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회색의 패(牌) 한 장을 집어 든 운청휘는 기억을 더듬었다.
영정패는 천검종이 운영하는 전장(錢莊)에서 내주는 패로, 은자 천만 냥 이상을 맡겨야만 받을 수 있었다.
각 왕조에서는 고유한 은표(銀票)를 사용하기에, 천원왕조의 은표는 다른 왕조에서 쓸 수 없다.
그러나 천검종에서 발행하는 영정패는 그들이 통치하는 10여 개 왕조 어디에서나 사용할 수 있으니, 은표보다 자주 사용되곤 했다.
“야옹!”
뜻밖에도 막대한 소득을 얻은 운청휘가 생각에 잠겨 있자, 기령이 그를 불렀다.
“수련을 해야 한다고? 한 식경? 알겠다, 여기서 수련하거라.”
월경 4단계인 임위의 영력 절반이 담긴 마종이다.
이것을 흡수한다면 성경 1단계의 무인이라도 월경 1단계까지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령의 체질상, 성경 9단계가 한계일 터였다. 생각을 마친 운청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성루 아래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노인 둘의 호위를 받는 화려한 복장의 청년이 있었다.
“도련님, 과연 운청휘는 죽지 않았군요. 저기 있습니다.”
흑의를 입은 노인이 성루의 한쪽을 가리켰다.
다른 노인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후손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저 녀석이 손주인 운청휘인가.”
노인이 잠시 눈을 감자, 불현듯 과거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18년 전, 본가의 무시로 일하던 그에게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손자가 태어났으니, 이름을 지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하룻밤 내내 고민한 끝에, 노인은 청석을 떠올렸다.
청석(青石)은 천원왕조의 광장(礦場)에서 나는 철이다.
천원왕조 대부분의 관군이 쓰는 도검을 청석으로 만들었으니, 청석이 천원왕조를 지탱하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석처럼 세가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힘이 되어주길. 그 바람을 담아 노인은 ‘청휘’라는 이름을 지어 보냈다.
“도련님, 놈이 숨은 곳을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에 알릴까요?”
흑의 노인이 청년을 보며 물었다.
“그것도 나쁘진 않군…….”
청년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저놈은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의 상대가 못 된다. 저놈이 위험할 때 본 공자가 나선다면…… 그때는 무릎을 꿇어서라도 무시가 되려 하겠지. 운상, 거처로 돌아가서 주안상을 봐 두거라. 본 공자가 오늘 무시에게 연회를 열어주지!”
청년이 운상을 조롱하듯 쳐다봤다.
“……존명.”
운상은 한숨을 내쉬며 한참 동안 망설이다가 두 손을 꽉 말아 쥐며 허리를 숙였다.
이어 그의 몸이 하늘로 솟구치더니 동승주루 방향으로 날아갔다.
“도련님, 일부러 보낸 것입니까? 운상의 불만이 제게도 느껴집니다.”
흑의 노인이 멀어져 가는 운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불만이면 어찌할 테냐? 저놈은 집에서 키우는 개에 지나지 않아. 개가 불만을 품은들, 감히 주인을 물겠느냐?”
청년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운상보다는 운려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네가 아버지의 무시이고 운상은 숙부의 무시라는 점을 제외해도 마음가짐이 되어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당장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에 운청휘가 있는 곳을 알려라!”
***
상관세가의 무인들과 천원학관의 내원 교관들이 임위의 몸을 꼼꼼히 살폈지만, 결국 그가 영력을 잃은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의 안색이 저절로 어두워졌다.
상관세가의 무인들은 가주의 명령으로 임위를 호위했고, 천원학관의 교관들도 같은 이유로 부원장이 보낸 터였다.
그들의 목적은 임위의 안전, 그뿐이다.
만약 임위에게 더한 사고가 일어난다면…… 그들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
그때, 검은 그림자가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여섯의 시선이 동시에 그림자로 쏠렸다.
“황성 운씨세가의 운려……! 운범이 복수를 하라고 보낸 건가?”
상관세가의 무인 하나가 말했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운려를 보자 경계태세로 돌입했다.
그들은 당연히 천우성의 운씨세가가 황성의 운씨세가의 방계라는 것을 알았다.
“운청휘는 미천한 방계의 후손이다. 도련님께서 그깟 놈의 복수를 하실 것 같으냐?”
운려가 그 말에 냉소를 지었다.
“복수가 아니라면 무슨 용건으로 온 것이오?”
“경고하겠소. 만약 임위를 다치게 한다면 우리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은 절대 그냥 물러나지 않을 것이오!”
월경 4단계의 고수가 여섯 명이나 모여 있음에도, 노인을 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흥. 알려줄 게 있어 왔더니 대접이 형편없구나. 노부는 이만 돌아가겠다!”
운려가 콧방귀를 뀌며 돌아가려 했다.
“무슨 소리요?”
“혹시 임위의 무위가 사라진 이유라도 알고 있는 것이오?”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의 사람들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무위가 사라져?”
운려는 이상하다는 듯 임위를 바라보다 몸을 날려 다가갔다.
“정말 영력이 감쪽같이 사라졌군…… 그런데, 영해는 그대로란 말이지.”
임위의 몸을 살펴본 운려가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뿐이었다. 임위가 어떻게 되든,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더 깊이 파고들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운려가 손을 들었다.
“본론을 말하지. 운청휘는 죽지 않았다. ……저기 있군.”
여섯의 시선이 운려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호오. 발각됐나. ……음? 저자가 왜 저기에 있는 건가.”
