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경매가 진행되는 내내 운청휘는 덤덤하게 상황을 지켜보았다. 지금까지 세계수 외에 그의 흥미를 끄는 물건은 없었으나, 곧 청의노인이 내온 물품을 보는 순간 운청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마찬가지로 상고 전쟁 시대에서 온 ‘선식양정’입니다. 혹 가문에 토 속성 오행의 힘을 다루는 어른이 계신다면, 이 선식양정은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청의노인이 내놓은 선식양정은 투명한 덩어리였는데, 선천경 아래의 무인도 강한 토 속성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상고 전쟁 시대는 도대체 어떠하였기에 선식양정처럼 진귀한 물건이 있단 말인가.’
운청휘가 속으로 작게 감탄을 흘렸다.
선식양정은 토 속성의 선기를 뭉쳐서 만든 덩어리로, 구성하는 선기가 혼탁하기에 선천경 아래의 무인들도 힘의 파동을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세계수처럼 순수하고 짙은 목황선기를 담은 물건은 보통의 선인들도 감지하지 못한다.
지금의 내게 선식양정의 가치는 세계수를 뛰어넘지.’
세계수가 담고 있는 목황선기는 지금의 무위로 흡수할 수 없다.
적어도 선천의 경지에 올라야 얻을 수 있는 목황선기와 달리, 선식양정은 지금의 무위로도 흡수할 수 있었다.
“선식양정의 시작 가격은 10억 냥입니다!”
청의노인이 경매 시작 가격을 선언했다.
“뭐……!”
경매장이 술렁였다. 앞서 나뭇가지의 시작가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금액이 아닌가!
다만 2층 귀빈석에 앉은 이들은 태연한 반응을 보였다.
“선식양정은 선천생령이 사용하는 물건인데, 선천생령에게 있어서 세속적인 돈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터.”
귀빈석에 앉아 있던 이가 여유롭게 내뱉었다.
“맞아, 선식양정의 시작 가가 10억 이하였다면, 오히려 놀랐을 거야…….”
“보통 사람들이라면 10억 냥은 평생이 걸려도 못 쓰겠지. 하지만 저들에게는 숫자 놀음에 불과한 것을.”
귀빈석에 앉은 이들이 사담을 주고받는 사이, 누군가 이를 악물었다.
“소가의 가주님은 토 속성 오행의 힘을 다루시니, 우리 소가에 꼭 필요한 물건이지!”
소약이었다. 그가 단번에 가격을 세 배로 올렸다.
“30억!”
“흥, 고작 그 가격으로 선식양정을 손에 넣으려 해? 거암성 장가는 40억을 내놓겠다!”
“50억!”
“55억!”
귀빈석에서 치열한 경쟁이 일어났고, 그들이 숫자를 부를 때마다 1층의 사람들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소가는 어찌 저런 돈을 턱턱 부른단 말인가!”
“저런 거대 세가에서 돈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1층에 있는 수천여 명이 하나같이 감탄하며 2층을 힐끗거렸다.
“80억!”
바로 이때, 소가 소약이 또 하나의 숫자를 내놓았다.
“우리 소가는 선식양정이 꼭 필요하다네. 정말 노부와 경쟁할 생각인가?”
소약이 음침한 소리를 냈는데, 귀빈석에 앉은 이들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저 영감이 소가의 이름으로 감히 노소가를 누르려 하는군? 이 몸이 가만히 있을 줄 아느냐!”
소도도가 가소롭다는 듯 말하더니 당당히 외쳤다.
“우리 노소가는 81억을 부르겠다!”
“90억!”
소약이 음침하게 말했다.
“91억!”
소도도가 재차 가격을 제시했다.
“도도 소가주!”
노소가의 일원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소도도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소원이 가문의 자산을 7할 이상 빼돌렸습니다. 지금 노소가는 10억 냥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걱정 마시게나. 적당한 가격을 부르면 소약 저 영감은 신이 나서 쫓아올 걸세.”
소도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곧바로 소약이 가격을 불렀다.
“100억!”
“101억!”
소도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소도도, 노소가에 그렇게 많은 은자가 있긴 한가?”
소약이 음흉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 질문에 연라성의 다른 가문들도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예전의 노소가였다면 그만한 은자를 마련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 노소가의 가주는 의식이 없는 상태고, 가문의 자산은 소원이 빼돌렸으니 소도도에게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건 영감이 참견할 바가 아니지. 소가에 돈이 있다면, 어디 한번 계속 덤벼 보게!”
태연하게 말하던 소도도가 곧 눈을 부릅떴다.
“돈도 배포도 없거든, 성가시게 굴지 말고 썩 나가게나!”
“이놈이.”
소약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이곳이 건곤 경매장만 아니었다면, 그는 곧바로 소도도를 향해 출수했을 터였다.
“150억!”
소약이 이를 악물고 숫자를 올렸다.
“200억!”
소도도의 명쾌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단숨에 50억을 올린 소도도의 이마에 식은땀이 옅게 배었다.
‘젠장. 이 몸도 정말 무모하군!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대장부도 아니지! 물론 200억은 이 몸을 팔아도 나오지 않을 금액이지만, 저 영감이 어떻게 나올지 꼭 봐야겠어!’
소약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의 이성과 직감은 소도도가 일부러 가격을 대폭 올렸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만약 소약이 물러난다면, 소도도는 절대 저 금액을 낼 수 없을 테니 엄중한 처벌을 받을 터였다.
