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야옹야옹……!”
단약을 바라보는 기령의 눈빛이 열망으로 이글거렸다.
“하하. 왕급하품의 단약이라도 혼돈지화가 더해지니 약효가 왕급중품에 버금가는군!”
운청휘가 만족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야옹야옹…….”
기령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걱정 마라. 네 덕택임을 잊지 않았으니.”
운청휘는 네 개의 단약을 기령에게 건넸다.
“야옹!”
흥분한 기령이 얼른 단약을 한입에 삼켜 버리고, 뒤따라 운청휘도 남은 단약을 입에 넣었다.
내단으로 만든 단약의 효과는 탁월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운청휘과 기령 둘 다 무위가 한 단계 상승했으니까.
***
운청휘와 기령이 한창 걷고 있을 무렵, 난데없이 거대한 포효가 들려왔다.
동시에 온몸이 금빛 털로 뒤덮인 거대한 호랑이가 덤불을 헤치고 뛰쳐나왔다.
보통 사람이라면 호랑이를 마주친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겠지만, 운청휘의 눈은 흥미롭다는 듯 반짝이고 있었다.
어깨에 앉아 있는 기령도 흥분한 듯 큰 소리로 울어 댔다.
열염호(烈焰虎).
내단을 가지고 있는 성경 9단계의 흉수다.
운청휘가 그저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이는지 눈을 빛내던 열염호가 지면을 박찼다.
거대한 몸뚱이가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가 운청휘의 코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운청휘를 한입에 삼켜버릴 수 있을 만큼, 열염호의 입이 크게 벌어지며 고약한 냄새가 훅 끼쳤다.
가만히 서 있던 운청휘가 일권을 내질렀다.
파리를 쫓듯 가벼운 움직임이었지만, 담겨 있는 힘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머리가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열염호는 비명 한번 못 내고 숨이 끊어졌다.
쿵!
열염호의 몸뚱이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지면을 뒤흔들었다. 미동도 하지 않는 열염호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대지를 붉게 적셨다.
“가자!”
***
열염호의 내단을 취한 운청휘는 기령을 데리고 계속해서 산맥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 각쯤 지날 무렵.
“피비린내가 짙은 걸 보니 적어도 성경 8단계 이상의 흉수의 피로군!”
아직 흩어지지 않은 아침 안개 속에서 네 명의 신형이 나타나 열염호의 시체 앞에 내려섰다.
“성경 9단계인 열염호의 시체잖아!”
시체가 열염호인 것을 확인한 넷은 숨을 들이켰다.
“열염호는 우리도 피하는 흉수인데…….”
“음? 이 상처 좀 봐봐!”
“헉!”
넷은 또다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상처가 한 개뿐이다. 단번에 죽은 거야!”
한참이 지나서야 넷 중 우두머리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열염호를 단번에 죽였다면 월경의 고수가 틀림없다. 만약 도움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소가주님의 계획도 더 순조롭겠지.”
“가자. 따라잡아야 돼!”
***
산맥의 중심부로 향하며 마주친 흉수는 수천에 달했지만, 운청휘는 세 마리의 성경 9단계 흉수만을 사냥했다.
그러는 와중에 시간이 꽤 지나, 어느덧 정오에 이르렀다. 운청휘가 잡은 흉수의 고기를 구우려 할 때, 하늘에서 찢어지는 듯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익!”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날개를 펼친 채, 독수리 한 마리가 빠르게 하강하고 있었다.
철로 된 부리와 날카로운 발톱이 기령을 향한 것으로 보아, 기령을 먹잇감으로 정한 모양이었다.
“……철탁응이군. 근사한 점심이 되겠구나!”
철탁응은 성경 4단계의 흉수이기에 사냥할 생각이 없었지만, 먼저 온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그 고기의 맛을 아는 운청휘의 눈이 반짝였다.
“야옹!”
그때, 기령이 운청휘의 어깨에서 뛰어오르더니 철탁응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촤악!
기령이 앞발을 휘두르자 철탁응의 머리가 잘려 나가며 허공에 피가 뿌려졌다.
“야옹야옹!”
운청휘의 어깨에 날렵하게 착지한 기령이 입가를 실룩이며 울어댔다. 감히 자신을 사냥감으로 본 게 꽤나 괘씸했던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 냄새가 숲으로 퍼져나갔다.
기령은 어른 손바닥만 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식성이 좋았다.
철탁응의 한쪽 날개를 전부 먹어 치운 것도 모자라 곧 다리를 뜯어서 물더니, 힘줄이 많은 부분을 오독오독 씹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기를 굽는 냄새인데! 흉수산맥 안에서 고기를 굽다니, 그 월경의 고수인가?”
“뭐야? 젖비린내 나는 어린놈인데?”
운청휘와 기령이 고기를 뜯고 있을 때 중년인 넷이 그들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놈 간덩이가 큰 건 인정해야겠군. 감히 흉수산맥에서 홀로 고기를 굽고 있다니!”
“이건 조류 흉수인데?”
절반만 남은 철탁응을 뚫어져라 보던 이가 말했다.
