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육신? 설마 영변?”
지금까지 안색 한번 바뀌지 않았던 이염죽이 처음으로 동요를 드러내었다.
“육진이 영변괴였다니…….”
“괘씸한 후배군, 감히 노부의 영신을 죽이다니……, 노부가 진정 모습을 드러내면 천성대륙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게 해 주마!”
허공에서 육진의 분노한 음성이 흘러들었다.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허공이 찢겨나가며, 갈라진 틈에서 강력한 힘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이염죽이 재빠르게 틈의 반대편으로 장궁을 당겼고, 쏘아 보낸 화살에 매달렸다.
쇄애액!
순식간에 백 리나 멀어진 이염죽처럼, 운청휘 또한 참천검의 검집으로 대지를 내리쳤다.
쿠르릉!
수백 장 깊이의 구덩이가 운청휘를 집어삼켰다.
“야옹야옹!”
기령이 다급하게 울부짖었다.
몸집이 작은 기령은 흡입력을 견뎌낼 힘이 없기에 순식간에 갈라진 틈새로 휘말려 들어갔다.
“기령!”
운청휘가 외침과 동시에 신형을 날려 기령을 붙잡았다.
“감히 노부의 영신을 멸했으니 영수를 받아가겠다. 노부가 세상에 나오는 날이……, 네놈들이 죽을 날이니라!”
육진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오며, 허공의 틈에서 거대한 손이 비집고 나왔다.
누군가 영력으로 만들어 낸 손이 아니다!
거인이 틈새를 찢고 금방이라도 모습을 드러낼 듯했다.
거대한 손은 가벼운 휘두름만으로 운청휘를 날려 버렸다.
콰르릉!
수십 리 떨어진 산봉우리마저 그 여파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운청휘는 칠공에서 피를 뿜어낸 데다가 온몸의 뼈가 부서져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듯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수십 리 떨어진 허공의 틈새에 끈질기게 매달려 있었다.
운청휘를 날려 버린 거대한 손은 기령을 낚아채더니 순식간에 틈새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곧 허공의 틈도 점점 좁아지다 마침내 말끔히 지워졌다.
“군성문(群星门), 육진……! 나 운청휘가 맹세하마! 반드시 네놈들을 남김없이 멸할 것이다!”
운청휘의 포효가 산림을 떨어 울렸다.
그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놓치지 않고 본 광경, 틈새 너머로 무궁무진하게 뻗어 있던 산과 무수한 폭포들이 산봉우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도원과도 같은 그곳.
신비롭게 서린 안개 사이에 새겨진 세 글자를, 운청휘는 똑똑히 보았다. 군성문.
“푸……!”
포효를 내지른 운청휘가 분수처럼 피를 토해냈다.
자신이 내뿜은 피에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그는 몸을 돌보기보다 기령의 감지에 정신을 집중했다.
……기령의 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제노인 기령을 감지할 수 없는 경우는 세 가지뿐이다.
기령이 죽었거나, 기령의 육체가 장신연에 있어 영혼 감지가 단절될 경우.
마지막 하나는 기령과 그가 영혼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다.
기령이 죽었다면 운청휘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또한 그가 훑어본 군성문에는 영혼의 감지를 차단할 힘이 없었다.
결국 마지막 가능성만이 남았다.
“기령을 손에 넣었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정해져 있겠구나. 나의 낙인을 연화하여 기령을 항복시키는 게 목적이 아니겠느냐. 선제의 낙인은 고작 육진 따위가 연화할 수 있는 게 아니거늘.”
운청휘의 낮은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기령이 처한 위기를 생각하면, 한시가 다급했다.
“어떤 수를 써도 기령을 항복시킬 수 없을 테니…… 육진, 그자가 기령을 죽이려 들겠군!”
겉으로는 주종 관계라 하나, 운청휘는 마음속으로 기령을 형제처럼 여겼다.
설령 자신이 상처를 입더라도, 형제가 다치는 일은 참을 수 없었다.
