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임위가 공포에 질려버린 눈으로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운청휘가 아니면 누구겠느냐? 쓸데없는 말이 길었군. 이만 죽어라!”
말을 마친 운청휘의 손이 단번에 임위의 목을 꺾어 버렸다.
운청휘는 일부러 임위를 깨웠다.
임위는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공포에 질릴 수 있도록.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후회하며 죽을 수 있도록.
그것이 진정한 복수였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운현. 죽어간 세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도련님이 죽었어……!”
“끝났어. 이제 다 끝났다고……!”
“가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실 리가 없다…….”
“부원장님이 그토록 아끼던 임위가 죽었으니, 우리도 죽음을 피하기 어렵겠구나!”
상관세가의 무인과 천원학관 교관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운청휘 이놈! 죽어라!”
“너와 운씨세가! 네놈과 관계된 모든 자를 죽이겠다!”
쾅쾅쾅쾅쾅쾅!
막다른 길에 몰린 여섯 무인의 기운이 동시에 폭발하며 굉음을 만들어 냈다.
슈슈슉…….
그들의 기세가 신호가 되어, 40여 개의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의 사람들이 운청휘를 죽이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도련님, 만약 도련님께서 진심으로 저놈을 거두시려거든 지금이 기회인 것 같습니다.”
돌아온 운려가 공손한 얼굴로 청년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자질도 쓸만하고, 성정도 잔인하구나. ……점점 더 마음에 드는군.”
젊은 청년이 감탄하는 눈으로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운려. 따라오너라!”
말을 마친 청년이 흑의 노인과 함께 운청휘가 있는 곳으로 날아갔다.
“너흰 이제 돌아가라! 운청휘는 이 운범의 사람이니.”
화려한 복장의 청년이 운청휘의 옆에 내려섰다.
“뭐……?”
세 무인은 물론, 교관들의 안색이 돌처럼 굳었다.
운범은 황성 운씨세가의 직계 자제이자, 차기 가주가 될 가능성이 가장 컸다. 그런 운범이 운청휘를 거두었다?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운범을 바라보았다.
“운…… 운범 공자, 운청휘가 저희 도련님을 죽였습니다. 만약 저놈을 보호하려 드신다면, 그우리 상관세가를 적으로 돌리시는 것입니다. 진정 그렇게 할 것입니까?”
상관세가의 무인 하나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운범의 신분이 높아서만은 아니었다.
운범은 겨우 스물이 넘은 나이에 월경 5단계에 올라섰으니, 자질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농담이 심하군. 임위는 고작 상관세가의 데릴사위가 아니더냐? 진정 상관세가가 고작 데릴사위를 위해 본 공자와 싸우려 할 것 같으냐?”
운범은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머금었다.
“상관세가의 데릴사위라는 신분이 모자라면, 천원학관 부원장의 직전 제자 신분을 더하면 어떻소?”
천원학관의 교관들이 앞으로 나서며 끼어들었다.
평소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운범과 맞서지 않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대로 돌아가면 부원장이 자신들을 살려두지 않을 터였다. 어떻게 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운청휘라도 죽이고 가야 했다.
그 결정에는 운청휘를 죽여 임위의 복수를 했다는 명분으로 부원장의 용서를 받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섞여 있었다.
“그건 임위가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다. 가규(賈奎)가 죽은 제자를 위해 본 공자를 난처하게 할 성싶으냐?”
운범이 냉소를 지었다.
가규(賈奎), 천원학관 부원장의 이름이었다.
“본 공자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도록. 자, 선택해라! 죽겠느냐, 도망가서 목숨을 부지하겠느냐?”
운범이 위협하듯 말했다.
그의 뒤에서 냉소를 지은 운려가 그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운범의 말 한마디면, 당장이라도 그들을 압살할 태세였다.
“이걸 어찌해야…….”
운범의 위협 앞에서, 상관세가의 무인들과 천원학관의 교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운범의 신분, 실력 모두 우리보다 훨씬 위에 있소. 그가 운청휘를 보호하려 든다면 우리에게 기회는 없소.”
“운범만으로도 우리는 죽은 목숨인데, 운려도 함께 있지 않소……!”
“젠장, 운청휘 저 애송이 놈이 도대체 무슨 조화를 부려 운범의 눈에 든 것이야?”
분하다 못해 속에서 불이 일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돌아갈 채비를 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막 떠나려 할 때, 불만에 가득 찬 운청휘의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너는 누구지? 내가 네 사람이라니, 네게 그럴 자격이 있다고 보느냐?”
운청휘의 말에 사람들은 멍하니 눈만 깜박였다. 정적이 흘렀다.
곧 힉 하고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가 나더니,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저놈이 드디어 미친 모양이야. 감히 황성 운씨세가 직계 자제를 모욕하다니!”
“하하하……! 운범이 아니면 대체 누가 자격이 있단 거야? 게다가 운청휘의 체면까지 살려줬잖나! 개가 아니라 자신의 사람이라 했어!”
“쯧, 이렇게까지 주제를 모르는 놈은 처음 보는군!”
“차라리 잘됐어, 운범을 자극했으니 이제 우리가 죽이려고 해도 운청휘를 보호하려 들지 않겠군.”