그러나 그가 반응하기도 전 선두에 서 있던 중년인이 성큼 다가서며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다.
“소형제, 혹시 집안의 어르신과 함께 흉수산맥에 수련을 온 것이오?”
운청휘는 손에 들었던 고기를 내려놓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 혼자다.”
자신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태도에, 질문했던 중년인의 얼굴빛이 냉랭하게 바뀌었다.
“그 말인즉, 열염호를 잡은 이는 너와는 상관없다는 뜻이냐?”
운청휘는 의외라는 듯 중년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자신이 죽였지 다른 이 죽인 것은 아니니까.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줄 알았더니 겁 없는 애송이였군.”
중년인의 눈가에 살기가 스쳤다.
“죽여, 고기는 더럽히지 말고!”
“크크크. 맡겨 주십쇼!”
넷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혀로 입술을 쓸었다.
“애송아. 이 몸의 이름은 왕광이라고 한다. 저승에 가거든 잊지 말고 고해라!”
자신을 왕광이라고 소개한 중년인이 운청휘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초면이거늘, 다짜고짜 죽이려 드느냐?”
운청휘는 눈을 흘기며 똑같이 일장을 날려 받아쳤다.
콰르릉!
저승에 가서 고할 이는 운청휘가 아니라 왕광이었다. 단번에 숨이 끊어진 왕광의 시체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감히 왕광을 죽이다니!”
“애송이 놈! 죽여주마!”
선두의 중년인을 제외한 두 명이 함께 달려들었다.
“그럼 얌전히 목이라도 내놓으라는 말이냐? 건방지구나!”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친 운청휘는 달려드는 이들을 향해 공격을 펼쳤다.
펑! 펑!
두 번의 폭음과 함께, 심장이 있던 자리에 휑하게 구멍이 난 사내들이 고꾸라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각도 되지 않아 일행을 전부 잃은 중년인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왕광이야 성경 5단계이니 일초에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왕기와 왕명은 모두 성경 7단계인데……!”
갑자기 무서운 예감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설마…… 열염호를 일초에 죽인 것이 너냐?”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으면서도, 중년인은 두려움에 물든 눈으로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정답이다. 하지만 곧 죽을 텐데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운청휘는 중년인을 살려 둘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운청휘가 출수하려는 순간, 중년인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소형제! 내가 몰라 뵈었네! 이미 셋이나 목숨을 잃지 않았나. 용서해 주시게! ……내, 내 소개 늦었군. 나는 낭야산 청풍채의 황진기고, 여기는 소가주님의 명으로 온 것뿐이네! 제발, 청풍채를 봐서라도 용서를…….”
“용서?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는구나. 아니면, 청풍채라는 말에 내가 물러설 것 같았던가?”
운청휘는 단칼에 그의 말을 잘랐다.
“소형제, 내가 용서를 비는 것은 그대가 무서워서가 아니야! 만약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가 없어!”
황진기는 태도를 바꾸며 운청휘를 노려보았다.
“어쩔 수가 없다고 했느냐?”
운청휘는 하찮다는 듯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고작 성경 9단계 주제에 잘도 지껄이는구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운청휘의 일장이 고막을 찢는 굉음과 함께 황진기를 향해 뻗어나갔다.
“열염호도 일초를 못 버텼는데 나라고 상대가 될 리가 없지. 다만 내가 도망가려 한다면 못할 것도 없어!”
곧바로 몸을 돌린 황진기가 경공을 펼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동급의 무인 사이에선 매우 빠른 축에 속하는 황진기였기에, 충분히 도망칠 자신이 있었다.
그것도 잠시, 황진기는 바짝 붙어오는 공격을 알아차리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운청휘가 날린 일장을 피할 겨를도 없이,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황진기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 커다란 바람 구멍이 생겨났다.
“음?”
바닥에 널브러진 황진기에게 느긋히 다가간 운청휘가 눈을 가늘게 떴다.
황진기의 품에서 둘둘 말린 종이 한 장이 튀어나와 있었다.
펼쳐 보니 그것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낡은 지도였다.
“야옹야옹!”
기령도 신기하다는 듯 다가와 지도를 훑어보았다.
“야옹?”
기령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놀라움이 가득한 눈으로 운청휘를 쳐다보았다.
“……! 이 지도는 청연지심화(青蓮地心火)가 봉인된 곳을 기록한 것이었구나!”
태산이 무너져도 평온할 것 같았던 운청휘의 얼굴 가득 놀라움이 떠올랐다.
땅속 깊은 용암에만 존재한다는 천화, 청연지심화. 기령의 혼돈지화에는 못 미치지만, 순위를 정한다면 20위 안에 드는 천화였다.
청연지심화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선제들도 거리낌 없이 혈투를 벌일 터였다.
선제들 중 유일하게 천화를 가진 허원선제의 현황염도 49위에 불과하니, 20위 안에 드는 청연지심화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것이 진품이라면, 청연지심화를 얻어 전성기에 한층 더 다가갈 뿐만 아니라 마지막 장벽을 넘을지도 모르겠군.”
선제인 운청휘를 동요시킬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격동하는 감정이 물결치고 있었다.
