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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귀환-36화 (36/430)

제36화

운상이 흑의 노인을 공격하기 직전, 뒤에서 청년의 목소리가 울렸다.

“도, 도련님! 운현은 이 늙은이의 손주 녀석입니다!”

운상이 두 주먹을 꽉 말아 쥐고 화를 참으며 말했다.

“손자가 어쨌다는 거냐? 그냥 병신이 아니더냐? 죽으면 죽은 거지 저놈 때문에 화를 낼 가치가 있더냐?”

청년이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도련님, 하지만 도련님께서 던져버리라고만 하셨는데 운려 저놈이 마음대로……!”

“말하지 않았느냐, 버러지일 뿐이다. 운려가 죽인다 해도 상관없단 말이다. 아니면 버러지 하나 때문에 운려와 죽기 살기로 싸우기라도 할 작정이냐?”

청년이 운상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리고, 본 공자가 경고하지 않았다고 탓하지 말거라. 만약 다시 한번 저 버러지 때문에 소란이 일어난다면, 본 공자가 직접 천우성의 운씨세가를 멸하겠다.”

“명심…… 하겠습니다.”

꽉 쥔 주먹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운상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그저 분노를 씹어 삼키고 머리를 숙여야 했다.

청년은 고개를 돌려 흑의 노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운려…… 공격을 시작했으면 아예 죽여 버리든가! 확실히 해 둬라.”

“허허, 도련님께서 죽이라는 말씀은 없었지 않습니까…….”

“흥, 말은 잘 듣는구나. 다만 다음부터 저런 버러지는 죽이고 싶으면 죽이도록, 내 허락을 기다릴 필요 없다.”

흑의 노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청년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동승주루는 운씨세가의 사업 중 하나이기에, 혼절한 운현은 곧바로 운씨세가로 옮겨졌다.

운씨세가 후원의 별채, 운한은 초조한 얼굴로 태상장로를 바라보았다.

태상장로는 신중하게 운현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태상장로님, 어떻습니까?”

운한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좋지 않소. 영해가 박살났으니……. 게다가 저번보다 더 심하구려. 이번에는 혈맥과 오장육부가 무너져 내렸소이다.”

잠시 머뭇거리던 태상장로가 운한에게 상태를 알려주었다.

운한의 안색이 굳으며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청천벽력이었다. 반년 전 임씨세가에서 운현의 영해를 폐했다지만, 그때는 그저 무공을 수련할 수 없었지 일상생활을 누릴 수는 있었다.

하지만 혈맥과 오장육부가 무너져 내리다니……. 무공은커녕 여생을 침상에서만 보내야 한다는 뜻이 아닌가!

“현이는…… 언제쯤 일어날 듯합니까?”

운한이 한참 동안 침묵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늦어도 내일 아침이면 정신을 차릴 것이오. 다만, 그 후에도 침상에서 일어나지는 못할 것이오…….”

태상장로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운현의 삶도 참으로 기구했다. 반년 전에는 영해를 잃고 팔이 잘렸다.

운청휘가 돌아와 영해를 복구해주어 겨우 수련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또 누군가에 의해 이 꼴이 되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장담도 할 수가 없었다.

“청휘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자게 두는 것이 좋겠구나……. 정신을 차리면, 또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까 두려우니…….”

운한의 얼굴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들의 고통을 대신할 수 없는 것이 그저, 원망스러웠다.

“자게 내버려 두시오. 청휘가 돌아오면, 방법이 있기를 바래야지.”

태상장로가 한숨을 내쉬었다.

“늦었습니다. 태상장로님도 돌아가셔서 쉬시지요. 필경 내일 점심 흑괴와의 결전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운한이 잠깐 숨을 고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녁쯤에 운씨세가를 찾아온 이들이 있는데, 천원학관에서 온 듯합니다. 게다가 임위 그놈이, 천원학관 내원 제자가 된 것도 모자라 부원장의 직속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태상장로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로 떠났다.

운씨세가가 지금 맞이한 상황은 전례가 없는 위기였다.

삼대 세력에서 내려오느냐 마느냐는 둘째 치고, 세가의 존폐가 달려 있었다. 황성의 본가에서 도움을 주지 않을까 기대했건만, 도움은 고사하고 운현이 폐인이 되어버렸다. 임씨세가나 철랑방보다 더 악랄한 처사였다.

별채의 불빛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하늘 동쪽에서 태양이 솟아올랐다.

운씨세가의 대문이며 주위를 둘러싸고 모여든 구경꾼들의 얼굴에 주홍색 태양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정오에는 철랑방주 흑괴가 운씨세가 태상장로와 대결하기 위해 이곳에 올 터였다.

양대 세력의 고수가 격돌하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지만, 천우성에서 근 백 년간 볼 수 없었던 월경 고수들의 대결이다. 이만한 구경거리를 놓칠 수 없기에, 사람들은 동이 트기도 전부터 몰려들었다.

이미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는 무서울 정도로 늘어나, 굳게 닫힌 운씨세가의 대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오까지 반 시진쯤 남았을 무렵, 무거운 대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잘 닦은 갑옷을 입고 활과 검을 대동한 수백의 호위들이 위풍당당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림잡아도 500여 명 남짓한 그들은 적어도 월경 6단계의 무위를 지닌 최정예 무사들이었다.

동시에 운씨세가의 가장 큰 힘으로, 멸문의 위기가 닥칠 때만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왜 운씨세가가 천우성의 삼대 세력인지 알겠군!”