“괜찮아?”
눈보다 희게 빛나는 옷을 입은 이염죽이 황급히 날아왔다.
“그래,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운청휘가 이염죽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했다.
“미안. 나와 연관되지 않았다면 너와 네 영수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이염죽의 눈동자에 미안함이 깃들었다.
“탓하지 않는다. 너와는 무관한 일이니. 그저 거래를 했을 뿐이 아니던가.”
운청휘는 이염죽을 탓하기는커녕 덤덤히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군성문이라는 것을 들어 보았나?”
운청휘가 물었다.
“군성문?”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염죽의 눈에 희미한 분노가 떠올랐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육진, 그자가 군성문에서 왔으니 이곳에서 마주쳤던 거였어……! 군성문은 선도 10종 중 하나로, 천성대륙을 제패할 수 있는 세력이야. 당연히 고수의 수도 많아. 육진 같은 영변괴가 열 손가락 안에 들 테고, 이건 소문이지만…… 군성문의 주인은 선계와도 소통한다고 들었어.”
이염죽이 운청휘에게 말했다.
“선계와 소통한다니, 그게 가능한가?”
자신만 해도 천성대륙과 단절된 선계에서 지내지 않았던가. 운청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어디까지나 소문이야. 난 외부인이니 구체적인 건 알 수 없으니까.”
이염죽이 말했다.
“군성문의 산문이 어디에 있는지 아나?”
운청휘가 다시 물었다.
“천성대륙의 중심 구역이라고 듣긴 했지만, 구체적인 위치까지는 모르겠어.”
이염죽이 자신이 아는 사실을 이야기하다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지금 네 전투력이라면, 나처럼 절반의 선천에 필적할 수준이겠지?”
운청휘는 이염죽이 왜 그것을 묻는지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았다. 전투력에서는 너와 비슷한 수준이다.”
담담하게 답하면서도 운청휘는 내심 의아하면서 놀라고 있었다. 겨우 3개월 만에 성경 9단계에서 월경 10단계까지 무위를 끌어올린 자신이다.
전투력도 못지않게 상승하며 절반의 선천에 필적하지 않는가.
물론 그 과정에서 청연지심화의 도움을 받았지만……. 3개월 전의 이염죽은 자신과 대등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큰 차이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놀랍게도 그녀의 무위 또한 자신과 별 차이 없는 수준으로 폭증해 있었다. 자신에겐 청연지심화가 있었다고 하나, 이염죽은 대체 무슨 수로 발전했단 말인가?
“지금의 무위로 천성대륙의 중심 구역으로 향한다면…… 쉬지 않고 가더라도 백 년 이상이 걸리겠네!”
이염죽이 단호하게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
순식간에 이틀이 지났다.
천우성 운가의 영패를 뗀 직후, 운해는 천우성 운가의 모든 일원을 사로잡았다.
작열하는 태양이 하늘을 달구는 한낮에, 천우성의 중앙 광장은 사로잡힌 사람들로 즐비했다.
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모두 줄로 묶여 일렬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운청휘의 조부인 운상, 백부 운한, 사촌 형 운현도 대열에 섞여 있었다.
천우성 성문 입구에는 피투성이가 된 노인이 묶여 있었는데, 소도도가 이 자리에 있다면 기겁했을지도 모른다.
그 노인은 다름아닌 성공학관의 부원장 공휘였으므로.
한편, 천우성에서 가장 호화롭고 규모가 큰 천보객잔(天宝客栈)은 사방에 군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파리 한 마리의 출입조차 허가하지 않을 듯한 삼엄한 기세가 객잔을 둘러쌌다.
객잔의 최상층 대청 상단에 용포를 입은 중년인이 앉아 있었고, 그의 발치에 수십 개의 그림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릎을 꿇은 이들은 하나같이 천원왕조의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황성 4대 가문인 운가와 엽가의 가주들, 가규를 비롯한 천원학관의 다섯 부원장도 있었다.
