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아무리 운청휘에 대해 아는 것을 죄다 말했다지만, 운청휘를 찾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시간을 낭비하고 분노한 천원학원의 사람들이 검을 자신들에게 겨눈다면, 손 한번 못 써보고 당할 터였다
그런데 운청휘가 직접 나타났으니, 반가울 만도 했다.
남녀가 보기에는 천원학원의 사람들이 운청휘를 상대하는 데 꽤나 애를 먹을 듯했다.
자신들은 그 틈을 타서 도망치면 된다. 이를 위해 일부러 운청휘의 무위를 적당한 수준으로 포장해 두었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이렇게 갚겠다?”
운청휘의 가늘어진 눈이 젊은 남녀를 향했다.
“흡…….”
그들은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숨을 들이켰다.
“걱정하지 마! 천원학원의 어르신이 계시니 운청휘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판은 이미 기울었어!”
남자가 억지로 곁에 있는 여인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네놈이 운청휘냐?”
중년인이 무거워진 눈빛으로 운청휘를 노려보았다.
남녀의 설명과 달리, 월경인 자신의 무위로도 운청휘의 실력을 가늠할 수 없었기에 신중해진 것이다.
“비켜라. 네게는 용건이 없다.”
운청휘는 중년인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발길을 옮겨 젊은 남녀에게 다가갔다.
“뭐…… 뭐라!”
중년인의 아미가 구겨졌다. 두 눈에 서렸던 신중함은 어느새 살기로 바뀌어 있었다.
“이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감히 곽 교관님께 무례를 범하다니!”
중년인의 뒤에서 한 청년이 뛰쳐나오며 운청휘에게 살초(殺招)를 날렸다.
“그 ‘곽 교관’도 나서지 못하는데 네놈은 무엇이더냐!”
운청휘가 날카롭게 외치며 청년을 바라보았다. 살초를 뿌리는 청년의 기세가 등등했지만, 거리를 좁힌 것이 그의 실수였다.
가까워지는 순간, 운청휘의 손이 청년의 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콰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운청휘는 아무렇지 않게 손에 든 시체를 옆으로 내던졌다.
“이럴 수가…….”
정적.
모두의 시선이 운청휘에게 향했다가, 바닥을 나뒹구는 시체에 고정되었다.
곧 경악에 찬 음성이 터져나왔다.
“황원의 무위는 우리와 같은 성경 9단계인데……, 압살 당했다고?”
“설마 저자가 월경의 고수라도 된다는 거야?”
그들이 경악하고 있을 때 운청휘의 신형은 이미 젊은 남녀의 앞에 있었다.
“내가 준 목숨, 내가 거둬가지.”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평온한 말투와는 달리, 뻗어나가는 두 개의 손은 매서웠다.
젊은 남녀는 저항조차 잊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어쩌면 저항조차 할 수 없었을지도.
펑!
펑!
두 개의 심장이 산산이 조각나 지면에 흩뿌려졌다.
“다음이 너희 차례로군.”
운청휘는 몸을 돌려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월경 2단계라, 좋은 연습 상대가 되겠구나.”
“야옹.”
그때 기령이 앞발을 내밀며 천원학원의 제자들을 가리켰다.
“그래? 네게 맡기마. 단, 저 늙은이는 내버려 두어라.”
운청휘는 선선히 기령에게 그들을 내주었다.
“뭐야. 고양이가 우릴 상대한다고?”
“가만, 저 고양이…… 그냥 고양이가 아닌 것 같은데!”
누군가의 외침에 시선이 일제히 기령의 몸에 쏠렸다. 다음 순간, 그들의 눈에 탐욕이 깃들었다.
“영수, 영수로구나!”
가장 먼저 중년인이 소리쳤다. 그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천원왕조의 황제나 천원학원, 성공학원의 원장, 사대 세가의 가주들이나 소유한 영수다.
그러니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꼭 갖고 말 것이다!”
청의의 중년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기령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곽 교관이 먼저 나섰어!”
중년인의 뒤에 서 있던 천원학원 제자들의 안색이 대번에 변했다.
“이렇게 뺏길 수야 없지.”
슉! 슉! 슉!
이십여 개의 신형이 거의 동시에 움직였다. 그러나 그들의 목표는 기령이 아닌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이 작은 모욕이라도 당하면 참지 않을 제자들이었지만, 영수 앞에서 그 존경심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설령 부모라 했어도 일전을 벌였을 터.
그들이 가진 존경심이란 그런 수준이었다.
“곽 교관님, 연세를 생각하시면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에게 양보하시지요!”
“맞습니다. 저희는 천원학원의 제자들이 아닙니까. 그러니 저희가 가져가겠습니다!”
펑! 펑! 펑!
이십여 개의 공격이 거의 동시에 중년인의 몸에 떨어졌다.
“건방진 놈들! 감히 나를 욕보이려는 것이냐!”
월경 2단계에 접어들었다곤 하나, 성경 9단계 무인들이 일제히 공격하니 무사할 수 없었다. 중년인은 꼼짝없이 삼 장이나 밀려났다. 체내의 기혈이 뒤틀려 목구멍으로 피가 왈칵 올라왔다.
“스승을 욕보이다니요? 곽 교관님, 자만이 과합니다! 외원 교관 주제에 저희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이십오 세 전에 월경에 도달할 것입니다. 때가 되면 내원의 제자도 될 텐데, 당연히 당신보다 신분이 높지 않습니까.”
