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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제귀환-110화 (110/430)

제110화

“후배, 지금 무릎을 꿇고 참회한다면, 체면을 봐서라도 그대를 살려 주겠네.”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진관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릎을 꿇고 참회하라?”

운청휘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가 한 손으로 깃발을 움켜쥐니 깃발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말았다.

그 모습에 진관해가 눈을 부릅뜨고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말도 안 된다! 어, 어찌 이리도 쉽게 십팔나생문을 파훼한단 말이냐!”

“18개의 깃발로 축소판 나생문을 설치했으니, 천부적인 재능은 대단하군.”

운청휘가 천천히 답하며 허공에서 내려왔다.

“그, 그걸 어찌 알았지? 나생문 자체가 전설 속의 진법이거늘!”

진관해의 표정이 더욱더 섬뜩하게 변했다.

“전설이라, 하하하! 그야말로 범인의 식견이야!”

운청휘가 참지 못하고 크게 웃고 말았다.

선계에서 유명한 살인 진법이라 한들, 선제인 운청휘에게는 내키는 대로 가져올 수 있는 작은 진법에 불과하다.

어디 나생문뿐일까, 전성기의 운청휘는 십방적멸대진(十方寂灭大阵), 구천주선살진(九天诛仙杀阵) 같은 대진은 생각 한 번으로 설치할 수 있었다.

“범인의 식견이라고? 허허허, 후배, 정녕 살고 싶지 않은 게로군. 이토록 노부를 욕보이다니!”

모욕을 당한 진관해가 분을 이기지 못하며 왼손을 내밀었다.

검지에 끼워진 검은 반지에서 수십 개의 정석(晶石)과 핏빛 부적이 튀어나왔다.

훅훅훅!

순식간에 정석과 부적을 이용한 진법이 펼쳐졌다. 진한 핏빛 기운을 띠어 불길한 느낌이 드는 진법이었다.

“요혈연옥진(妖血炼狱阵)? 아니, 역시나 요혈연옥진 열화판이로구나.”

운청휘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네 개의 기를 발산했다. 각자 네 방향에 있던 혈색 부적은 맥없이 기에 관통되더니,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파훼가 이루어졌다.

“네, 네놈이……!”

진관해의 눈빛에 두려움이 어렸다.

그간 두려움이 어떤 감정인지도 잊고 지냈던 그였지만, 운청휘가 지금 그 감정을 일깨우고 말았다!

“보여 주마. 똑같은 축소판이라도, 나와 네놈의 수준 차이는 수백 배에 달하지 않겠더냐!”

운청휘가 영력을 일으키자 조그마한 돌멩이 4개가 허공에 떠올랐다. 돌멩이들은 혈색 부적이 있던 위치에 둥실둥실 떠 자리를 잡았다.

이윽고 운청휘가 번개 같은 손놀림으로 네 돌멩이를 쳐내는 순간…….

쾅!

짙고 불길한 핏빛 기운이 높이 치솟았다.

운청휘가 쳐낸 돌멩이와 앞서 진관해가 던졌던 정석들이 하나로 결합하며, 진을 발동시켰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진관해의 발밑에서 빠르게 번져 나온 피 웅덩이는 마치 늪처럼 단숨에 그를 끌어내렸다.

진관해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피 웅덩이로 빨려 들어가 허우적거렸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도대체 네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고서에 기록된 요혈연옥진과 똑같이 만들어 냈단 말이냐! ……서, 설마 돌멩이 4개로 만들어 내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피 웅덩이에 빨려 들어간 순간 몸 안의 기혈이 들끓었지만, 진관해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온 신경은 놀라운 진법을 펼친 운청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참으로 하찮은 안목이로군. 진짜 요혈연옥진이었다면, 네놈은 지금 입을 열 수도 없거늘.”

