굴로, 아래에서는 보이지 않아 몸을 숨기기 좋았다.
기령의 도움으로, 운청휘는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여덟 개의 내단을 왕급하품의 단약으로 정제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