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운청휘, 네놈의 마종이?”
혼란스러워하는 가규에게 운청휘가 다가오자, 가규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가규의 반경 삼 장 앞까지 도달했을 때, 운청휘가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순간, 가규의 전신은 보이지 않는 강한 영력에 속박되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럴 리가 없다! 분명 마종을 심었거늘, 어찌 이럴 수가……! 이 건방진 놈! 노부는 네놈의 주인이다. 어서 풀지 못하겠느냐!”
운청휘의 몸에서 마종을 느끼지 못하자, 가규는 혼란에 빠진 듯 악을 썼다.
“주인?”
또다시 그 말을 듣는 순간, 운청휘의 살기가 마침내 눈에 보일 정도로 드러나며 그의 몸을 감쌌다.
“파신전(破神箭)!”
운청휘의 외침에 따라, 묵빛 화살이 빈 검집에서 빠져나와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푸욱!
운청휘가 움켜쥔 묵빛 화살을 가규의 가슴에 박아 넣었다.
휘오오……!
마치 거대한 공에서 바람이 일순간에 빠지듯, 가규에게서 세찬 기류가 새어 나왔다. 운청휘가 손을 거두자, 투명한 구슬이 묵빛 화살촉에 꽂힌 채 딸려 나왔다.
“운청휘, 노부의 마종을 내려놓아라!”
마종이 자신의 몸을 떠났다! 경악하는 가규의 안색은 마치 시체처럼 혈색을 잃어가고 있었다.
“본제에게 감히 마종을 심었으니, 영광으로 여기거라.”
운청휘는 목소리를 낮춰, 가규에게만 들릴 수 있게끔 나직이 말했다.
“그러나 선제의 위엄을 넘보려고 했다니, 불행한 일이로군.”
“본제? 무슨 자화자찬이냐? 뭐, 네놈이 선제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라 말하고 싶었으나, 동시에 가규의 눈에는 극심한 공포가 깃들었다.
그 순간, 죽음을 목전에 둔 가규의 머릿속에 깨달음이 있었다.
운청휘의 천부적인 재능과 무위, 전투력은 그 연령의 무인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수준이다. 특히 두세 달 전만 해도 자신에게 패했던 운청휘가 지금은 도리어 자신의 마종을 빼앗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고, 늦었기에 후회할 기회조차 없었다.
가규는 천원왕조의 황제를 떠올렸다.
황제는 마라를 평생의 적수로 여겼지만, 그게 황제의 실수였다. 황제는 마라를 경계할 게 아니라 운청휘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그를 건들이고 말았으니……!
“성가시구나. 그만 죽어라.”
냉랭한 목소리가 가규의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다. 그 순간, 가규의 몸은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고 말았다.
그의 숨이 끊어진 후, 운청휘는 보이지 않는 불꽃을 일으켜 가규의 영혼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오직 운청휘만이 들을 수 있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려왔지만, 운청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를 화나게 만들었으니, 영혼까지 소멸시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규의 영혼은 육신과 함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공 부원장. 아직 무위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셨으니, 제 곁에 계십시오.”
운청휘가 몸을 솟구치자, 공휘는 그가 전해준 영력을 사용해 함께 천우성의 중심지로 날아갔다.
새까맣게 모여든 사람들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서서히 성 중심으로 향하며 멀어지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대결이야……!”
“운청휘 혼자서 황성 운가와 맞선다니……!”
“이 싸움으로 천우성 운가만이 아니라 천원왕조의 형세마저 달라질지도 모르겠어.”
“맞아! 아까 운청휘에게 죽은 가규는 천원학관의 부원장인데……. 천원학관의 배후에 황실이 있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잖아.”
“그렇다는 건, 운청휘의 상대는 황성 운가만이 아니라 황설도 있다는 거군!”
“제길, 사람이 너무 많아서 한 발짝도 못 들어가겠구만! 만약 그 대결을 볼 수만 있으면 여한이 없을 텐데!”