“그만 물러나시지요. 예를 갖추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저희를 막아선다면, 손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중년인을 따라온 20여 제자들은 이미 차가워진 눈으로 중년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냐아…….”
“흠…….”
기령과 운청휘는 멀뚱히 서서 그들의 대치를 바라봤다. 저들끼리 싸울 줄은 예상 못 한 상황이었다.
제자들을 마주한 청의 중년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천원학원의 여섯 교관이 각각 제자들과 함께 흉수산맥에 왔다.
명목은 수련이었지만, 그는 이번 산행의 진짜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자기칠선과(紫氣七神果)의 채집.
자기칠선과는 일종의 천재지보(天材地寶)로, 3백 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나무에서 자라는 과실이었다. 매우 짙은 영력을 담고 있어 월경 5단계 아래의 무인이 먹는다면 단번에 무위를 한 단계 올릴 수 있었다.
다만, 자기칠선과 나무에서는 한 번에 다섯 개의 열매만 열린다.
이번에 나온 천원학원 교관들의 수는 여섯. 가장 무위가 낮고 외원의 교관인 그에게 돌아올 몫은 없었다.
“하하하……, 내 아무리 얕잡아 보인다지만, 너희들까지 이러는 것이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자 오히려 웃음이 터져나왔다. 실소를 흘린 중년인의 몸에서 살기가 휘몰아쳤다.
“오늘 너희들을 죽여 스승의 위상을 다시 세울 것이다!”
중년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영력이 화살 모양을 이루더니, 제자들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력을 내보내 공격하는 월경 고수 특유의 방식이었다.
“빌어먹을, 곽 교관……, 퉤! 곽돈 저자, 정말로 우릴 죽일 셈이야!”
제자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미 가뜩이나 화가 치밀어 있던 곽돈이었다. 외원의 교관이라고 자기칠선과를 받지 못했으니, 태연한 척해도 생각할수록 울분이 끓어올랐다.
영수와 마주친 것은 일종의 전화위복이었다. 기령을 보자마자 곽돈의 머릿속에서 자기칠선과 따위는 말끔하게 날아가 버렸다.
당연히 자신이 영수를 차지할 생각이었는데, 제자들의 태도가 기가 막혔다.
기꺼이 양보는커녕, 합심해서 포기를 강요하다니?
제자들 또한 다른 다섯의 교관들과 다를 바가 없다.
용서할 수도, 용서할 생각도 없는 곽돈의 공격에는 살의가 담겨 있었다.
“산개해서 협공을 펼쳐!”
“방어에 능한 사람은 먼저 가서 견제해!”
“우린 양측에서 공격한다!”
함께 수련하며 합을 맞춰온 터라, 제자들은 서로를 잘 알았다. 재빠르게 손발을 맞춰 곽돈의 공격을 대비하는 진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곧바로 세 개 조가 나뉘었다. 견제를 맡은 한 조를 제외한 두 개의 조가 좌우에서 곽돈을 향해 공격을 펼쳤다.
“건방진 놈들, 네놈들에게 절대적인 실력이 무엇인지 보여주마!”
곽돈은 단번에 기세를 끌어올렸다.
죽이기로 마음먹은 와중에 시간을 끌 필요는 없었다.
-아아악!
눈 깜짝할 사이에, 흉수산맥에는 대여섯 개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공격을 방어하던 제자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나가떨어졌다.
곽돈이 쏘아낸 영기가 몸 곳곳을 관통하며 남긴 상처였다.
“고작 성경 9단계의 무위로 내 공격을 받아내려 하느냐? 전부 죽여 주마!”
창!
이제 곽돈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어 부상을 입은 제자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운청휘가 보기엔 빈틈투성이의 검법이었으나, 월경의 고수가 휘두르는 검이다. 한 번 휘두르자 여섯 명의 몸이 마치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이건……!”
“이자가…… 이렇게 강했었나!”
“이…… 이게 월경 고수의 실력인가?”
공격 조에 가담했던 제자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월경 고수의 실력은 그들의 예상을 한참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 월경 아래의 경지는 모두 벌레에 불과하다! 네놈들의 무위가 성경 1단계든 9단계든, 수가 많든 적든! 전부 귀찮은 벌레일 뿐이다.”
곽돈은 말을 하면서도 살초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신형은 신출귀몰하게 움직였고, 검이 지나는 곳마다 살이 베이고 피가 흩뿌려졌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한 개의 생명을 거두는 곽돈에게서 죄책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 각도 되지 않아, 남아 있던 10여 명의 제자들도 모두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이제 네놈만 남았다.”
곽돈이 얼핏 광기까지 엿보이는 눈으로 운청휘를 노려보았다.
“이렇게 많은 제자를 죽이고도 후환이 두렵지 않나?”
곽돈의 눈을 보던 운청휘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두렵지 않겠느냐? 내가 죽이지 않았더라도, 한 번에 스무 제자가 죽었으니, 학원에서는 내게 책임을 물어 그들 가족의 분노를 달래려 하겠지. 다만! 이미 자기칠선과를 놓쳤는데 이 영수까지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그것이 더 두려운 일이니, 기필코 영수를 얻고 말겠다!”
곽돈의 눈빛이 번들거렸다. 그러나 운청휘는 곽돈이 미쳐가든 말든, 별 관심이 없었다.
그와 기령의 흥미는 곽돈보다는 그가 언급한 ‘자기칠선과’에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