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천우성의 중앙 광장.
온몸이 묶여 무릎을 꿇고 있는 천우성 운가의 일원들에게 차가운 시선이 내려앉았다.
운해는 그들을 한 명씩 훑어보다 이십여 세의 청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대가 운청휘의 사촌 운현인가?”
“그렇습니다, 소가주. 저자가 운현입니다!”
운해의 뒤에서 한 호위가 나와 거들었다.
“그날 운청휘가 운범 도련님을 죽인 이유는, 운현의 경맥혈을 붕괴하려 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 그렇다면, 운청휘는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이 아니더냐?”
운해는 꽤나 흥미롭다는 듯 호위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자료대로라면, 확실히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호위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러한가? 내가 운현의 팔다리를 자른다면, 운청휘가 어찌 나올 것 같으냐?”
운해가 히죽 웃으며 혀를 날름거렸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피에 굶주린 짐승처럼 변해 있었다.
“하하하, 소가주님께서 그리하신다면 운청휘는 실성하겠죠!”
호위가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면 느긋하게 즐겨야겠구나. 운현과 가주 운한, 마지막으로 운상 저 늙은이까지, 날 얼마나 즐겁게 해주는지 보자꾸나!”
많은 이들이 운해 모르게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황제의 명령 때문에 운해는 운청휘를 직접 상대할 수 없다. 그러니 천우성 운가의 일원들에게라도 화풀이를 할 작정이었다.
드디어 권한이 주어졌으니, 오랫동안 고통을 주어 분노를 해소하리라 다짐하는 운해였다.
***
온 천우성에 소문이 자자했다.
“들었어? 운가가 이번에는 멸문을 피하지 못하겠어!”
“황성 운가의 가주와 성공학관의 옛 성도 운해가 월경 무인들을 이끌고 천우성 운가의 일원들을 생포했다더군!”
“헤헤, 누가 그걸 모르나. 이미 천우성 운가의 모든 이들이 광장에 무릎을 꿇고 있는걸.”
“아쉽구만. 일반인은 들어가지 못하게 광장을 봉쇄했으니.”
“듣자 하니 이번 재난의 원인은 운청휘라지? 특히 그의 직계 가족인 백부나 사촌 형, 조부는 모두 참혹한 꼴이 되었대!”
천우성 운가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누군가는 그들의 재난을 기뻐했고, 누군가는 탄식을 멈추지 못했다.
천우성의 어엿한 맹주였던 천우성 운가는, 황성 운가 앞에서 그저 개미 한 마리에 불과하지 했으니까.
“호외요, 호외!”
별안간 천우성 곳곳에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천우성 광장이 개방되었습니다! 오후에 형을 집행할 예정이니. 모든 천우성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황성 운가가 광장을 개방했습니다!”
“형을 집행한다고? 무슨 형인데?”
곧 많은 사람들이 물었다.
“당연히 본가를 배신한 천우성 운가에 형을 내리는 거죠. 황성 운가의 이번 집행은 본보기랍니다. 본가를 배신하면 천우성 운가와 같은 결말을 맞이한다는 걸, 모든 분가에 경고하는 게 아닙니까. 천우성 운가의 일원뿐만 아니라 하인, 호위병에 이르기까지 씨를 말려 버릴 작정이라고 합니다!”
“황성 운가는 정말 천우성 운가 자체를 지워 버릴 셈이군!”
형의 집행 소식은 마치 폭뢰처럼 사람들의 사이에서 터져나가며, 곧 많은 이들이 천우광장(天羽广场)으로 달려갔다.
이 각도 지나지 않아 삼백만 평이 넘는 천우광장은 백만 명 남짓한 사람들로 채워졌고, 끊이지 않고 구경꾼들이 몰려왔다.
한 시진 후, 4~5백만 명은 족히 될 듯한 사람들이 천우광장을 까맣게 메웠다. 광장 바깥도 사람들의 열기로 후덥지근할 지경이었다.
같은 시각.
천우성과 만 리를 두고 떨어진 극광성.
성공학관 최심부의 18층 탑에 자리 잡은 원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공휘와 손불평이 황성 운가에 생포되었다!”
“손 부원장?”
“손불평?”
탑 아래 일곱 명이 서 있었는데, 여섯 명은 부원장이었고 한 명은 소식을 전한 소도도였다.
“그 얼간이가 언제 천우성으로 도망쳐서 생포된 거랍니까?”
소도도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본좌는 그를 천우성에 보내지 않았네.”
원장이 침착하게 답했다.
“원장님, 손불평이…… 학관을 배신했다고 여기십니까?”
부원장 한 명이 갑자기 말했다.
“아닐 것이오. 손 부원장의 인품은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성공학관의 사람인 것을……!”
옆에 있던 또 다른 부원장이 말을 이었다.
“저도 손 부원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소심한데다가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지만, 그도 원칙 앞에서는 분수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부원장도 손불평을 옹호하고 나섰다.
“본좌가 천우성에 도착하면 모든 게 명백해질 테니, 그 이야기는 접어 두세.”
원장은 그들을 진정시키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원장님, 저, 정말로 천우성에 가셔야만 합니까?”
부원장 몇 명이 갑자기 긴장하기 시작했다.
“원장님, 운 형제는 그저 이 소식을 알리라고 했을 뿐입니다. 원장님이 천우성으로 가셔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도도도 질세라 끼어들었다.
“본좌에게 생각이 있으니, 모두 물러가고, 소도도는 잠시 남게.”