“운청휘에게 승산이 얼마나 있을 것 같나?”
“손불평과 가규를 순식간에 죽였으니 이미 양경의 최강자 아니겠어? 게다가 평범한 양경의 무인도 아니잖아!”
“하지만 황성 운가와 황실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
이는 성문 입구에서 일어난 일로, 미처 천우광장까지 소식이 닿지 못했다.
그러나 천우성의 가장 큰 객잔 최상층에 자리 잡은 중년인은 감은 눈을 뜨더니 싸늘한 기운을 내뿜었다.
“……가규가 죽었군.”
“네?”
그의 발언에 몸을 굽히고 있던 이들이 모두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폐하, 마라가 도착하였습니까?”
용포를 입은 중년인이 희미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닐세. 가규의 마종은 그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화되었네. 마라의 실력이 어떻든, 마종을 연화시킬 수단은 없거늘.”
“마종까지 연화되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경악하던 이들의 안색이 차츰 묘하게 바뀌었다.
여기에 있는 이들도 모두 몸에 마종을 가지고 있다. 가규처럼 몸에 있는 마종을 연화시킬 수 있다면, 그들에게 있는 마종도 연화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폐하, 가규를 죽일 수 있다면 상대방은 최소 양경의 무인입니다. 다만 황실과 성공학관을 제외하면 황성 4대 가문만이 양경의 무인을 배출하지 않았습니까. 저희 운가와 엽가는 폐하의 수족이나 다름없으니, 구양가와 상관가가 남습니다. 다만 구양가의 가주는 줄곧 중립을 지켰으니…… 구양가와는 무관하리라 생각합니다. 남은 상관가는 이미 며칠 전 운청휘에게 멸문되었고…….”
상황을 천천히 정리하던 운가의 가주가 돌연 안색이 변하더니 한마디를 내뱉었다.
“운청휘, 가규를 죽인 자는 운청휘가 분명합니다.”
“운청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대부분은 운청휘를 만난 적이 없지만, 요즘은 하루가 멀다고 그 이름이 들려왔다.
“폐하, 가규가 운청휘에게 3급 마종을 심었다고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그동안 가규는 낭야산에서 운청휘를 죽이지 않고 마종을 심은 일이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거듭 말하고 다녔습니다.”
“2급 마종은 의지만으로도 3급 마종의 힘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운청휘가 가규를 죽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망설이며 말했다.
“운청휘가 스스로 몸속의 마종을 녹여낸 것이겠군요!”
좌중에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용포를 입은 중년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눈빛에 기묘한 흥분이 일렁였다. 만약, 만약 자신들도 마종을 녹여낼 수만 있다면……! 황제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열기는 중년인에게서 흘러나온 시린 냉기에 뒤덮이며 부질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용포를 입은 중년인은 여유로운 표정이었으나, 두 눈빛은 보는 이를 얼어붙게 할 만큼 서늘한 빛을 띠었다.
“짐이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탓하지 말게. 짐이 자네들에게 바라는 것은 고작해야 절반의 무위가 아닌가? 이 일로 다른 마음을 품지 말게나!”
“소신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신, 목숨을 걸고 폐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연단협회의 장로 보상봉을 포함한 이들이 허리를 숙이고 일제히 외쳤다.
“운묘(云渺), 만약 운청휘가 돌아온다면 제일 먼저 천우광장으로 갈 텐데, 가지 않는 겐가?”
용포를 입은 중년인이 황성 운가의 가주를 바라보았다.
“후……!”
운청휘의 이름을 듣는 순간, 황성 운가의 가주 운묘의 숨결이 거칠게 흐트러졌다.
“폐하, 소신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다급히 말을 마친 운묘가 창밖의 하늘로 훌쩍 몸을 날렸다.
“운청휘가 상관가조차 멸문시켰거늘, 혼자서는 상대가 될 수 없을 걸세. 보 경, 엽 경. 함께 가 주시게.”
