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호효묵, 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설아라고 부르지 마요!”
능설의 말처럼, 그녀는 호효묵을 제대로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어떤 사람인지 신경 쓸 이유나 있을까! 능설은 곧바로 운청휘에게 다가갔다.
“운 사형, 오늘은 못 뵙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친히 와 주시다뇨!”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능설의 얼굴에 은은한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
“수련은 어떻게 되어가지?”
운청휘가 입을 열었다.
“며칠 동안 줄곧 천녀…….”
능설이 들떠 말을 늘어놓다 황급히 멈추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운 사형. 마침 어려운 부분이 있었어요. 부디 제 숙소에서 운 사형의 가르침을 받아도 될까요?”
운청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신식을 펼쳐 능설의 수련 진도를 알아낸 후였지만, 그의 예상을 조금 벗어나는 점이 있었다.
능설은 진심으로 수련에 정진했고, 수련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체내의 원기가 제각기 다르게 흐르고 있었다. 일정하지 않은 원기의 흐름이라니.
운청휘로서도 조금은 손을 볼 필요가 있었다.
“설아야, 수련에 문제가 있다면, 나에게 얘기해. 얼마든지 알려줄게!”
호효묵이 급히 나섰다.
“괜찮아요. 나의 수련 문제는 오직 운 사형만이 도와줄 수 있거든요!”
능설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리고, 나를 설아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아, 알았어. 능설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호효묵이 마지못해 대답하며 운청휘를 휙 돌아보았다. 능설에게 매달리기 급급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겨울의 마른 나무처럼 삭막한 표정만이 떠올라 있었다.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나누지 못했군. 무엇보다 당신의 무위가 어느 수준이길래, 설의 수련을 돕는지도 알고 싶은데?”
운청휘가 그를 무시하고 능설을 바라봤다.
“숙소로 안내하도록.”
“네, 지금 가요!”
능설이 얼른 운청휘의 팔을 잡았다.
“능설 사매…….”
그때 소도도가 능설을 향해 한쪽 팔을 살짝 치켜올렸는데,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하…….”
소도도의 모습을 보고 능설은 방긋 웃으며 소도도와 팔짱을 꼈다.
“감히 나를 무시해?”
호효묵의 음침한 소리가 그들의 발목을 붙들었다.
“내가 언제 가도 좋다고 했지?”
“음?”
운청휘와 소도도가 거의 동시에 호효묵을 바라봤다.
“네놈들이 어디서 온 조무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호효묵 사형의 존함도 모르는 게냐! 무례를 계속 저지르니, 친히 말해 주지! 호효묵 사형은 작년 내원 대항전 서열 7위에 오른 강자이시다!”
호효묵을 따르던 이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엇보다 호효묵 사형의 배경은 네놈들이 꿈도 꿀 수 없겠지! 우리 성공학관의 손 부원장님이 호효묵 사형의 외조부님이시지!”
“운 사형, 그의 말이 맞아요. 호효묵은 확실히 손 부원장의 외손자예요.”
능설도 운청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운 사형, 나서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 일은 제가 해결할게요.”
능설이 얼른 나서며 운청휘를 제지했다. 그녀는 운청휘가 낭야산에서 월경 6단계의 교관들을 무참히 처리한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호효묵이 아무리 특별한 신분이라 한들, 운청휘의 상대가 될 수는 없다. 만약 그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손 부원장의 원한을 사고 만다.
“그러지.”
운청휘는 능설의 호의를 무시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호효묵, 우릴 보내 줘요!”
능설이 호효묵을 보며 말했다.
“너는 몰라도, 저들은 안 된다. 만약 너와 어떤 접촉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면 생각해 보겠지만.”
호효묵은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호효묵, 도가 지나쳐. 내가 누구와 만나든 왜 간섭하는데?”
능설이 조금 화가 나서 말했다.
“그래, 네게 간섭할 처지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은 얼마든지 간섭할 수 있지!”
호효묵이 살기를 드러내며 운청휘와 소도도를 바라봤다.
“네놈들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지. 하나, 얌전히 능설을 떠나고 이후 능설과 어떤 만남도 가지지 않는 것. 또 하나. 계속 방자하게 굴도록. 그럼 여기서 네놈 둘을 죽이겠다.”
“호효묵, 어찌!”
분을 못 이긴 능설이 소리쳤다.
“하하하, 무명소졸 두 명을 죽이는 게 문제가 되겠냐! 자, 이제 네놈들의 선택을 말해라!”
호효묵은 이미 인내심을 잃었다.
“호효묵,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그만둬! 계속 이렇게 나오면 너도 무사하지 못해!”
능설이 애타게 소리쳤다.
“하하하, 당치도 않은 소리! 네가 날 죽이려고? 아니면 널 돌보는 정 부원장이? 과연 내 외조부님이 보고만 계실까?”
호효묵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네놈의 외조부 따위가?”
운청휘가 마침내 입을 열고, 호효묵 쪽으로 걸어갔다.
“뭐라?”
