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공휘에게 지시를 내린 목소리는 이내 혼잣말을 읊조렸다.
“본좌가 사람을 잘못 본 적이 없거늘……. 운청휘의 품격과 성장 속도는 우리의 선조와 너무나 흡사하구나.”
탑 꼭대기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원장의 옆에는 고서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풍무극광지(风无极光志)』.
3천 년 전 누군가가 풍무극광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를 기록해 엮어 둔 책이었다.
* * *
한 시진 후.
운청휘와 소도도는 능설의 숙소를 떠났다. 한 시진 내내 운청휘는 능설의 수련을 살피고 모든 문제를 알려 주었다.
기재 반으로 돌아오는 그들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운 형제, 이러다간 큰일 나겠네!”
소도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상관우의 수법이 제법이군. 계속해서 우리를 함정으로 이끌지 않나?”
“처음에는 한일도. 그다음은 호효묵! 한일도의 배경은 잘 모르겠지만, 호효묵은 손불평이라는 얼간이를 외조부로 두었다지? 쯧, 어느 쪽이든 골치 아프게 되었네그려.”
운청휘가 작은 고갯짓으로 동조의 뜻을 내비쳤다.
적은 음지에 있다는 말이 있다. 소도도와 운청휘가 바로 그런 상황이다.
한일도, 미아, 호효묵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출현이 우연처럼 보여도 누군가가 만들어 낸 듯했다.
운청휘와 소도도는 훤히 노출되어 있지만, 배후에서 그들을 함정으로 몰아넣는 이는 완벽히 몸을 숨기고 있지 않은가.
“적이 숨어있고, 우리가 노출되었다 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우리의 담력에 달려 있을 뿐!”
운청휘가 추가 말했다.
“운 형제, 자…… 자네 설마 준비를……?”
운청휘의 뜻을 알아차린 소도도가 망설임과 걱정을 드러내었지만, 곧 둘 다 웃음을 터트렸다.
***
이 각 후. 운청휘와 소도도는 기재 반의 황무지로 돌아왔다.
“운 형제, 이렇게 생각해보세. 적이 숨어있다면……, 그들을 양지로 끌어내면 그만 아닌가?”
소도도가 흥분한 눈빛으로 독채를 바라보았다.
“그 방법도 좋군.”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헤헤, 이번엔 내 차례군!”
소도도가 입술을 핥고는 냉큼 독채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운청휘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세 채의 독채 중 가운데에서 걸음을 멈췄다.
“응? 소도도와 운청휘가 뭐 하려는 거지?”
“독채는 기재 반에서도 상관우와 운해, 엽천 외에는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잖아!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거야?”
“누가 알겠어, 상관우에게 굴복하러 가는 건지도 몰라.”
“굴복한다고? 헤헤, 강직한 줄 알았는데, 절대적인 실력 앞에 결국 고개를 숙이나 보네!”
네 명의 장원 생도와 9명의 천막 생도가 각자의 거주지에서 나왔다.
다들 기대하는 눈빛으로 운청휘와 소도도 쪽을 보고 있었다.
“운 형제, 우리가 이곳에 굴복하러 왔다고 누가 그런 거 같은데.”
소도도가 입을 열었다.
“뭐, 예전엔 운해 놈에게 굴복하긴 했지. 그래서 줄곧 꼬리를 내리고 지냈다네. 다만 이번에는, 흥! 상관우, 운해, 엽천 모두 이 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참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네!”
영력이 실린 소도도의 외침이 기재 반의 황무지 전체를 흔들었다.
호수 바닥에서 사는 빙백사마저도 놀라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빙백사의 가는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들은 여기 없다만.”
운청휘가 말했다.
“헤헤, 알고 있어서 큰소리 좀 쳐 봤다네.”
소도도가 웃으며 속삭였다가, 곧 독채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이 몸이 열을 셀 테니, 그 안에 튀어나오게나. 다 세고도 꾸물거리면 이 몸이 여기를 폐허로 만들어도 원망은 마시고!”
소도도가 말을 마치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열! 아홉! 여덟!”
이 장면을 지켜보던 기재 반 생도들이 모두 멍해졌다.
“굴복하러 간 게 아니었어?!”
“나도 그런 줄 알았어!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누가 말 좀 해 줘!”
“미친 거 아냐? 심지어 참회하라니,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다섯! 넷! 셋!”
셋까지 센 소도도가 갑자기 고함을 내질렀다.
“정녕 멍청한 게 맞구만! 아직 둘을 더 셀 수 있으이! 그래도 나오지 않으면, 이 몸이 쳐들어가지!”
“대담하구나!”
“건방져!”
여러 목소리가 들리며 독채들에서 각각 세 명의 아리따운 여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소도도, 간이 부었구나! 감히 소가주님을 모욕하다니!”
“소도도, 운청휘, 무릎을 꿇고 죄를 인정하거라!”
“하찮은 놈들이 감히 성도를 모욕해? 용서를 구하는 게 좋을 거다!”
아홉 여종은 하나같이 성을 내며 운청휘와 소도도를 노려보았다.
“역시나 그 주인에 그 하인이라더니!”
소도도는 그들을 얕잡아보는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어서 주인이나 불러라. 이 몸이 하나하나 입을 때려 줄 생각이니까!”
“대담하구나!”
“건방지구나!”
그들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천민이 제왕의 위엄을 깎아내렸다는 듯, 비난하는 어조였다.
“어휴, 자네들은 너무 재미없구만. 욕도 제대로 못 하면서 똑같은 말만 하니, 지루해서 이 몸이 먼저 죽겠네.”