원장은 위엄 있는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네, 원장님!”
부원장 여섯 명이 모두 공손하게 물러났다.
“역시나, 종마대법에 대해 물어보시려는 겁니까?”
둘만 남게 되자, 소도도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운을 뗐다.
“그렇다네!”
원장은 곧바로 수긍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본좌는 운청휘도…… 마종이 심어져 있다고 생각하네!”
“네? 설마, 운 형제가 들으면 억울하겠습니다!”
소도도의 안색이 변하더니 팔짝 뛰었다.
“……어떻게 판단하신 겁니까?”
질문을 던졌지만 소도도는 원장이 입을 열기도 전에 깨닫고 말았다.
“어쩐지…… 운 형제가 개같은 황제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싶었습니다! 더욱이 천원왕조에는 100여 개의 성이 있는데 굳이 천우성을 골랐다면, 황제도 속셈이 있었겠군요. 그래, 운 형제에게도 마종이 심어졌다면 전부 이해가 됩니다. 다만 황성 운가와 엽가가 왜 황실과 손을 잡았답니까?”
“아주 간단하지, 그들도 마종이 심어졌으니까!”
말을 마친 원장은 가부좌를 튼 상태로 허공을 둥둥 떠 내려왔다.
“얼추 시간이 되었군. 소도도, 본좌와 함께 가자꾸나!”
소도도가 눈을 번쩍 떴다.
“능공허도?! 원장님도 그 경계에 도달하신 겁니까?”
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름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렇다네, 운청휘…… 덕분이지!”
* * *
이염죽의 도움을 받아, 운청휘는 이틀 만에 상처를 치료하고 낭야산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낭야산의 초입에 도달하자, 그가 이염죽을 바라보았다.
“이만 천우성으로 돌아가야 하니, 여기서 작별하지.”
운청휘가 이염죽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걸 가져가!”
이염죽이 화살통에서 묵빛 화살을 꺼내 던져 주었다.
“……고맙군.”
화살을 받아든 운청휘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 소저. 성인은 감정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어찌 가늠할지는 그대에게 달렸으니 잘 생각해보도록.”
말을 마친 운청휘는 곧바로 몸을 돌려 허공을 박차고 날아갔다.
“성인은 감정만으로 움직이지 않다라…. 그가 눈치 챘구나!”
이염죽은 그의 말에 다소 놀란 듯했지만, 이미 사라져 버린 운청휘에게 더 물을 방법이 없었다. 곧 그녀도 한 방향으로 몸을 돌려 떠났다.
한편, 천우성.
광장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성문 입구에 포진하여 공휘를 구경하고 있었다.
성문 위에 매달린 공휘는 거의 넝마가 되어 있었다. 일정 시간마다 강제로 단약을 먹여 상처를 치료했고, 부상이 나으면 황급 상품의 채찍으로 그의 몸을 호되게 내리치길 반복했다.
해질녘이 되자, 가규와 노인 한 명이 성루에 올라왔다.
방금 단약을 먹어 기력을 회복한 공휘가 힘겹게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가규의 옆에 서 있는 노인을 발견한 순간, 공휘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떴다.
“손불평, 네놈이 감히 학관을 배신해!”
“공휘, 시대의 흐름을 알고 순응하는 자가 현명한 이라네. 폐하께서 전설의 경계에 도달하시는 순간 마라든 성공학관이든 이 왕조에서 사라지지 않겠는가. 노부가 지금 자네에게 기회를 주겠네. 자네가 투항하면…….”
“퉤, 손불평, 배신자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투항을 권하는가? 원장님께서 천우성에 도달하는 즉시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실 터!”
공휘가 한껏 분노하여 말을 잘랐다.
“공휘, 노부는 네놈과 도덕 놀이를 할 시간이 없다. 하나만 묻지, 투항이냐, 죽음이냐?”
손불평이 눈썹을 찌푸려지며 대답을 재촉했다.
“그럴 배짱이 있다면 어서 죽여라! 항복할 생각 따위 없으니!”
공휘가 피가 섞인 침을 퉤 뱉으며 당당히 외쳤다.
“죽이라? 어림없지! 여봐라, 저놈을 다시 채찍질하도록!”
자신의 설득이 소용이 없자 손불평의 얼굴에 섬뜩한 기색이 스쳤다.
“존명!”
명령을 받은 이가 황급 상품의 채찍을 휘둘러 공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휘이익! 촤악!
공휘는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황급 상품의 채찍이 주는 고통은 월경의 무인이라도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공휘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손불평, 지금이라도 나를 죽여라! 원장님께서 도착하시기만 하면, 네놈을 갈기갈기 찢어 달라 청하고 말겠다……!”
그 소리를 들은 손불평이 음험한 웃음을 흘렸다.
“어리석은 놈. 파악이 안 되느냐? 네놈을 고문하는 게 목적이지, 죽이려는 게 아니다. 마라도 네놈의 시체 따위를 보러 올 리가 없지 않으냐. 쯧, 지금의 천우성을 예전과 같다고 착각하지 말거라. 이미 이곳은 철통같은 방어가 되어있다! 심지어 운역에서 진법대사를…….”
손불평이 얼른 말을 끊었다. 신이 난 나머지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내뱉을 뻔했다. 그는 공휘를 한동안 응시하다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놈. 똑똑히 봐 두거라. 마라가 어떻게 죽을지……, 두 눈에 새기게 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