“크큭.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어. 운범에게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운범은 성격이 음흉하고 손속이 지독해, 그리고 자신에게 무례한 자를 가장 싫어하지. 운청휘가 아니라 황성 본가의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무례하게 군다면…… 죽는 길밖에 없어!”
과연, 운범의 얼굴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몸 주변에서 냉기가 피어올랐다. 명백한 살의를 담은 기운이었다.
주위에 있던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의 사람들이 그 기운에 살짝 진저리를 쳤다.
“도련님. 허락해주십시오. 노부가 저 무례한 방계 놈을 처리하겠습니다!”
운범의 뒤에 서 있던 운려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운범은 그를 외면한 채 운청휘를 바라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운청휘, 지금 누구랑 말하고 있는 건지 알고 있느냐?”
운청휘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모르겠군. 얼마나 대단한 분이기에 그러지?”
운범이 천우성에 온 건 며칠 전의 일이고, 그동안 흉수산맥에 있던 운청휘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천우성의 운씨세가 사람들은 운청휘에게 본가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으니, 운청휘가 그들을 알 리가 없었다.
안다고 해도, 깍듯이 대할 운청휘는 아니었다.
“내가 누군지 몰라?”
운범이 의아해하며 풀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례한 것도 이해가 되는군.”
그리고는 머리를 돌려 운려를 바라보았다.
“운려. 네가 저 녀석에게 본 공자가 누군지 말해주거라.”
운려가 머리를 끄덕이며 시선을 운청휘에게로 옮겼다.
“운청휘, 황성의 사대 가문은 들어봤겠지! 상관세가, 엽씨세가, 구양세가, 그리고 운씨세가! 황실 다음가는 이 세가들에는 무수히 많은 방계 세가가 존재한다. 네가 속한 천우성 운씨세가가 바로 황성 본가의 방계다. 지금 네 앞에 있는 이분이 바로 본가의 직계 자제이자, 현 가주님의 손자이신 운범 도련님이시다!”
운려가 운청휘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그러자 상관세가와 천원학관 사람들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운범을 자극하고도 운청휘에게는 또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그들로서는 눈앞의 기회가 다시 한 번 날아간 셈이다.
“젠장. 저놈이 아직 죽을 때가 아니라는 건가?”
“원통하구나, 저놈이 임위를 죽여 우리도 이제 무사하지 못하게 됐거늘, 이제는 저놈을 죽이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됐으니!”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의 사람들 모두가 분하다는 듯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알아야 할 건 운려가 모두 알려준 것 같으니 이젠 본 공자가 누군지 알겠느냐?”
운범이 다시 시선을 운청휘에게로 옮기며 물었다.
“본 공자에게 무례를 범한 자는 죽여 마땅하지만, 네놈의 자질을 높이 사 이번 한 번만은 살려 주지. 그러나,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운범이 마지막 말꼬리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지?”
운청휘가 어깨를 으쓱하며 그 말을 받았다.
“운청휘, 노부가 미리 말하지. 마음의 준비를 해라. 도련님의 말씀을 듣고 감격해 죽을 수도 있으니.”
흑의 노인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지금부터 도련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에게 있어서 크나큰 기회다. 토계(土雞)가 봉황이 될 수 있는 기회 말이다.”
운려의 말에 상관세가와 천원학관 사람들은 무엇인가 알아차린 듯 어둡던 얼굴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운범이 운청휘를 무시로 삼으려 하는 모양이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운범의 무시라면 영광이 따로 없지…….”
어느새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의 사람들이 운청휘를 바라보는 시선에 부러움과 질투가 뒤섞였다.
토계가 봉황이 된다.
날지도 못하는 닭이 봉황이 되어 찬란한 날개를 펼치듯, 운청휘에게는 탄탄한 앞날이 보장된다는 뜻이었다.
운범의 무시가 된다면, 누구도 운청휘를 얕볼 수 없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운청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상관세가와 천원학관의 사람들이 속삭이는 말을 들었지만, 운청휘는 별다른 반응 없이 운범을 응시했다.
“그전에, 말해 둬야겠군. 첫째, 너의 자질은 나쁘지 않으나 고작 그 정도다. 자질을 믿고 주제넘은 짓을 벌이진 말도록. 본 공자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주제를 모르는 것들이다. 둘째, 너는 아주 방자하구나. 그 태도를 바로잡아라. 만약 본 공자에게 한마디의 말, 한 번의 눈빛이라도 실수한다면 그 자리에서 시체로 만들어 주마!”
운범이 오만한 자태로 운청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뭔가를 전하라는 듯 운려를 바라보았다.
운려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도련님의 말씀은 저분의 개가 되면 평생 개의 태도를 유지하라는 뜻이다. 물라고 해야 물 수 있다. 만약 짖지 말라고 한다면 너는 소리를 낼 자격도 없다. 개는 충심을 다해 주인을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주인의 말만 들어야 하고 개가 될 각오를 늘 명심해야 한다.”
운려의 말이 끝나자 운범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 말을 머릿속에 새겨 두도록. 좋아. 본 공자가 여기서 선포한다. 오늘부터 너 운청휘는 본 공자 운범의 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