운청휘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진관해는 진법을 만드는 재능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식견이 좁아 우물 안 개구리나 다름없었다. 선제인 그의 앞에서 하찮게 보이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막상 운청휘의 말을 들은 진관해는 오히려 조용해졌는데, 그는 고서에서 보았던 요혈연옥진을 떠올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아무리 축소판이라고 하나, 요혈연옥진에 갇혀 기혈이 들끓는 와중에도 저리 차분하게 생각에 잠길 수 있을까?

운청휘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그는 곧 진관해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저자는 미쳤다.

혹은, 진법에 극도로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새…… 생각났다!”

돌연 진관해가 소리를 지르더니 머리를 감싸 쥐었다.

“300여 년 전, 스승님께서 요혈연옥진을 언급하셨지. 진정한 요혈연옥진은 바다와 버금가는 규모의 피바다에서 생성된다고! 지금 내가 갇힌 진은 삼 평도 채 되지 않아! 이것은 진정한 요혈연옥진이 아니로구나!”

“……그렇다.”

운청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 약간의 흥미가 어렸다.

선제인 그가 보기에는 우물 안 개구리인 진관해였지만, 천부적인 재능을 놓고 보자면 선계에서도 손꼽는 진법의 기재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천성대륙으로 돌아온 이후, 운청휘는 처음으로 재능을 가진 이를 아끼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사상혈제대진을 파괴하고 무고한 이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그럼 영신을 풀어 주고…… 제자로 받아주겠다.”

진관해를 아는 이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운청휘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했으리라.

지금 진관해의 명성이 대단치 않아도, 백 년 전에는 악명을 날리던 이였다.

그가 죽인 이들을 헤아릴 필요도 없이, 이미 영변경까지 무위를 수련한 데다 몸 밖에 화신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은가.

그런 진관해를, 제자로 삼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운청휘다.

“내가 영신임을 알아보다니……!”

진관해의 얼굴이 멍한 빛을 띠었다. 자신을 제외하면, 이 세상의 누구도 자신이 20년 전에 영변경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건만!

“나를 제자로 받아준다고?”

운청휘의 마지막 한마디를 떠올린 진관해의 눈은 곧 기연을 만난 듯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진관해가 털썩 소리를 내며 땅에 무릎을 꿇었다.

“사부님, 미숙한 제자 진관해의 절을 받으소서!”

삼백여 년을 살아온 만큼, 진관해는 생각이 빠르게 돌아갔다.

운청휘가 펼친 진법을 겪자마자, 단번에 그를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이라 확신했다.

더불어 진법뿐만이 아니라, 무위도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리라는 추측을 빠트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육신이 영신임을 단번에 알아차리는 식견까지!

그의 눈에 경외감이 짙게 어렸다.

눈앞에 있는 운청휘는 화신(化身)일 가능성이 컸고, 본신은 자신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강자이리라! 진관해의 추측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한편 운청휘는 단번에 태도를 바꾸는 진관해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라. 나는 이런 허례허식을 좋아하지 않으니,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진관해, 너는 아직 정식 제자가 아니니 앞으로 지켜보겠다.”

진관해는 내심 운청휘를 절세의 기인으로 단정 지었다. 그가 몸을 살짝 숙이고 존경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제자는 반드시 진법을 깊이 연구하여 사부님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겠습니다!”

“겨우 진법으로 만족하나?”

운청휘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준엄한 가르침을 내렸다.

“진관해. 시야가 매우 좁군. 진정한 진법대사가 되려거든, 무위의 기초를 알아야 하는 법. 요혈연옥진만 해도 모든 재료가 눈앞에 있는데 진을 펼치지 못하더군. 네 무위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더냐. 강력한 진법일수록 요구하는 무위가 높아지니, 진법대사는 무도대사를 의미함을 모르겠느냐? 앞으로 반드시 진법과 무위를 병행하도록.”

진관해는 침묵을 지켰지만, 그의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운청휘에게 더욱더 짙은 경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운청휘가 말하는 진리는 진법대사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진법대사들이 가장 소홀해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진관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강해질 대로 강해진 그가 어찌 무위를 신경 쓰고 있을까?

그러나 운청휘는 차분히 그 문제점을 짚어냈고, 진법에 쏠린 진관해의 생각을 바로잡았다.

