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닷새 동안의 폐관수련으로, 운청휘는 영력을 회복했다.
참천신검의 검집을 사용한 후유증이 너무나 컸다. 무위의 소진과 더불어 수명도 적지 않게 줄었다. 결국 운청휘는 선제의 정혈을 태워 겨우 서령쥐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무위가 성경 7단계로 되돌아오자, 운청휘는 기령을 불러 자기칠선과의 정제에 들어갔다.
사흘 밤낮을 꼬박 정제에 몰두하자, 다섯 개의 자기칠선과가 자색의 단약으로 바뀌었다.
“야옹!”
완성된 단약을 바라보는 기령의 시선이 매우 간절했다.
“황급 단약, 자기단…….”
운청휘의 눈에 흥분이 피어올랐다.
“성경 7단계의 무위로 황급 단약을 정제한 것은 선계에서도 놀랄 일이군.”
“야옹!”
그 말에 기령이 가슴을 펴고 우쭐대며 운청휘를 쳐다보았다.
“그래. 내가 아무리 대단한 수단을 가지고 있다 한들, 지금의 무위로 황급 단약은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네 도움이 컸어.”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기령의 공로를 인정해 주었다.
“자기단은 자기칠선과와 마찬가지로 처음 하나만 효과가 있으니, 하나만 먹거라.”
운청휘는 기령에게 자기단 한 알을 건넸다.
“야옹!”
기령도 그 말에 동의하는 듯 단약을 받아 그대로 삼켰다.
운청휘는 곁에서 자고 있는 서령쥐의 입에도 자기단 한 알을 던져 넣었다.
“저 녀석, 자고 일어나면 무위가 월경으로 올라서겠군.”
서령쥐가 지금까지 잠들어 있는 건 녀석을 거둔 후 운청휘가 선제의 힘이 깃든 정혈 한 방울을 먹였기 때문이다.
운청휘가 서령쥐를 향해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서령쥐는 그의 수족처럼 움직일 터였다.
기령은 영리하지만 제멋대로라, 싸움이라면 몰라도 다른 부분에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다시 하루가 지났다. 운청휘와 기령의 무위가 한 단계 더 상승했다.
그러나 기령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흉수산맥에 들어올 때만 해도 운청휘는 성경 5단계로, 자신보다 한 단계 낮은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의 운청휘는 성경 8단계. 성장한 자신을 따라잡아 같은 단계가 되어버렸다.
입을 삐죽거리며 운청휘를 흘겨보던 기령이 한숨을 삼켰다.
운이 나빴다.
운청휘가 청연지심화의 영혼을 얻은 것도 모자라, 본체를 되찾는다면 그는 단숨에 선천생령급으로 올라설 터였다.
자신이 얻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단순히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무위의 회복도 현재의 10배에서 100배는 빨라지고, 그동안 쓸 수 없었던 방법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기령 같은 혼돈 영수는 선천생령부터 탐식 능력이 5할 이상 증가한다.
무기나 천재지보는 물론이고, 살아 있는 흉수, 영수 할 것 없이 모두 집어삼켜 그들의 에너지를 자신의 무위로 바꿀 수 있었다.
운청휘의 경우에는 선제의 무공을 사용할 수 있었다.
선제의 무공!
설명할 필요도 없이, 모든 것을 대변해주는 말이었다.
“닷새 뒤면 임위가 천우성에 돌아오는군.”
운청휘의 계산에 의하면 오늘이 흉수산맥에 들어온 지 25일이 되는 날이었다.
“기령, 이만 돌아가자꾸나.”
***
그 시각, 운씨세가 아니, 천우성은 발칵 뒤집혔다.
철랑방이 운씨세가에 전쟁을 선언했다.
선전포고를 하기가 무섭게, 철랑방은 반나절 만에 운씨세가가 동원한 무사 전부를 죽였다.
때마침 태상장로가 나서지 않았다면, 무사들뿐만 아니라 세가 전체가 천우성에서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태상장로? 이미 관에 들어가고도 남을 늙은이 아닌가!”
“내일 오후면 철랑방주의 폐관 수련도 끝난다고 하던데……. 쯧쯧, 그 늙은이 목숨도 얼마 안 남았네.”
“지금 운씨세가에서 믿을 건 태상장로뿐일 텐데……. 그자가 쓰러지면 운씨세가의 운명도 뻔하구만.”
“소문으로는 철랑방의 당주들이 서로 경쟁하고 있다던데? 서로 먼저 운씨세가에 쳐들어가서 끝장을 내겠다고 벼르고 있어.”
“허허. 그 소문 한번 늦는구만. 소가주가 직접 병력을 이끌기로 결정 난 게 반 시진 전일세!”
동승주루 3층의 사랑방. 고급스러운 관복을 입은 청년과 검은 무복을 입은 노인이, 한 노인을 희롱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운상, 너의 운씨세가는, 이대로 멸문해 버릴 것 같구나?”
천우성 운씨세가.
운씨세가에는 짙은 슬픔이 맴돌고 있었다.
수천에 달하는 세가의 사람들이 하루 사이에 천 명이 넘게 죽거나 다쳤다.
특히 주요 전력에서 부상자와 사상자가 많아, 운씨세가는 크나큰 타격을 입었다.
운씨세가의 대전. 100여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모인 사람 중 9할이 부상자라, 대전은 의원을 방불케 했다.
“운몽, 몸은 좀 어떠한가?”
대전 위에 자리한 운한이 물었다.
“가…… 가주님, 아직 더 싸울 수 있습니다!”
비장한 목소리와는 달리, 운몽의 얼굴은 창백했다. 몸 곳곳에 붕대를 두른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다만, 심각한 부상도 운몽의 눈에 깃든 의지를 꺾을 수 없을 듯했다.