개중 가장 앞에서 무릎을 꿇은 노인은 용포를 입은 중년인 못지않은 기세를 품고 있었다.
그는 연단협회의 장로 보상봉이었다. 설령 운역 운가의 가주라고 해도 그를 무릎 꿇게 할 수는 없었건만, 이때의 보상봉은 진지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또 한 명은 성공학관의 부원장…… 손불평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 운청휘가 있었다면, 결코 담담할 수 없으리라.
용포의 중년인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마종의 기운을 품고 있었으니까!
4급 마종부터 시작하여 1급 마종까지, 무위가 가장 약한 이도 월경 9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양경의 단계였으며, 용포의 중년인은 절반의 선천의 경지였다.
“폐하, 소신이 성공학관으로 소식을 보냈습니다. 마라의 성격이라면 두말하지 않고 천우성으로 향하겠지요!”
손불평이 무릎을 꿇고 아뢰자, 용포를 입은 중년인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그의 눈빛은 천원학관의 부원장 가규에게 향했다.
“운청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은 가규가 면목 없다는 듯 아뢰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우…… 운청휘는 아직 천우성에 도착하지 못했고, 소신 폐하께 아뢰어야 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말하라!”
용포를 입은 중년인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황성에서 오늘 아침 전해온 소식인데, 어…… 어림군 대장 몽기가 운청휘에게 죽었습니다!”
소식을 전하는 가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운청휘에게 마종을 심은 사람은 자신이다.
그 운청휘가 몽기를 죽이고 폐하의 뜻을 어겼으니, 그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었다.
이론상으로 운청휘는 마종을 심은 순간부터 그의 인형이 아니였던가.
“운해에게 전하거라. 권한을 줄 테니, 운청휘의 일가를 직접 처리하도록!”
용포를 입은 중년인은 가규의 보고를 받고도 아무런 동요 없이 지시를 내렸다.
“자네들은 절반의 무위를 짐에게 바치라!”
이윽고 그의 시선이 일곱 사람을 천천히 스쳤다.
운가와 엽가의 가주, 천원학관의 다섯 부원장이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운가와 엽가의 가주는 굴욕과 분노를 느꼈지만, 감히 내색할 수 없었다.
오히려 천원학관의 다섯 부원장은 경건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곧 그들의 몸 바깥으로 마종이 드러나더니 즉시 중년인을 향해 날아갔다.
마종이 몸을 떠나자마자 일곱 명의 사람들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비틀거렸다.
반 시진이 지난 후에야, 마종은 그들에게 돌아왔다.
중년인이 흡수를 마친 터라 그들은 마종을 받아들이고도 절반의 무위만이 남은 상태였다.
운가와 엽가의 가주는 본래 양경 6단계의 무위였으나, 지금은 양경 5단계에 겨우 미친 수준에 그쳤다.
그렇기에 ‘절반의 무위’라는 표현은 다소 모호했다.
두 사람은 절반이 넘는 영력을 흡수당했음에도 무위는 한 단계의 퇴보만이 이루어졌으니까.
그러니 무도의 경계를 뚜렷하게 구분 짓기란 쉽지 않다.
가령 양경 1단계가 양경 2단계로 올라서고자 한다면 ‘1’의 천지영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양경 2단계에서 3단계로 올라서려면 최소 ‘10’의 천지영기가 필요한 식이었다.
“짐이 선천생령에 도달하려면, 자네들 모두가 절반의 무위를 내놓아야겠구나.”
마종의 흡수를 마친 중년인이 작게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돌려 보상봉을 내려다보았다.
“보상봉!”
“소신이 여기 있습니다!”
“짐을 제외하면 자네는 유일하게 마라와 교류할 자격이 있네. 공휘와 손불평만으로 마라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연단협회 장로의 신분으로 그를 초청하라!”
“소신 명을 받들겠나이다!”
“가규, 이틀 내에 운청휘를 짐에게 데려오라!”
“예,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