“다른 건 몰라도 저들만으로도 천우성 전체를 쓸어버릴 수 있겠군. 물론 철랑방과 임씨세가가 나서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야.”

수십 만의 사람 중 9할이 넘는 이들이 운씨세가의 무사들을 보며 감탄했다.

다만 소수의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았다.

운씨세가마저 무인들을 이만큼 보유하고 있는데, 삼대 세력 중 가장 세력이 큰 철랑방은 어떻겠는가.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떠올랐다.

***

약속한 시간을 일 다경 남겨두고, 드디어 철랑방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천여 명이 대오를 이루어 길게 늘어선 모습이 제법 장관이었다. 그들에게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왔다.

이들의 무위는 운씨세가 무인들과 대등했으며, 수도 두 배나 되었다.

“늙은이, 내 아버지가 네놈을 죽이면 나 흑낙이 직접 사람들을 이끌고 운씨세가를 세상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대오를 인솔하는 자는 철랑방의 소방주 흑낙이었다.

기세등등하게 외친 흑낙이 이를 갈았다. 어제의 굴욕이 끊임없이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당주들이 죽고 왕급상품의 보검을 빼앗겼다.

100여 명의 정예가 태상장로 한 명에게 도륙당하고, 자신은 운씨세가 밖에 초라하게 내던져졌으니, 굴욕도 이런 굴욕이 없었다.

“늙은이.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대오의 중간,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있었고 안에 50세가 넘어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 남자는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하고 있어 보기에는 평범한 노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그의 몸에서 음습하기 그지없는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어 마치 대마두(魔頭)를 연상케 했다.

그 남자가 바로 철랑방의 방주 흑괴였다.

“임위 소가주님의 도움으로 드디어 월경 2단계에 올라섰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실력이 비슷한 상대와 실전을 하는 것이다.”

흑괴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가 월경 2단계로 올라선 방법은 다소 독특했다. 그 때문에 무위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실전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한편, 운씨세가의 전각.

“흑괴가 도착했소. 우리도 나서야 하오!”

태상장로가 앞장서서 전각 밖으로 발을 옮겼다.

“태상장로님, 임씨세가에서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운한이 뒤따르며 말했다.

“임씨세가? 노부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오. 적어도 노부가 흑괴를 처리하기 전까진 말이오!”

말을 마친 태상장로가 몸을 날려 대문을 향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숨을 한 번 내쉬자 태상장로의 몸은 대문 위에 도착해 있었다.

태상장로의 시선이 철랑방의 무인들을 지나, 화려한 마차로 향했다.

그와 동시에, 천천히 달리던 마차 안에서 폭발할 듯한 기세가 흘러나오며 그림자 하나가 날듯이 뛰쳐나왔다.

그림자는 태상장로와 불과 삼십여 장 떨어진 건물 위에 날렵히 내려앉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몸을 떨었다.

“운씨세가의 늙은이. 지금까지 운씨세가를 내버려둔 건 네 존재가 걸렸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는 기회가 없을까 했는데, 운이 좋았군. 나도 월경 2단계로 올라섰으니!”

먼저 입을 연 철랑방주 흑괴가 도발하듯 비아냥거렸다.

“만약 예전의 네놈이라면 겨우 노부의 상대가 될 자격이 있었다. 너는 한 명의 효웅이었으니까.”

태상장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가 흑괴를 바라보는 눈에 비웃음이 스쳤다.

“하지만 지금은 임씨세가가 키우는 개에 지나지 않는군! 그런 네놈이 노부의 적수가 되리라 생각하느냐? 게다가 그 무위가 불안하기 그지없는데, 노부를 죽이고 운씨세가를 삼키겠다고? 헛된 꿈을 꾸는구나!”

“흥! 꿈인지 아닌지 싸워보면 알 것 아니냐!”

말을 내뱉기 무섭게, 흑괴의 몸에서 흘러나온 영력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태상장로도 마찬가지로 영력을 쏟아내어 응수했다.

펑! 펑! 펑!

영력이 부딪치며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그중 방향이 틀어진 영력은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향했다.

“아아악……!”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영력을 막지 못한 이들은 중상을 입거나 심장을 관통당해 숨이 끊어졌다.

캉!

예리한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소리가 울렸다. 흑괴가 장검을 빼 들고 태상장로에게로 달려들었다.

“왕급상품의 보검……!”

놀랍게도, 흑괴는 또다른 왕급상품의 보검을 가지고 있었다. 태상장로의 얼굴이 굳었다.

“내 아들에게서 왕급상품의 보검을 하나 빼앗았다고, 내가 빈손으로 올 줄 알았더냐! 우리의 눈에 귀중해도, 임위 소가주님에게는 그저 고철 덩어리인 것을!”

냉소를 머금은 흑괴가 태상장로의 눈앞에 도달했다.

태상장로도 망설이지 않고 장검을 빼 들었다. 흑낙에게서 뺏은 검이었다.

캉! 캉! 캉!

두 무인이 한데 엉키며, 어지러운 검무가 펼쳐졌다.

월경의 고수들이 보검을 들고 전투를 펼치자, 그 여파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 금방이라도 불길이 일어날 듯 무수한 불꽃이 튀고, 검이 부딪칠 때마다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쾅! 콰르릉!

몇 개의 건물이 충격파를 맞고 무너져 내렸다. 운씨세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빨리 피해!”

“우리가 관전할 만한 수준의 싸움이 아니야……!”

“뒤, 뒤로 물러나!”

가까이에서 구경하던 이들은 오합지졸처럼 우왕좌왕하며 몸을 피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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