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여인은 손짓 하나만으로 어둠을 부르고, 추위를 거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녀가 원한다면, 이 대륙은 풀 한 포기 없는 죽음의 땅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조물주의 영역이었다. 눈앞의 여인에게는 그런 힘이 있을 것 같다는 이상한 착각이 들었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의 신형이 모습을 감췄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두 사람이 한데 엉켜 격돌하기 시작했다. 둘의 주위로 셀 수 없는 불꽃이 튀고 귀를 찢을 듯한 폭음이 일어났다.
서로 최후의 패는 쓰지 않았지만, 힘을 아끼지는 않았다.
아니, 누구도 아낄 수가 없었다. 이번의 격돌로 승패를 가릴 수 있을 터였다.
“야옹……!”
기령은 숨을 죽이며 그들의 결투를 지켜보았다. 운청휘와 여인이 격돌하는 장면 하나를 전부 눈에 담고 싶다는 듯, 꼼짝도 하지 않은 채로.
때때로 기령의 얼굴에는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이 스쳐 갔는데, 운청휘와 여인의 전투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운청휘와 여인은 힘의 제어와 사용이 완벽에 가까웠으므로.
쿠르릉!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운청휘와 여인이 전력을 다해 날린 일격이 부딪쳤다. 그들을 중심으로 반경 삼십여 장의 대지가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일어난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자욱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두 눈으로 보고 있어도 믿기 힘든 위력이었으니, 직접 보지 못한 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격돌이었다.
“야옹!”
기령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졌다.
승부가 났다.
***
서서히 먼지가 가라앉으며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은 운청휘가 다른 한 손으로 입가의 피를 닦아내었다.
위엄 있게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흐트러지고, 붉은 장포는 더럽혀져 있어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맞은편의 여인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여인의 흰 무복에 피가 점점이 흩뿌려져 있었다. 검은색 독혈(毒血)을 토한 흔적이었다.
탁!
여인이 손을 뻗자, 삼십여 장 밖에 꽂혀 있던 활이 날아와 그녀의 손에 감겨들었다.
활을 잡은 여인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 보였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여인은 운청휘를 공격하는 대신 가만히 바라보았다.
운청휘도 참천신검의 검집을 불러들여 그대로 등에 멨다.
청연지심화가 불러일으킨 대결이 끝났다.
누구의 승리도, 패배도 없었다. 무승부였다.
“중독되었군?”
운청휘가 물었다.
“맞아. 내가 청연지심화가 필요한 이유도 체내에 있는 극독을 억누르기 위해서야.”
여인은 잠시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다만 중독되었다고 해서 결투에 영향은 없었어.”
“……무슨 독이지?”
운청휘는 신식으로 땅에 흩뿌려진 피를 살펴보았지만 그의 견식으로도 독의 종류를 알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청연지심화가 필요했었던 거군…….”
운청휘가 중얼거렸다.
독의 정확한 이름을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독성의 종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한기를 품은 극독이었다.
청연지심화는 땅속 용암에서 잉태되는 천화였기에, 반대되는 성질로 독을 누를 수 있다.
다만 독을 누르는 데 그칠 뿐, 완전한 해독은 불가능했다. 지금의 운청휘로서는 여인을 완전히 낫게 해줄 방법이 없었다.
“이만 가겠어.”
여인은 이미 몸을 돌려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잠깐!”
운청휘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내가 가지고 있는 청연지심화는 영혼뿐이다. 이대로 가져간다고 해도, 체내의 독을 억제하는 데는 별 효과가 없을 거다.”
여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길을 떠나려던 여인을, 운청휘가 다시 한 번 불러 세웠다.
“내게 독을 억누를 방법이 있다. 다만, 한 번 억누르면 효과는 3개월뿐이지.”
운청휘가 나지막이 읊조리듯 말했다.
“이유 없는 호의는 아니다. 한 가지만 약속한다면 그 독, 본제가 억제해 주마.”
***
어둠이 내려앉았다.
천우성 동승주루, 3층의 호화로운 바깥채.
화려한 무복을 입은 청년이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은 채, 두 손으로 옥석을 돌리고 있었다.
청년의 앞에는 100세가 넘어 보이는 두 노인이 공손히 서 있었다.
“운상, 방계의 그 태상장로와는 무슨 관계냐?”
청년이 갑자기 머리를 들더니 한 노인에게 물었다.
“도련님께 아룁니다. 그는 이 늙은이의 사촌 동생입니다…….”
운상이라고 불린 노인이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사촌 동생이긴 하지만 그놈은 이 늙은이와 친형제나 다름없습니다.”
“크크크,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동생이 죽는 걸 보게 되다니…… 입맛이 아주 쓰겠어?”