호효묵이 매서운 눈초리로 운청휘를 노려보았다. 모든 인내심이 운청휘의 그 한마디에 폭발했다.
“감히 외조부님을 모욕해? 이젠 능설과는 관계없다. 네놈을 죽여주마!”
쾅!
호효묵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 비록 동일한 월경 4단계이지만, 한일도보다 두 배는 맹렬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의 외조부가 성공학관의 부원장이니, 한일도보다 높은 수준의 무공을 수련했을 터. 강한 힘을 내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호효묵의 주먹은 운청휘를 치기는커녕, 단번에 운청휘의 손아귀에 붙들리고 말았다.
와드득!
운청휘가 손에 살짝 힘을 주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아……!”
호효묵이 비명을 지르더니 경악한 얼굴로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어…… 어떻게 내 주먹을 잡아낸 거지?”
“간단하다. 네놈이 약하니까.”
지켜보던 소도도가 불쑥 끼어들었다.
“월경 4단계의 어설픈 무위쯤은 내 형제가 한 손가락으로 찍어 누르고도 남을 걸세!”
“멈춰라!”
“무례하군, 어서 호효묵 사형을 놔줘!”
“저 자식이 살기 싫은 모양이구나. 감히 부원장의 외손자에게 상처를 입히다니!”
호효묵의 일행들이 모두 노하며 소리쳤다.
“주인에게 충심이 깊은 번견들이야.”
운청휘가 그들을 힐끗 보더니 맹렬한 기운이 담긴 영기를 발산했다.
펑! 펑! 펑!
월경 3단계인 무인이라도, 운청휘가 쏘아 보낸 영기 앞에서 무사할 턱이 없었다. 세 명은 몇 십 장을 밀려 나가 그대로 처박히며 정신을 잃었다.
“이 자식, 놓지 못 해? 외조부님이 알게 되시면, 학관 어디에도 발을 붙이지 못할 거다! 어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란 말이다!”
운청휘의 무위에 호효묵은 다소 놀랐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뒤에 든든한 외조부이자 부원장이 버티고 있지 않은가!
“컥……!”
호효묵의 목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두 다리에 기운이 직격했고, 그는 휘청거리다 무릎을 꿇었다.
“용서를 구했다면, 살려줄 수도 있었겠지만, 애석하군. 감히 나를 위협하다니. 이 몸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저질러 놓고 무사하리라 생각한 건가?”
운청휘는 담담한 얼굴로 호효묵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에 서린 위엄이 형장의 사형수를 내려다보는 왕을 연상케 했다.
왕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면, 사형수는 곧바로 목이 날아가는 처지.
지금의 호효묵이 바로 그 사형수고, 운청휘는 그의 생사를 결정지을 왕이다.
운청휘가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호효묵의 미간에 하나의 구멍이 뚫렸다. 맞은편까지 훤하게 내다보일 정도로, 완벽하게 관통된 구멍이었다.
운청휘가 몸을 돌리자마자 호효묵의 몸이 뒤로 무너져 내렸다.
“운 사형, 호…… 호효묵을 죽이시다뇨!”
능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걱정하지 말도록. 뒷수습을 할 이가 곧 올 것이다.”
운청휘가 능설을 안심시키며 말을 이었다.
“우선 이곳을 벗어나야겠군. 네 수련을 봐주겠다고 했으니, 그 말을 지켜야겠다.”
운청휘 일행이 떠나고 반 시진이 흐른 뒤.
학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탑 앞에서 공휘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원장님, 반 시진 전에 운청휘가…… 손불평(孙不平)의 외손자 호효묵을 죽였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공휘의 표정은 씁쓸함에 잠겨 있었다. 그가 보고를 이어갔다.
“소도도도 한석범(韩锡范)의 손자 한일도를……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탑에서 소리가 들렸다.
“본좌의 기억대로라면, 오늘은 외원의 대항전이 끝나는 날이자 내원 대항전 개막 전날이 아니던가.”
“그렇습니다, 원장님!”
공손히 대답한 공휘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들의 뒤를 봐주기로 약속했지만…… 점점 도가 지나칩니다!”
공휘의 불만도 일리가 있었다.
손불평은 그와 마찬가지로 성공학관의 부원장 중 한 명이며, 한석범은 월경 9단계의 상급 교관이다.
고위층에 속하는 이들 중 한 명은 외손자를 잃었고, 한 명은 손자가 불구가 되었으니 후환이 염려될 수밖에 없었다.
“일은 잘 처리해 두었는가?”
탑 위에서 들려온 소리가 물었다.
“일단 수습해 두었습니다.”
공휘가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다만 한석범은 괜찮은데, 손불평 쪽은…… 오래는 속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손불평이 언제 돌아온다고 하던가?”
“늦어도 보름은 걸릴 듯합니다.”
“그럼 보름만 속이고 때가 되면 본좌가 친히 손불평을 찾아가겠다.”
탑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본좌가 연단협회에 다녀왔다. 운청휘는 그들과 연관이 없더군. 그러니 어떻게든 운청휘와 소도도를, 특히 운청휘를 제대로 보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