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노가주님!”
천수혈도 운몽이 갑자기 나타난 노인의 뒤로 공손히 물러섰다.
“운상(云殇), 주인을 보고도 인사를 하지 않는 게냐?”
운해가 한없이 거만한 표정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노인, 운상은 50년 전 황성 운가에 무시로 들어갔던 운청휘의 조부다.
“노부 운상은 이미 허리를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니, 더 이상 주인 따위는 없다네.”
운상은 평온한 표정으로 운해를 마주 보았다.
“경솔하게도 연단협회의 사면령을 떼었군. 무슨 속셈인가? 설마 연단협회와 척을 지려 하는가?”
운상은 이번엔 보상봉을 바라보며 그의 의중을 떠보고 있었다.
“노부를 부른 게냐?”
보상봉의 눈에 언짢은 기색이 스쳤다. 그가 비록 나이는 운상과 비슷해도, 무위와 신분은 운상과 비교도 되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건방진 놈! 연단협회의 보 장로를 감히 부를 자격이나 있느냐? 어서 무릎을 꿇고 빌며 잘못을 인정하 거라!”
보상봉을 대신해, 운해가 버럭 호통을 쳤다. 순식간에 그에게서 쏟아지는 기세가 운상의 온 몸을 내리눌렀다.
털썩!
운해의 기세에 밀린 운상은 두 발의 통제력을 잃었다. 어느새 그는 땅에 무릎을 꿇은 채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우…… 운해여, 자네의 기세가 이리도 공포스러웠던가?”
운상이 흔들리는 눈으로 운해를 올려다보았다.
“노가주님……!”
운몽이 곧바로 운상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그는 한 걸음 내디딘 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날아가고 말았다.
“하찮은 월경의 땅강아지가 본 공자의 기세에 도전하려는 거냐?”
운몽이 공중에 피를 흩뿌렸지만, 운해는 볼 가치도 없다는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 월경 무인들로 이루어진 천 명의 대열이 있었다.
운해가 그들을 향해 준엄한 명령을 내렸다.
“천우성 운가의 모든 일원을 잡아들여라! 반항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이도록!”
* * *
전속력으로 이동한 운청휘는 한 시진 반 만에 낭야산 자락에 접어들었다.
기령이 알려 준 위치는 낭야산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운청휘는 쉬지 않고 발걸음을 재촉해 천여 리 깊숙한 지점까지 향했다.
귓가에 격렬한 충돌음이 들려왔다. 굉음과 함께 짙은 연기가 먼 하늘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야옹, 야오옹…….”
기령의 허약한 소리가 운청휘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괜찮느냐? 조금 늦고 말았군.”
낮은 목소리로 답한 운청휘의 신형이 공기 중에 흩어지며, 그는 전투가 일어나는 장소로 돌진했다.
“하하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를 기다리려고, 그리 질질 끌었느냐?”
어딘가 가벼운 느낌을 주는 노인이 건들거리며 히죽거렸다.
“어? 애송이도 뭔가 이상하군. 무위를 알 수가 없잖아?”
노인이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아, 한꺼번에 해결하지…….”
노인의 혼잣말이 끝난 순간, 노인의 몸이 강맹한 기세를 쏘아 올렸다.
“토기, 대지의 보루!”
노인이 손을 흔들자 대지가 거세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대지가 토해낸 진흙이 솟아올라 두꺼운 담을 형성했다.
운청휘와 이염죽, 기령은 피할 틈도 없이 흙담에 둘러싸였다.
흙담의 두께는 고작해야 일 장 정도로, 성경 무인이라면 주먹 한 방으로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운청휘 일행은 진중한 눈빛으로 담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순히 흙을 쌓아 만든 벽이 아니다.
오행의 힘, 그중에서도 토 속성의 힘이 강하게 담겨 있다.
“파훼법은 있나?”
순백의 도포를 입은 이염죽이 운청휘의 옆으로 다가왔다.
“야옹야옹…….”
기령은 운청휘의 어깨 위에 올라갔고, 힘이 완전히 빠진 듯 축 늘어졌다.
“고생했구나.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고 쉬거라.”
운청휘가 기령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가 말하는 ‘우리’는 이염죽을 포함하고 있었다.
“내가 그를 잡아 두면, 네가 그를 죽일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느냐?”
운청휘가 이염죽을 향해 말했다.
“일 할이야!”
이염죽은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육진은 진짜 선천생령이야. 오행의 힘으로 몸을 보호할 수 있지. 지금 우리는 선천보다 아래이니, 신병이기(神兵利器)가 있어도 그의 방비를 뚫을 수 없어.”
“겨우 일 할이라고?”
운청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
“내가 그를 잠시 잡아 두면 가능성이 얼마나 커지지?”
“두 호흡!”
이염죽이 곧바로 대답했다.
“당신이 두 호흡 내에 그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 죽일 수 있어!”
“……해 보지.”
운청휘의 신형은 이미 육진에게 향했다. 그의 뒤로 영력의 화살이 무수히 떠올라 온 하늘을 뒤덮었다.
쐐애액!
곧, 모든 화살이 육진을 향해 쇄도했다.
“선천지경의 반 정도 되는 공격 수단이군……!”
육진이 가소롭다는 듯 중얼거리며 생각만으로 허공에 반투명한 막을 만들어 냈다.
운청휘가 영력을 끌어올려 만드는 막과는 달리, 흙 속성의 오행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방패였다.