“사부님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진관해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말했다.

“그래. 유념해두도록.”

운청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말을 이었다.

“정식 제자는 아니라고 하나, 네게 가르침을 내리지 않는다면 사부로서 체면이 서지 않겠지.”

말을 마친 운청휘가 신식을 펼쳤다.

여섯 진법과 한 권의 수련 무공이 진관해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후…….”

진관해의 호흡이 별안간 무겁게 가라앉았다.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온 여섯 진법 중에는 그가 사용했던 ‘사상혈제대진’, ‘나생문’, ‘요혈연옥진’ 외에 생소한 3개의 진법도 있었다.

운청휘가 넘겨준 진법은 진관해가 사용했던 진법처럼 축소판이었으나, 원본과 한없이 가까운 판본으로 볼 수 있었다.

원본을 넘기지 않은 이유는 진관해도 수긍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무위로는 원본을 알더라도 진법을 설치할 수 없으므로.

한 권의 수련 무공은 ‘자기동래결(紫气东来诀)’로, 구결을 이해한 진관해가 눈을 부릅떴다. 앞의 여섯 진법을 합쳐도 자기동래결이 주는 놀라움에 비할 수 없었다.

자기동래결은 신선의 무공이 아닌가!

3천 년 동안 풍무극광을 제외하면 천우성에서 신선이 난 일은 없었건만, 운청휘가 전해준 자기동래결은 신선이 될 수 있는 무공이었다.

때문에 진관해는 자신도 모르게 황당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사부 운청휘는…… 풍무극광의 화신이 아닐까?

운청휘는 알 리가 없겠지만, 단시간에 많은 일들을 겪은 진관해는 생각이 폭주하다 못해 그를 풍무극광과 연관 지으며 경외하고 있었다.

물론 운청휘가 알았다면 웃지도 못할 터였다. 진관해에게 넘겨준 진법과 무공은 운청휘가 재해석하여 만들어 낸 판본일 뿐이니.

“진관해. 이제 자기동래결의 수련을 위주로 하고 남는 시간에 여섯 진법을 연구하라. 10년의 기간을 줄 테니, 신선이 되도록. 성공한다면 널 제자로 받아들이겠지만, 실패한다면 이 운청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알겠느냐?”

운청휘가 수련 방식을 일러줌과 동시에 조건을 내걸었다.

“예? 10년 안에 신선이 되란 말씀이십니까?!”

진관해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왜 그러느냐. 불가능 하다 생각되더냐?”

과연, 한 사람의 식견은 특정한 상황에서의 반응을 결정한다. 운청휘는 실소를 흘리며 덧붙였다.

“잘 기억하도록. 지금부터 자기동래결을 수련하여 10년 안에 선인이 되지 못한다면…… 차라리 벽에 머리를 박고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니.”

운청휘는 단단히 일러두며 작게 한탄했다.

“더욱이, 걸핏하면 우왕좌왕하는 버릇도 고치도록. 네 눈에 불가사의한 일이라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저 하찮을 따름이다.”

“……예, 제자는 사부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겠습니다!”

몹시도 혼란스러웠지만, 진관해는 가까스로 감정을 억눌렀다.

그 후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진관해가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입술을 떼었다.

“사부님, 제자가 한 가지 폐를 끼쳐도 되겠습니까……?”

“그래, 마종과 관련된 일인가? 어째서 마종과 엮이게 되었지? 몸 속에 마종이 느껴진다만, 일급 마종과는 더 고위의 마종이 느껴지는군.”

진관해가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운청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황제의 몸에 있던 일급 마종은 근본이 되는 마종으로, 진관해에게 있는 마종도 같은 형태여야 했다. 그러나 그의 마종은 다른 이가 억지로 심은 마종이 아니던가!

“역시 굉장하십니다! 한눈에 알아보시다니요! 사부님의 말씀대로 더 상위의 마종이 이 제자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진관해가 감탄하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한가. 영변경까지 수련한 후, 마종을 영신에 옮겨 둔 게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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