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운청휘는 철 상자가 등장하는 순간 신식을 펼쳐 담겨 있는 반지를 감지했고, 그때부터 그의 얼굴에는 충격과 공포가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오직 그만이, 상자 안에 담긴 반지를 알아보았다.
‘영라반지가 아니던가!’
운청휘가 받은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저 반지는 그가 너무나도 잘 아는 물건이다.
심지어 저 반지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보다 잘 아는 이는 없을 터였다.
눈을 감으니 영라반지가 막 완성되었을 때의 순간이 스쳐 가는 듯했다.
그가 아직 선제가 되기 전, 진선 시절 직접 만들어 낸 반지였으니까
‘어찌 저 물건이 여기에 있는 거지?’
몇 번이나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만든 영라반지가 확실했다.
다만 왜 저 물건이 경매장까지 흘러들어왔단 말인가?
‘게다가, 누군가 영라반지에 낙인을 찍어 두었구나!’
조금 더 반지를 살피던 운청휘는 별안간 솟구치는 살기를 억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감히…… 이 운제의 물건에 손을 댄 놈이 누구더냐!’
본래 영라반지는 수천 리 떨어져 있다 한들 운청휘가 감지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어디까지나 그가 새긴 낙인이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운청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애초에 영라반지는 그가 진선일 때 사용했던 물건으로, 무위가 올라가면서 점점 효율성이 떨어졌다.
자연스레 그의 관심은 다른 물건으로 옮겨갔지만, 그렇다고 아공간 반지를 아무렇게나 버릴 그도 아니였다.
새로운 아공간 반지를 만들어 영라반지를 보관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영라반지는 줄곧 납천반지(纳天戒)에 들어 있었을 터. 어찌 나올 수 있단 말인가?’
납천반지는 그가 선제일 때 만들어 낙인을 찍어 두었다.
납천반지의 낙인은 연화되지 않았으니, 다른 이가 꺼냈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모종의 이유로 납천반지 안에서 영라반지가 빠져나갔다는 뜻인데…….
‘……그때의 폭풍일 수도 있겠군.’
운청휘는 한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냈다.
‘납천반지는 나와 함께 천성대륙에 왔을 터. 다만 폭풍의 영향을 받았다면, 납천반지의 공간을 열리고 외부로 빠져나갔을 가능성도 있겠구나.’
운청휘의 추측도 가능성이 있었다.
애초에 그는 공간 폭풍에 휘말려 선계로 넘어가지 않았던가.
가령 지금 이 장소에 폭풍이 일어나도, 휩쓸린 이들은 순식간에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지만 이 경매장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는다. 운청휘가 낭야산의 장신연에서 선계로 빨려 들어갔어도, 장신연은 변하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납천반지도 같은 원리가 아니었을까. 운청휘는 자연스레 납천반지를 잃어버렸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그는 공간의 틈새에서 기령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는 공간의 틈새를 허물고 새로운 폭풍을 만들어 내었고, 그때 납천반지가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천성대륙에 근접했을 때 폭풍이 일어났고, 무위는 소진되었지만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기령도 마찬가지로 부상을 입은 채 천성대륙을 떠돌다 운청휘와 재회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납천반지도 천성대륙에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운청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납천반지를 잃어버리고 얼마나 애가 닳았던가. 무위를 계속해서 회복한다면, 분명 반지의 행방을 감지할 수 있으리라.
반지를 되찾는 순간, 선제의 재산 대부분이 돌아오는 셈이다. 납천반지 안에 들어 있는 무공과 단약, 법보, 선석 등은 선계의 절반을 사고도 남는다.
다시는 납천반지를 되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터라 오늘 영라반지와의 마주침은 운청휘에게 결국 희망을 안겨 주었다.
다른 물건들도 남아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무위를 회복한다면 물건들이 천성대륙 어느 지점에 있어도 모두 찾아낼 수 있었다.
‘영라반지에는 무수한 물자를 넣어 두었지. 모두 진선 이하의 경계에 필요한 물건! 그렇다면 지금의 나에겐 납천반지보다 영라반지가 더 중요하겠구나.’
운청휘는 무대 위의 영라반지에 시선을 집중하며 눈을 빛냈다.
‘다만 저 노인의 말을 전부 믿을 수 없군.’
그의 시선이 청의노인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떨어지며, 새로운 생각에 빠져들었다.
‘영라반지를 얻었다면 건곤 경매장의 천재지보와 바꿀 수 없을 터. 진선 계급의 낙인을 깰 수 없고 그렇다고 포기하긴 싫으니, 현경 계급의 낙인을 새겼군. 현경급 낙인을 깰 수 있다면 진선급 낙인도 깰 수 있을테니. 이것을 노린 것이었나?’
천천히 생각을 정리하던 운청휘가 마침내 반지를 얻은 이를 추론하기 시작했다.