청년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쿵!
운상이 별안간 무릎을 꿇었다.
“도련님, 이 늙은이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제가 나서서 운씨세가를 돕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운상,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언제 너한테 돕지 말라고 했느냐?”
청년이 아미를 구기더니 불만스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너의 그 손자 놈이 돌아와서 순순히 내 무시가 되겠다고 한다면, 운씨세가를 구하도록 허락할 것이다.”
“하지만 도련님, 이 늙은이의 손자 녀석은…… 죽음을 택하더라도 누군가의 무시가 되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죽을지언정 굽히지 않는다는 건가? 하하. 언제부터 방계의 자제들을 무시로 삼는 데 그놈들의 동의가 필요했느냐? 30년 전 낙극성 운씨세가의 교훈이 그리 깊지 않았던 모양이야.”
청년의 낯빛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그놈이 주제를 안다면 무사하겠지. 그렇지 않다면, 임씨세가와 철랑방 따위가 나설 것 없이 본 공자의 손으로 운씨세가를 멸문시켜주마!”
똑똑똑!
그때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운씨세가의 운현이 본가의 도련님을 뵙기를 청합니다.”
밖에서 운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현? 웬 놈이야?”
청년은 귀찮다는 듯 입구를 바라보았다.
“도련님, 운현은 운청휘의 사촌 형입니다. 팔이 잘린 폐물에다 천우성에서 소문도 더럽습니다. 반년 전에…….”
침묵을 지키던 흑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청년과 일행이 천우성에 온 지 이미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흑의 노인은 천우성 안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덕분에 운현의 추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의 설명을 들은 청년은 잠시 어리둥절하다 이내 비웃음을 머금었다.
“정혼자를? 더러운 놈이로구나! 영해가 폐해지고 팔이 잘린 것도 당연하군.”
청년은 흑의 노인을 시켜 운현을 들어오게 했다.
“운씨세가의 운현이 본가의 도련님을 뵙습니다!”
운현이 허리를 숙여 간단한 예를 취했다.
무릎을 꿇지 않고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자 청년의 아미가 구겨졌다.
그러나 그의 주의력은 이내 운현의 빈 소매로 향했다.
“정말 비어있군…….”
청년이 손을 뻗어 왼팔을 잡았지만 빈 소매만 잡힐 뿐 무엇도 만져지지 않았다.
“자신의 정혼자를 노리다 팔이 하나 잘리다니.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짓이더냐?”
청년이 진지하게 물었다.
“도련님께 아룁니다. 그 일은…… 소문과는 다릅니다. 저는 모함을 당했을 뿐입니다.”
그는 청년이 자신을 일부러 모욕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별 볼 일 없는 놈이군. 인정할 용기도 없는 거냐?”
청년은 경멸의 눈으로 운휘를 바라보며 흥미를 일었다는 듯 팔을 휙 저었다.
“됐어, 꺼져!”
“도련님께 아룁니다. 소인이 이렇게 온 것은 도련님의 무시가 되고 싶어서입니다.”
운현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말했다.
그는 운청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녀석은 죽어도 누군가의 무시는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대신 온 것이다. 운청휘를 대신하여 본가 도련님의 무시가 되기 위해.
“너 따위가 본 공자의 무시가 될 자격이 있다고 보느냐?”
청년의 눈에 깃든 경멸이 더욱더 짙어졌다.
“맥 빠지는군, 이런 놈이 감히 본 공자의 무시가 되려 하다니.”
청년은 눈길을 돌려 옆의 흑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내던져버려.”
“존명!”
흑의 노인이 급히 포권을 취하고는 냉소를 지으며 운현을 바라보았다.
“도련님은 예전부터 버러지를 싫어하셨다. 너처럼 사지가 온전치 않은 놈은 더욱더 그러하시지.”
흑의 노인이 곧바로 신형을 날려 운현의 앞에 나타났다. 주름진 손이 운현의 멱살을 틀어쥐며 가볍게 들어 올렸다.
“죽이지 않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거라.”
“아아악……!”
운현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흑의 노인의 손바닥에서 일어난 영력이 운현의 몸으로 빨려 들어가며,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체내의 혈맥과 오장육부가 순간 무너져 내리는 고통과 함께, 신체기능이 파괴되었다.
“운려, 네놈이 감히……!”
운상이 불같이 화를 내며 흑의 노인에게 달려들었다.
“허허. 못할 건 또 뭐지?”
흑의 노인이 냉소를 머금었다. 노인은 운상이 달려오기 전에 운현을 주루 1층의 대청으로 던져 버렸다.
“그만! 나이도 지긋한 사람이 점잖지 못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