실망한 소도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원래 그는 수백 번이라도 욕설을 퍼부어 후련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데다 말이 안 통하니, 흥이 식어 버린 소도도가 탄식만 내뱉었다.
“인생이 이리도 쓸쓸하단 말인가……. 되었네. 다 꺼지게나!”
소도도가 여종들을 재촉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너무 건방져. 우리가 처벌하자!”
“맞아, 소가주님이 안 계시면, 우리가 대신하는 거니까!”
성도 간의 경쟁으로, 아랫사람들의 관계도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다. 세 진영으로 나뉜 여종들이었지만, 이때만큼은 협력하기로 합의를 마쳤다.
후우우우……!
아홉 개의 신형이 동시에 흩어졌다.
그들은 절대 헛으로 성도의 여종이 된 게 아니다. 각자의 천부적 재능은 기재 반의 생도들과 견줄 수 있었다.
무위가 가장 낮은 이도 월경 5단계였으며, 가장 높은 둘은 월경 7단계의 무인이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라니!”
“말도 안 돼! 저 여종들이 이렇게나 대단했다니!”
“장원에 사는 우리도 저렇게 빠르지 않건만!”
그들의 움직임에 기재 반의 생도들이 기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특히 천막에서 거주하는 몇몇 생도들의 표정이 심각했는데, 여종들의 무위가 그들보다 더 높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운청휘와 소도도는 끝장이구만!”
“헤헤, 운청휘와 소도도는 이제 후회뿐이겠지. 상관우나 운해, 엽천의 얼굴도 못 보겠는데?”
“죽어도 싸, 겁도 없이 독채에 사는 이들을 건드렸으니까.”
“하하하, 맞아. 정말 살고 싶지 않은 거야!”
운청휘와 소도도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소도도는 역시나, 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추측이 맞았으이. 저 몸종들은 가문에서 그들을 위해 고른 자들일세!”
상관우는 황성 상관가(皇城上官家).
엽천은 황성 엽가(皇城叶家).
운해는 황성 운가(皇城云家).
세 가문 모두 황성 4대 가문에 속해 있었다.
“뭐, 아무리 강한들 결국 몸종일 뿐이지. 상관우 등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
소도도가 낮게 말하더니 손뼉을 가볍게 쳤다.
그 후 소도도는 장난을 꾸미는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손에서부터 충격파가 일었다. 소도도가 높이 쏘아낸 영력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콰르릉!
아홉 여종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 거대한 손이 떠 있었다.
소도도는 여종들의 목숨을 거두진 않았지만, 대신 그 한 방으로 중상을 입혔다.
소도도는 멈추지 않고 영력으로 만들어 낸 손바닥을 내리쳤고, 콰르릉! 독채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두 번의 공격은 눈 깜짝할 새에 마무리되었다. 기재 반의 생도들이 넋을 잃고 소도도를 응시했다.
“저게 그 천막에 사는 소도도란 말인가……!”
“겨우 두 수로 저런 위력이라니. 장원에 사는 우리들이 함께 덤벼도 바로 죽는 거잖아……!”
“소도도가 감히 상관우 등을 건드린 게 아니였어. 실력이 있으니까 그런 것이군.”
“거기에 운청휘까지 있으니, 기재 반의 구도가 바뀔 거야!”
기재 반 생도들의 경악을 뒤로하고, 소도도는 운청휘를 남은 독채로 끌고 갔다. 그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하나의 독채만 남겨두었다.
거의 같은 시각, 학관에 은밀하게 자리 잡은 18층 탑 위에서 원장이 눈을 부릅떴다.
“빙백사, 저들을 제지하지 말고, 더욱더 날뛰게 하게나. 소도도가 본성을 드러내는 건 나쁜 일이 아닐세. 특히 수련 면에서!”
운청휘를 상관우의 방에 밀어 넣은 소도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운 형제! 바, 방금 극복해낸 것 같네! 수련은 역시 내 마음대로 하는 거였어. 요 몇 년간 수련 속도가 달팽이처럼 느려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지 뭔가! 하지만 내 마음대로 휘두르니 월경 5단계가 코앞일세!”
말을 마친 소도도는 번개같이 몸을 움직여 운해의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파괴한 독채는 엽천의 거주 구역이었다.
독채에 들어간 소도도는 밤새도록 분투했다. 월경 5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실마리가 드디어 보였으니, 멈출 수 없었다.
다만 그는 운청휘 또한 밤을 새워가며 신식을 펼쳐 그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소도도는 상쾌한 얼굴로 문을 열고 나왔다.
어제만 해도 건들거리며 가벼운 느낌을 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여전히 건들거리긴 해도 강자의 패기가 느껴졌다.
“운 형제, 하하하……!”
소도도는 유쾌하게 폭소를 터트리며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마침내 도달했다네! 반년 넘게 정체된 경지를, 드디어 뛰어넘었어! 하하하! 이대로라면 단숨에 월경 6단계로 갈 수 있다는 예감이 드네!”
여기까지 말하고 소도도는 조금 아쉬워했다.
“그래도 오늘 대항전이 시작되니, 일단 수련은 중단하고…….”
운청휘와 소도도는 기재 반을 떠나 내원의 ‘천무장(天武场)’으로 향했다.
천무장.
외원의 대항전이 평범한 연무장에서 치러지는 것과 달리, 내원의 대항전이 열리는 다른 곳과 비교도 되지 않는 규모를 지닌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