캉! 카각! 카아앙!
예리한 화살들이 일제히 방패에 부딪히며 거센 충돌음을 일으켰다. 화살 하나하나에 담긴 힘은 작은 산맥을 평지로 만들기 충분했지만……, 10만 개가 넘는 화살 중 단 하나도 방패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후배, 선천의 아래는 모두 땅강아지나 다름없지. 노부의 눈에는 너희가 보잘것없는 범인으로 보일 뿐이라네.”
육진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노부가 움직이지 않고 공격할 기회를 주어도, 노부의 머리카락 한 가닥도 건드리지 못하는구먼.”
“그래, 정말로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구나. 이러한 허풍은 처음 들어 보는군.”
운청휘도 냉랭하게 받아쳤다.
“후배, 격장지계를 쓴다는 걸 노부가 알고 있지만……, 어디 마음대로 지껄이거라! 노부는 이제 움직이지 않을 테니, 마음껏 덤비도록!”
육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더니, 아무런 방어 태세도 취하지 않고 건들거리고 있었다.
“허풍만큼이나 실력도 대단한지 확인해야겠군.”
운청휘가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두르자, 허공에 영력으로 형성된 한 자루의 검이 떠올랐다.
검을 쥔 운청휘가 휘몰아치는 바람처럼 육진에게 맹렬히 날아들었다.
캉! 카앙!
검은 분명 육진을 베었건만, 마치 철 덩이를 내리친 듯 자잘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펑펑펑……!
일격에 실패한 운청휘는 수백 번이 넘게 검을 휘둘렀고, 매번 바위가 부딪치는 듯한 굉음이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하하하, 후배여, 노부는 오행의 힘으로 몸을 보호하니, 절대 후배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네!”
육진은 운청휘의 검에 몇 번을 베이고도 호쾌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단 말이지.”
운청휘는 수긍한 듯 중얼거리더니, 별안간 눈을 부릅떴다.
“그럼,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라!”
육진은 순간 간담이 서늘했다. 그 짧은 순간에…… 운청휘에게서 죽음의 기운을 느꼈다!
“좋지 않아, 이 녀석 숨겨진 한 수가 있었군……!”
육진은 거의 반사적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운청휘는 그가 피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곧바로 빈 검집을 손에 들었다.
육진은 한눈에 검집을 알아보았다.
영력으로 만들어 낸 무기가 아니라, 등에 짊어지고 있던 빈 검집이다.
그가 운청휘에게서 느꼈던 죽음의 기운은, 바로 저 검집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약간의 오행만으로도 힘을 쓰지 못하다니…… 네놈이야말로 영원한 범인이로구나!”
운청휘가 탄식하듯 중얼거리는 동시에, 거침없이 손을 휘둘렀다. 참천검의 검집이 육진의 왼팔을 스쳐 지나갔다.
슈악!
육진의 왼팔은 허무하리만치 가볍게 잘려 나가, 그대로 추락했다.
“아……!”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육진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애송이, 감히 노부를 속이다니……!”
육진의 분노가 뒤따르며 운청휘를 향해 일장을 휘둘렀다.
운청휘는 공격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검집을 가로로 뉘어 내밀고 몸을 보호했다.
콰아앙!
대지를 뒤흔드는 대폭발의 반동으로, 운청휘는 그대로 뒤로 날려갔다.
운청휘는 급히 몸을 돌려, 하늘을 가르는 유성처럼 육진에게 쇄도했다.
다시, 빛이 작열하는 태양처럼 번쩍였다.
우르릉……!
굉음과 함께, 운청휘의 몸은 훌쩍 날아가 흙담에 강하게 처박혔다.
몸 안의 기운이 극도로 뒤엉키며 끓어오르는 듯했다. 운청휘가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허공에 진홍색 비를 뿌렸다.
“내 몫은 다했으니…… 나머지는 네게 맡겨 두지!”
운청휘는 피로 얼룩진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스럽게 이염죽에게 시선을 보냈다.
어느새 이염죽은 허공에 떠올라 묵빛 장궁의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짙은 묵빛의 화살이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에서 몸부림치다 이내 허공을 갈랐다.
그 궤적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게 날아간 화살은 육진의 왼쪽 가슴에 그대로 꽂혔다.
육진의 눈이 절로 부릅떠졌다.
“노부가 오행의 힘으로 몸을 보호하는데 두 번이나 비천한 범인에게 당하다니!”
육진이 반격하기 전에, 이염죽이 다시 한 번 활시위를 당겼다. 그녀가 줄을 튕기는 순간, 묵빛 화살은 이미 육진의 미간을 관통한 후였다.
“냐아아아……!”
기령이 놀란 표정으로 운청휘를 바라봤다.
“놀랐느냐? 검집으로 육진의 팔을 잘라내고, 두 호흡의 시간 동안 그의 주의를 끌었으니 이염죽의 화살이 통했지, 이염죽의 화살만으로는 육진을 감싼 방패를 깨트릴 수 없지 않겠느냐.”
운청휘가 아무렇지 않게 답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콰르르르……!
육진이 미간을 관통당한 후, 흙담은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모래로 쌓은 성에 물을 끼얹은 듯 허무한 추락이 이어졌다.
그 광경에 기령과 이염죽은 천천히 긴장을 풀기 시작했으나, 별안간 운청휘가 다급하게 외쳤다.
“긴장 풀지마! 죽은 건 육진의 육신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