운청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지도를 따라 이동했다.
한 시진이 넘게 걸음을 재촉한 끝에, 운청휘와 기령은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운 산골짜기 입구에 도달했다.
짙은 안개가 골짜기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운청휘의 눈으로도 겨우 십여 장 내의 풍경만이 보였으니, 기이한 광경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길을 헤매게 될 것이다.
가만히 주위를 살피던 운청휘와 기령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 골짜기 어딘가에,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다.
“야옹!”
기령이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그래. 쇄용진(鎖龍陣)이로구나.”
운청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계에서는 겨우 중급에 드는 진법이 쇄용진이다. 전성기의 운청휘라면 손짓 한 번으로 쇄용진의 설치와 해제가 가능했다.
그러나 천성대륙에서는 최고의 진법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터였다. 그만큼 보기 드문 진법을 대체 누가 설치한 것일까.
“……더는 천성대륙을 평범한 인계(人界)로 볼 수 없겠군.”
혼잣말을 남기며, 운청휘가 기령과 함께 골짜기로 들어섰다.
이 각도 지나지 않아, 둘은 골짜기 가장 깊은 곳에 설치된 진법의 중심에 이르렀다. 진법에 박식한 운청휘와 혼돈 영수인 기령의 조합으로는 간단한 일이었다.
진법의 중심에는 거대한 오각성이 그려져 있었다.
운청휘는 단번에 오각성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영혼의 숨결을 알아차렸다.
“과연 청연지심화였군. 응? 여기에 봉인된 것은 영혼뿐이군?”
-……인간. 어떻게 알아낸 것이냐?
그 순간, 낯선 목소리와 함께 오각성의 위로 청색 화염이 솟구쳤다.
불길하게 일렁이는 청색 화염 사이로, 희미한 얼굴이 떠올랐다.
심연에서 기어 올라온 악마를 연상케 하는, 기괴한 생김새였다.
-이제 보니 신식을 수련한 인간이로군. 그러니 본좌의 상태를 알아차렸겠지.
청연지심화가 스산하게 웃었다.
-네 녀석의 영혼을 삼키면, 이 지긋지긋한 쇄용진에서 벗어나 본좌의 육체를 찾아낼 수 있겠군!
재빠르게 운청휘를 향해 날아오는 청연지심화. 푸른 불꽃이 공기 중에 흩어지더니, 손쓸 틈도 없이 청연지심화가 운청휘의 체내로 흘러 들어갔다.
-이렇게까지 청결한 육신이 존재하다니!
운청휘의 몸 안에서, 청연지심화의 감탄이 흘러나왔다.
-이건 평범한 인간의 가질 수 있는 육신이 아니야. 아니, 이건 선인조차 갖지 못하는 육신인데…….
감탄의 목소리는 점점 경악으로 바뀌었다. 연신 혼잣말을 하던 청연지심화가 드디어 알았다는 듯이 소리 쳤다.
-선제! 그래, 이건 선제만이 수련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육신이구나!
이제 청연지심화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고 있었다.
-인간, 너는 대체 누구지?
“방금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운청휘는 시답지 않다는 듯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가소롭구나. 영혼만 남은 천화 따위가 선제의 영혼을 삼키려 드는군.”
-뭐? 서…… 선제?
청연지심화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다.
선계에 가 본 적 없는 청연지심화지만, 선제의 막강함은 ‘그자’에게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손으로 하늘을 가르고, 성신을 뜻대로 주무를 수 있는, 진정한 절세의 고수들이 아닌가!
-말도 안 된다. 분명 아홉 선제 모두 선계에서 태어났다고, 그자가 말했거늘……! 그들이 왜 이곳에 온단 말이냐!
청연지심화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자?”
운청휘의 아미가 구겨졌다.
“네놈을 봉인한 자를 말하는 것인가?”
-인간, 네가 진짜 선제라는 말이냐? 만약 그렇다면 증명해 보아라.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이토록 깨끗한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청연지심화는 운청휘의 질문에 답할 겨를이 없는 듯,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고 있었다.
-네가 사실대로 고하기만 한다면 너의 영혼만은 건드리지 않겠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것이냐?”
운청휘는 그 말에 실소를 내뱉었다.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듯했다. 지금의 청연지심화는 운청휘의 도마 위에 올라온 고기나 다름없었다.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이냐? 좋아, 본좌가 먼저 맹세하지!
“필요 없다. 본제가 누구인지, 곧 알게 될 테니!”
말을 마친 운청휘가 신식을 움직여 청연지심화의 영혼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 이건……! 빌어먹을, 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청연지심화가 공포에 질려 울부짖었다.
-안 돼! 감히 본좌를, 노예로 만들려는 게냐! 안 된다! ……빌어먹을! 이토록 두려운 힘이라니! 정녕 선, 선제가……!”
청연지심화의 비명이 점차 작아지다 끝내 잦아들었다.
이 각 여의 시간이 흐르고, 영혼 형태의 청연지심화가 운청휘에게 굴복했다.
“영혼만 남은 천화라니. 아쉽게 됐군.”
“야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