“철랑방 놈들이 다시 운씨세가를 공격한다면, 저 천수혈도! 이 목숨을 바쳐서 맞설 것입니다.”
가주 운한은 차마 그것만큼은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운몽을 바라봤다.
“운몽, 그만하면 되었다. 이제부터는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 집중하거라.”
잠깐 뜸을 들이던 운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건 명령일세!”
운몽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운한이 부른 수하들이 운몽을 이끌고 나갔다.
대전 안에는 무거운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상처가 아파 앓는 소리라도 나련만, 죽은 듯한 숨소리만 들려왔다.
한참 동안의 침묵 끝에,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가주님, 태상장로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운한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분은 지금 내일의 생사결을 준비 중이시다.”
철랑방은 내일 정오, 운씨세가에서의 전투를 예고했다. 몇 시간 전에 도착한 선전포고는 운씨세가의 분위기를 더욱더 어둡게 만들었다. 운몽이 부상을 무릅쓰고 나서려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대전 바깥에서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백부님께 말씀드릴게요. 이번 혼사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철랑방도 공격하지 않을 거예요. 들어가게 해 주세요! 제발…….”
대전의 문이 열리더니, 입구를 지키는 호위들과 실랑이를 하는 청의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쓰러울 만큼 초췌해진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대전을 바라본 소녀가 운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가주님…….”
그대로 달려와 운한의 품에 안긴 운비비가 절박하게 매달렸다.
“가주님! 아니, 백부님! 제발, 제발 철랑방에 보내주세요. 혼사를 거절해서 철랑방이 공격하는 거라고 들었어요. 그러니 절 보내주세요……!”
운비비의 등을 두드리는 운한에게서는 가주의 위엄보다는 조카를 걱정하는 백부의 마음이 묻어나왔다. 운한이 위로하듯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철랑방은 이미 임씨세가와 동맹을 맺었단다. 처음부터 운씨세가를 무너뜨릴 작정이었을 테지. 그게 아니라면 왜 우리가 손에 넣은 오인철 광산을 혼수로 요구했겠느냐? 혼담은 그저 공격할 명분이 필요해서였을 뿐이다.”
비비를 위로하던 운한의 얼굴빛이 갑자기 가라앉았다. 잠시 뒤 위엄을 동반한 기세가 대전을 뒤덮었다.
“누가 이 아이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이오?”
운한의 말투는 평온했다. 흡사 아무 일도 없다는 투였다. 그러나 대전에 자리 잡은 이들 모두 전신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을 느꼈다.
“가, 가주. 속하가 그랬소이다.”
대전 입구에서 환갑이 넘은 노인이 비척비척 걸어왔다.
노인의 오른팔은 온통 피에 젖어 있었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검상이 얼핏 비쳤다. 한눈에 보아도 중상이었으나, 운한의 눈빛은 싸늘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소. 비비가 알게 되면 가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운해경. 정녕 가주의 명령이 우스운 것이오?”
운한의 눈빛에는 실망이 어려 있었다. 운해경. 이자는 자신이 직접 새로운 대장로로 발탁했다.
그런데 운비비의 일에 가장 먼저 뜻을 거스르고 나서다니!
가주의 질문에 운해경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팔에 있는 검상을 만지더니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운비비는 배신자 삼 장로의 여식이오. 철랑방에 보낸다고 해도 우리가 손실을 입을 것은 없지 않소? 만약 그들의 목적이 정말로 운비비라면, 줘 버리면 그만 아니오? 그걸로 운씨세가를 구할 수 있다면! 가주, 한 세가의 장으로서 무엇이 세가를 위한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소?”
“고작 얄팍한 이해득실을 따지려 비비에게 알리고, 내게 찾아와 이리 빌게 만든 것이오?”
운한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운해경이 일 처리가 신중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인제 보니 나이만 먹은 옹졸한 인간이 아닌가?
네 장로가 권력을 휘두를 때, 운해경은 납작 엎드려 있었다.
네 장로 중 유독 삼 장로가 운해경을 심하게 대하긴 했으나, 비비가 무슨 죄일까.
누가 봐도 철랑방의 목적은 혼사가 아니다. 그들이 요구한 혼수만 봐도 명백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운씨세가의 거절. 그 거절을 빌미 삼아 선전포고를 하려는 수작이었다.
만약 운해경의 말대로 운비비를 철랑방에 보내고 혼수로 오인철 광산을 보낸다 해도, 철랑방은 다른 이유를 대며 시비를 걸 것이 뻔했다.
운해경은 이미 환갑이 넘었다. 그의 지혜만 해도 여느 젊은이들이 따라올 수 없을 터였다. 그런 그가 정녕 철랑방의 목적을 모를까?
그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비비를 철랑방에 보냄으로써, 갖은 수모를 당하게 해 삼 장로에게 복수하려는 속셈이었다.
“……물러가시오. 앞으로 다시는 세가의 일에 관여할 수 없을 것이오!”
긴 침묵이 지난 뒤 운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가주, 지금 무슨 말씀을……?”
운해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운한을 바라보았다.
“지금 배신자의 여식을 감싸고자, 세가를 위해 피땀을 흘린 이 늙은이를 파면하는 것이외까?”
쫘악!
운해경이 갑자기 오른 소매를 잡아 뜯었다.
얼핏 보이던 상처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너덜거리는 살덩이 사이로 피에 젖은 뼈가 보이자, 대전 안의 사람들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한눈에 봐도, 그가 운씨세가를 위해 철랑방에 맞서 싸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가주, 진정으로 저 계집 때문에 가문의 충신을 파면하려는 게요?”
아직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운해경은 걸음을 옮겨 운한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운해경의 행동에 운한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은 운한이 노기가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운해경 장로, 지금 본 가주를 협박하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