가볍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용포를 입은 중년인이 지시를 내렸다.
“예, 폐하!”
“예, 폐하!”
보상봉과 엽가의 가주가 급히 명을 받들고 운가의 가주를 따라 창밖의 하늘로 솟구쳤다. 그들은 일제히 천우광장으로 향했다.
이때의 천우광장은 온통 고함과 비명, 신음으로 가득했다.
광장의 한쪽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시체가 사오백 구는 될 듯했다. 운청휘가 그들을 보았다면, 그 시체 중에서 낯익은 얼굴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터였다.
가계를 관리하는 전 총관. 운청휘가 전 삼촌이라 부르며 따랐던 이였다. 어린 운청휘가 여동생과 함께 부엌에서 음식을 훔쳐 먹을 때, 매번 후식 쪽으로 관심을 돌렸던 주방장도 있었다.
운청휘가 직접 운씨 성을 하사한 호위 운무도, 그 산더미 같은 시체에 섞여 있었다.
시체의 절반은 적어도 운청휘가 이름을 아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운가의 하인이었고, 호위였고, 방계자제였다.
살아남은 운가의 사람들은 이제 오백여 명에 불과했다.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 중 맨 앞에서 운상과 운한, 운현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피눈물로 가득했으며, 꽉 쥔 두 주먹에 손톱이 파고들어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운해, 너는 반드시 업보를 받을 것이다!”
“황성 운가, 나 운상이 이번에 죽지 않는다면, 이 원한을 절대 잊지 않겠다!”
“운해, 네놈은 대가를 치를 거다. 나 운현이 맹세한다. 반드시!”
“하하하, 업보? 원한? 대가? 네놈들에게 기회가 또 올 줄 아느냐? 운청휘는 폐하의 손아귀에 있을 테니 내가 신경 쓸 상대가 아니지만, 네놈들은…… 오늘 반드시 죽이고 가겠다!”
운해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천우성 운가에는 운몽이라는 무인이 있다고 들었다. 스스로를 천수혈도라고 부르더군. 좋아, 그자를 데려오너라!”
곧 운몽이 끌려 나오더니 운해에게서 삼십여 장 떨어진 말뚝에 단단히 묶였다.
운해의 뒤에 서 있던 호위가 그에게 장궁과 검은 천을 넘겨주었다.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장궁의 시위를 당긴 운해가 히죽 웃었다.
“눈을 가리고, 영력을 감지하지 않겠다. 본 공자가 세 개의 화살로 죽이지 못한다면, 모두 한 시진만 더 살게 해 주마.”
말을 마친 운해가 팽팽히 당긴 활시위를 놓았다.
쐐애액!
예리한 화살이 그대로 쏘아져 나가며, 운몽의 한쪽 가슴에 단단히 박혀 들었다.
“하하하…… 천수혈도의 별명을 가졌는데 운이 좋구나. 한 발 더 받아라!”
운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또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두 번째 화살은 운몽의 아랫배에 깊숙하게 꽂혔다.
선혈이 그의 가슴과 아랫배를 타고 흘러내렸다.
운몽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뎠다. 그의 눈빛이 증오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운해를 노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운해! 그 기세는 절대 얼마 가지 못할 거다! 네놈이 뼈저리게 후회할 거라고 이 운몽, 목숨을 걸고 장담하겠다! 네놈의 최후는 우리보다 천배, 아니, 만 배는 더 처참하리라!”
“하하하! 본 공자는 아까부터 비슷한 말을 지긋지긋하게 들었다. 아하하! 네놈들이 믿는 건 운청휘겠지? 그가 온들 뭐가 달라지느냐? 이미 천우성 운가의 500명이 죽었거늘, 무슨 복수를 이룬다고!”
운해는 가소롭다는 듯 웃으며 활시위를 당겼다.
“자, 본 공자가 세 번째 화살을 쏘겠다.”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마지막 화살은 운몽의 한쪽 귀를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