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야옹!”
흥분해서 울던 기령은 뭔가를 떠올렸는지 아공간 자루를 단단히 문 채 경계하기 시작했다.
기령이 아직도 안개곡에서의 일을 잊지 못했다는 걸 알아차린 운청휘는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천화는 하나뿐이고, 기령은 이미 혼돈지화를 가지고 있어 청연지심화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 안에 든 것이 무엇이든, 전부 네 것이다.”
곧이어, 뭔가 생각하던 운청휘가 말을 이었다.
“아공간 자루에 든 것도, 앞으로 사흘간 사냥할 흉수의 내단도 전부 네게 주마.”
아공간 자루에는 단약, 무공서, 전표 등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중 단약은 대부분이 인급하품, 몇 개의 중품과 세 개의 상품이 전부였다.
신이 난 기령은 사탕을 먹는 아이처럼 까드득거리며 단약을 전부 삼켜 버리고, 무공서는 인급이기에 그대로 버려두었다.
“야옹!”
“그래, 전표도 주마.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천우성에 돌아가서 사 줄 테니, 아공간 자루는 내게 넘기도록.”
기령이 가져온 아공간 자루는 왕급하품이기에 공간이 열 평도 되지 않았다.
운청휘의 능력으로 한 번에 십여 개는 만들 수 있지만, 재료를 구하는 것이 번거로워 기령에게 받아냈다.
“우리도 그만 가자.”
운청휘가 임시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리‘도’라고 말한 건, 그들이 구해준 남녀가 고맙다는 말도 없이 그곳을 떠났기 때문이다.
“야옹!”
생각할수록 괘씸한지, 기령이 사나운 눈으로 남녀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봤다.
“그만. 평범한 사람들이니, 은혜를 알아도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없지 않느냐. 우리의 목적도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었으니, 잊어버리거라.”
기령을 타이른 운청휘지만, 그 또한 남녀를 떠올리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맙다는 말은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 이들이었다.
황혼이 질 무렵, 운청휘와 기령은 나무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나무 동굴에서 몇백 리 떨어진 곳.
젊은 남녀도 잠시 쉴 수 있는 산굴을 발견했다.
“안 오라버니, 어떡하죠? 천원학원의 제자 일곱이 죽었으니, 우리도 벗어나기 어려울 거예요.”
젊은 여인이 창백한 얼굴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도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인의 말에 그의 얼굴에 적지 않은 원망이 피어났다.
“모두 그 녀석 탓이야. 그 실력이면 충분히 천원학원의 제자들을 제압만 하거나 쫓아 버릴 수 있었을 텐데……. 괜히 죽여버려서 이런 사단을 만들었잖아.”
남자가 말한 ‘그 녀석’은 운청휘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는 그저 천원학원이 우리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안 오라버니라고 불린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오라버니. 아까 그 붉은 장포의 청년, 왠지 낯이 익지 않나요?”
여인이 갑자기 물어왔다.
“너도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의외라는 듯 여인을 바라보았다.
“우리 둘 모두 같은 생각이니 어디선가 마주친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인은 한참 동안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었다.
“아. 생각났어!”
여인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운청휘. 그자…… 운청휘였어요.”
“뭐라고……?”
남자는 깜짝 놀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여인을 바라보았다.
“운청휘라면, 3년 전 천우성을 떠들썩하게 했던 제일 기재 운청휘?”
3년 전의 그들은 기재 운청휘를 만날 자격이 없었다. 고작 먼발치에서 얼굴만 몇 번 본 것이 다였다. 그러니 지금은 얼굴을 마주해도 어딘가 낯익다고 느낄 뿐, 알아보기 어려운 것도 당연했다.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성경 9단계인 무인 여섯을 압살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된다고…….”
남자가 한탄하듯 중얼거렸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
그 후 십오 일간, 운청휘와 기령은 흉수 사냥에 몰두했다.
이제 성경 단계의 흉수는 운청휘의 상대가 되지 못했기에, 순조롭게 백오십여 개의 내단이 모였다.
오늘도 사냥을 마친 운청휘과 기령이 황혼을 등에 업고 나무 동굴로 돌아왔다.
“야옹!”
기령이 기대에 찬 눈으로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알겠다. 네 말대로 단약 정제가 우선이구나.”
운청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에 정제하기 위해, 그들은 십오 일간 내단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이제 때가 되었으니, 기령이 기대할 만했다.
“기령, 혼돈지화를 준비하도록.”
“야옹!”
운청휘가 내단을 꺼내 들자, 기령이 백색의 화염을 일으키며 답했다. 함께 지내며 무수히 호흡을 맞춘 둘이다. 하룻밤만으로도 둘은 왕급하품의 단약 백오십여 개를 정제할 수 있었다.