그러나 소약은 물러설 수 없었다. 단순히 소도도를 망신 주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로 소가에 선식양정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계속 금액을 높여 왔지만…….
“205억!”
소약은 결판을 내자는 생각으로 5억을 더 불렀다. 만약 소도도가 더 높은 금액을 제시하면, 한 번은 물러나고 소도도가 무슨 꼴을 당하는지 지켜볼 작정이었다.
“돈도 없는 영감이 5억을 추가해?”
소도도가 으스대며 말했는데, 자신이 1억을 올렸다는 사실은 잊은 듯 보였다.
“이 몸은……!”
소도도는 영력을 실어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장내의 사람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소도도가 얼마를 부를지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영감과 어울리기도 지치는구만! 그만둠세.”
소도도가 빈정거리더니 소약 쪽을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영감. 그리 계산이 안 되면 집사 자리를 내놓게나. 선식양정이 아무리 진귀해도 기껏해야 100억 냥이거든!”
10년 전, 그는 조부와 함께 경매에 참여했다. 당시에도 비슷한 크기의 선식양정이 출품되었는데, 낙찰가는 100억이었다.
“네, 네놈이!”
그 말에 소약이 눈을 부릅뜨더니 끝내 피를 울컥 토했다.
“이런, 소약 집사!”
사람들이 다급하게 소약을 둘러싸고 살피는 소리가 들렸다.
소약을 보기 좋게 함정에 빠트렸으니, 소도도의 기분은 더없이 유쾌했다.
소약이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었더라면 그의 앞에서 춤이라도 췄을 터였다.
선식양정 다음으로 나온 경매품은 100만 단위로 낙찰되었다. 그 후로 가끔 1,000만 단위의 경매품이 나오긴 했지만, 억대를 부르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진이 지난 후에야, 모든 이들이 고대하던 아공간 반지의 순서가 다가왔다.
카르릉…….
무대 뒤쪽에서 지면과 철이 마찰하는 소리가 나더니, 10명의 양경 무인이 철 수레를 밀며 등장했다.
수레에는 가로세로 두 자 길이의 상자가 하나 들어 있었다. 쇠사슬로 촘촘하게 묶어놓은 상자는 한눈에 봐도 엄중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심지어 상자를 묶은 쇠사슬은 자물쇠를 채워 놓기까지 했다.
“아니, 저리 성대하단 말인가? 운 형제, 저것 좀 보게나.”
소도도가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시선을 떼지 못했다.
수레가 아무리 무겁다 한들 양경의 무인까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손가락에 들어갈 반지 하나를 두 자 크기의 상자에 넣고, 사슬이며 자물쇠까지 채운 것도 과장되기 짝이 없었다. 어차피 월경의 무인 한 명이라면 자물쇠도 사슬도 끊어낼 수 있었다.
굳이 이렇게 등장했다는 건 건곤 경매장이 아공간 반지를 대하는 방식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양경의 무인들이 지키고 있는 데다, 경매를 주관하는 이는 선천경의 무인이다. 누가 허튼수작을 부릴 수 있을까?
“이 반지는 최강의 무인이 상고 전쟁 시대에 얻었답니다. 그분은 생각만으로도 이 노부를 죽일 수 있습니다.”
청의노인이 반지를 소개한 직후, 경매장이 떠들썩해졌다.
선천생령인 청의노인이 이리도 겸손하게 말하다니,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더욱이 생각만으로도 청의노인을 죽일 수 있다면, 어느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인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이 아공간 반지에는 주인의 낙인이 찍혀 있어, 발견한 무인도 열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분은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아공간 반지의 내부 공간이 30만 3천 3백 33평임을 알아냈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주인이 죽으면 반지에 새겨진 낙인도 지워지기 마련입니다. 한번 운에 맡겨 보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천년, 오백 년, 백 년. 혹은 운이 좋으면 백 년 안에 낙인이 사라질 테니, 이 진귀한 아공간 반지를 얻을뿐더러 안에 들어 있는 보물도 얻을 수 있겠지요.”
청의노인은 천천히 좌중을 둘러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여러분. 이런 방대한 내부 공간을 지닌 아공간 반지의 주인이, 과연 반지 안에 어떤 보물을 넣었을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청의노인의 질문은 모두의 눈에 탐욕을 깃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공간 반지 자체가 진귀한 물건인 데다, 내부 공간이 이토록 큰 물건은 평생에 한 번 보기도 힘들다. 과연 그 안에 담긴 물건이 무엇일지,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그 반지가 그리 대단하면 낙인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 아니오? 그렇게 되면 누구든 열 수 있는데, 그 무인은 왜 가지지 않은 게요?”
1층에서 다소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 그런 거보를 왜 경매에 내놓은 거야?”
그 목소리에 다들 깨달은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도 대단한 물건이라면 왜 가지지 않고 경매에 내놓았단 말인가? 정말 최강의 무인이 얻은 게 사실이긴 한 것일까?
“간단합니다. 그 무인은 수련 중 큰 부상을 당했고, 지극히 희귀한 천재지보만이 그분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이 경매장이 그분이 필요로 하는 천재지보가 있어, 반지와 교환하였지요!”
청의노인은 태연하게 답을 제시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납득한 듯 하나둘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때 운청휘는 청의노인의 목소리도,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그들의 호기심 어린 얼굴 등 주변의 어떤 것들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