마침 기령과 물건 분배를 끝낸 운청휘는 몇 개의 예리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들의 무위가 가장 높은 여섯도 겨우 월경 4단계니, 검집만 있어도 충분하겠구나. 다만, 저 월경 6단계와 나머지 5단계는 쉽지 않겠군.”
천우성에 돌아온 순간부터, 운청휘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기운은 모두 셋으로, 동승주루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운만으로 운청휘는 월경 6단계의 무인 한 명과 월경 5단계의 무인 둘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월경 5단계의 무인 중 한 명은 스물이 갓 넘은 청년이었고, 한 명은 100세가 넘은 듯한 노인이다.
이상하게도, 운청휘는 그 노인에게서 미묘한 친밀감을 느꼈다.
“넌 여기서 수련에 집중하도록.”
기령에게 말을 마친 운청휘가 몸을 날려 먼저 임위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임위를 내놓으면, 너희는 살려주겠다.”
삼 장 앞까지 도달한 운청휘는 임위를 둘러싼 여섯 명에게 담담하게 선언했다.
운현의 복수, 죽어간 세가 사람들의 복수를 이룰 시간이었다.
“이놈! 지금 뭐라고 했느냐!”
“네놈이 감히 우리를 협박하는 것이냐!”
“도련님의 무위가 사라진 것도 네놈이 한 짓이냐!”
임위를 지키고 서 있던 자들이 찢어질 듯한 눈으로 운청휘를 노려봤다.
운청휘를 조금은 높게 평가했던 운려의 눈에 비웃음이 실렸다.
‘겨우 임위를 이겼다고 월경 4단계 무인 여섯을 위협하는구나. 쯧쯧,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방계의 근성은 어쩔 수 없군. ……하지만 고생 좀 하다 보면, 도련님이 저놈을 거두기 더 쉬워질 터.’
생각을 정리한 운려는 훌쩍 몸을 날려 자리를 벗어났다.
임위를 지키고 있던 여섯 명이 동시에 안도했다. 운려만 개입하지 않는다면, 운청휘를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므로.
운청휘는 멀어져 가는 운려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를 생각하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마지막이다. 임위를 두고 가면 살려 주겠다!”
“이놈!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여섯 무인의 기세가 하늘을 뒤덮으며 솟구쳤다가, 운청휘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월경 4단계의 이른 고수들의 공격이었다.
슈슈슉……!
기세를 뿜어낸 무인들이 동시에 움직이며 살초(殺招)를 퍼부었다.
운청휘는 영후백변신법을 펼쳐 대응했다. 수많은 잔상과 함께 그의 분신이 나타났다.
“속도가 이토록 빠르다니……!”
“저건 무슨 신법(身法)이야?”
월경 4단계의 고수답게, 그들은 코앞에서 나타난 분신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저 분신들은 운청휘가 움직이며 남은 잔상에 불과했다.
콰르릉!
콰르릉!
콰르릉!
여섯 개의 공격은 지면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 냈지만, 그 자리에 운청휘는 없었다.
“빌어먹을, 저놈, 우리를 상대할 생각이 없어!”
“안 돼! 도련님이……!”
여섯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들의 눈에는 운청휘가 혼절한 임위를 가볍게 들어 올리는 광경이 비치고 있었다.
“일어나라!”
운청휘가 영력을 임위의 몸에 불어넣자 혼절해 있던 임위의 눈이 떠졌다.
“……운청휘.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내 영력도…… 마종도 느껴지지 않아!”
임위가 힘없이 소리 질렀다.
운청휘가 대답이 없자 임위는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뜨며 다시 물었다.
“네놈이…… 내 마종을 뺏어간 거냐?”
“그 3급 마종, 그 부원장 스승이 심은 것인가?”
운청휘가 잔잔한 눈으로 임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 어떻게 그걸?”
임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 스승도 누군가가 마종을 심어줬겠군. 다만 너와 달리 2급 마종이겠군. 어느 마종이든, 마종은 끝이 좋지 않지. 무위가 오르면 1급 마종을 가진 자가 너희의 마종을 거둬갈 터. ……모르겠느냐? 너희는 누군가가 기르는 가축에 지나지 않는다.”
도심종마대법. 선계의 모든 생령이 거부하고, 수련자를 공격하는 무공.
이 무공을 익히면 몸에 1급 마종이 생성되고, 1급 마종이 있는 자는 타인에게 2급 마종을 줄 수 있었다. 2급 마종을 지닌 자는 타인에게 3급 무종을 주는 일이 가능하다.
1급 마종으로 시작된 마종은 끝없이 전수가 가능해, 전염병처럼 증식할 수 있었다. 4급, 5급…… 1,000급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도심종마대법이 악랄한 이유는, 높은 급의 마종이 낮은 급의 마종을 탐식(吞噬)하기 때문이다.
마종을 탐식하는 동시에 상대의 무위도 통째로 삼켜버린다.
임위의 3급 마종은 그의 스승이 언제든 거둘 수 있고, 무위 또한 흡수되고 만다.
그의 스승도 1급 마종을 지닌 자에게 탐식될 운명이다. 결국, 마종을 지닌 자들은 1급 마종의 소유자가 키우는 영약이나 다름없었다.
다만 임위의 3급 마종은 변형된 도심종마대법으로 심은 마종이다.
진정한 도심종마대법이 아니다 보니, 마종을 심는 횟수가 다섯 번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더욱이 마종을 심으며 단계를 내려가다 보면 마종의 힘이 점점 희미해져, 4급 마종부터는 마종을 심지 못했다.
“너…… 너는 도대체 누구냐, 어떻게 마종에 대해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