완성된 단약을 반으로 나눈 후, 운청휘과 기령은 동굴 안에서 약효 흡수에 전념했다.
다시 반나절이 지나자, 단약의 약효가 무위로 바뀌어 그들의 몸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야옹!”
“그래. 나도 이제 성경 8단계가 되었구나!”
운청휘와 기령이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제 왕급하품의 단약은 우리에게 소용이 없겠어.”
“냥?”
“가자. 월경의 흉수를 잡으려면 중심으로 가야 하지 않겠느냐.”
넓이만 해도 십여 개의 왕조를 가로지르는 흉수산맥. 그 끝을 알 수 없는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흉수산맥의 구역을 나누어 부르기 시작했다.
외곽지역, 중심지역, 그리고 내부지역으로.
각 지역에 사는 흉수들은 흉수산맥 깊이 들어갈수록 높은 무위를 자랑했다. 외곽지역의 흉수들은 모두 성경의 경지였고, 중심지역의 흉수들은 월경 단계였다.
다만 내부지역은 금지 구역이기에 소문만 무성했다. 양경의 흉수가 산다고도 하고, 적지 않은 선천생령급 흉수가 있다고도 한다.
나무 동굴을 빠져나온 운청휘과 기령은 중심지역을 향해 몸을 날렸다. 두 개의 잔상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둘은 이동을 멈추고 높은 나무 위에 올라섰다.
“야옹!”
기령이 뜻밖이라는 듯 울어댔다.
“또 저들인가. 이번에도 쫓기는군?”
운청휘 또한 의아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초라한 행색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르신, 억울합니다! 그들의 죽음은 저희와 무관해요!”
“어르신,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의 무위로 어찌 천원학원의 제자들을 죽인단 말입니까!”
젊은 남녀는 쫓기면서도 애걸하듯 추격자들에게 소리쳤다.
그들의 뒤로 이십여 명이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기세가 남다른 무인들이었다. 선두에 서 있는 자는 오십이 넘어 보이는 중년인이었고 나머지는 스물이 갓 넘어 보이는 자들이었다.
“흥! 너희들을 쫓아가다 변을 당했으니 너희 때문에 죽은 건 맞지 않느냐!”
청의를 입은 중년인이 냉소를 지었다.
그 말에 젊은 남녀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동시에 원망의 빛도 떠올랐다.
“안 오라버니. 그만 포기하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저자의 무위를 생각하면 차라리…….”
“그래. 월경의 고수야. 만약 전력으로 쫓아오면 금방 잡히겠지!”
젊은 남녀는 동시에 그 자리에 멈춰서며 몸을 돌려 추격자들을 맞이했다.
“어르신. 천원학원의 제자들을 죽인 자를 알고 있습니다. 말씀드릴 테니, 살려 주십시오!”
“어르신, 저희는 정말 무고합니다. 정말 죽어야 할 놈은 그놈입니다!”
필사적으로 외치는 남녀의 목소리가, 애석하게도 운청휘의 귀에 닿았다.
운청휘의 눈이 가늘어지며 시리도록 차가운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듯, 기령이 옆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은혜도 모르는 이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이었다.
“과연 다른 놈이 끼어들었구나.”
중년인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해라.”
“예예…….”
젊은 남녀는 급히 알고 있는 것을 고했다.
“그자는 운청휘라 합니다. 올해 열여덟이고 천우성 삼대세가인 운씨세가의 소가주이며…….”
순식간에 그들은 운청휘에 대해 아는 것을 전부 털어놓았다.
행여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싶었는지, 그들은 운청휘가 하지도 않은 일을 꾸며내어 말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그들이 설명을 마쳤을 땐, 운청휘는 악행을 즐기는 극악무도한 자가 되어 있었다.
“천우성의 운씨세가라…….”
중년인이 살기를 흘리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머릿속으로는 운청휘를 죽이고 운씨세가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겠다고 결정한 뒤였다.
“운청휘?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 것 같은데?”
중년인의 뒤에 서 있던 자들이 중얼거렸다.
“아, 생각났다. 내원의 임위 사형이 이번에 천우성에 돌아오는 목적이 그를 죽이는 것이라고 했었어!”
“호오? 그놈이었느냐?”
중년인은 임위가 죽이려고 하는 이가 누군지는 몰랐기에,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그때, 저만치에 있는 나무 위에서 붉은 신형이 날듯이 내려앉았다.
어깨에는 어른 손바닥만 한 고양이 한 마리가 웅크려 있었는데,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등장에 놀라는 것도 잠시, 젊은 남녀는 기연을 얻은 것처럼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르신, 저자, 아니, 저놈입니다. 저놈이 운청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