‘……누군진 모르지만 영라반지를 진정으로 팔려고 했다면 연라성 같은 작은 곳이 아닌, 큰 곳에 팔았을 것이다. 이런 작은 곳은 높은 가격을 받지 못 할 테니. 큰 곳은 높은 가격을 받는 대신 변고가 생길 가능성이 방비하는 목적도 있겠군. 현경의 무위는 천하무적이 아닐뿐더러, 낙인을 깰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고작 현경의 무위로 되찾을 수 없을테니.’
영라반지를 경매에 내놓은 사람은, 천검종주 궁우신일지도 모른다. 운청휘는 어렴풋하게나마 가능성을 두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추측인 만큼, 검증할 방법은 없다.
잠시 생각하던 운청휘는 영라반지의 경매에는 불참하기로 결정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아직 현경의 적수가 아니다.
가령 경쟁에 성공하여 영라반지를 얻는다 한들, 운청휘는 현경의 무인이 새겨둔 낙인을 연화시켜야 한다.
낙인을 연화한 순간, 낙인의 주인은 가장 먼저 그를 찾아올 것은 자명했다.
다만 경매에 불참할 뿐, 영라반지 자체를 포기하다는 의미는 아니였다.
이전에 나왔던 세계수와 선식양정은 소약에게 잠시 맡겼을 뿐이다.
경매가 끝나고 나면, 은밀히 손을 써서 가져오면 그만이다. 영라반지도 마찬가지로, 다른 이에게 잠시 맡기고자 했다.
“경매를 시작하기 전, 노부가 한 가지 선언하고자 합니다.”
영력을 실은 청의노인의 목소리가 경매장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었다.
“이 반지는 세속적인 가치로 헤아릴 수 없는 물건이니, 동등한 가치의 물건이나 선천영액으로만 낙찰받을 수 있습니다. 이 반지의 가격은 선천영액 10방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동일 가치의 물건은 알겠는데, 선천영액은 뭐지?”
청의노인의 발표에 1층에서는 의아함에 가득한 술렁임만이 남았다. 선천영액이라는 말 자체를 처음 듣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2층의 귀빈석에 앉은 이들은 안색이 변하며 탁상을 내리쳤다.
“역시 흥미로운 장소야. 애초에 저 반지와 동등한 가치의 물건을 찾기보단 선천영액을 제시하는 게 현명하지. 다만 시작 가격이 10방울이라니!”
“은자로 환산하면 100억 냥이 아닌가!”
“흥, 이 사람 소식이 늦구만. 그건 10년 전의 이야기일세. 지금은 최소 3할 이상 가격이 올랐다네!”
선천영액은 선천생령의 오행의 힘으로 응결시킨 영액이다. 선천의 경지와 그 이하의 무인들에게는 무위를 올릴 수 있는 특효약이나 다름없었다.
무위를 증진시키는 단약은 복용할수록 효과가 떨어지는 반면, 선천영액은 어떠한 제한도 부작용도 없다.
충분히 마련해 두기만 하면 끊임없이 무위를 올리는 수단이 되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운역에 있는 세력가들은 선천영액을 비축해 전략적인 물자로 삼기도 했다.
귀빈석에 있던 이들 중 대부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은 아공간 반지를 낙찰받기 위해 경매장을 찾았고, 그들이 가진 영정패에는 은자만이 들어 있었다. 하필 건곤 경매장에서 은자가 아니라 영액을 제시하다니.
“우리 거암성 장가는 천년을 존속하는 동안 선천영액을 넉넉하게 확보했지!”
그때, 귀빈석에 앉아 있던 한 중년인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선천영액 30방울을 제시하겠네!”
“흥, 여기 있는 가문 중 천년에 못 미치는 가문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일원성(逸园城) 황가(黄家)는 선천영액 50방울을 내겠네!”
“거암성 서가(舒家)는 선천영액 100방울 내겠네!”
앞다투어 나오는 가격들을 들으며, 운청휘는 묵묵히 신식을 펼쳤다.
‘다른 가문들의 저력을 과소평가했군.’
곧 모든 귀빈석에 그의 신식이 닿았고, 그들이 휴대한 아공간 반지까지 확인한 운청휘의 눈이 옅게 반짝였다.
‘가문당 최소 선천영액 100방울을 소지하고 있고……. 음? 연라성 소가의 보유량이 가장 많군?’
소약의 아공간 반지에는 선천영액 539방울이 들어 있었다. 귀빈석을 전부 확인한 운청휘는 신식의 범위를 넓혀 경매장 전체를 탐지하기 시작했다.
“무위가 가장 높은 사람은 저 청의노인이군. 그도 선천경 4단계에 불과하구나.”
마침내 마음을 정한 듯, 낮게 중얼거린 그가 소도도에게 몸을 돌렸다.
“도도. 선천영액 500방울로 가격을 올리지.”
마치 약초를 부탁할 때처럼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오히려 소도도가 당황하며 망설였다.
“운 형제, 이런 말을 하려니 면이 서지 않네만, 노소가를 쥐어짜도 선천영액 한 방울도 나오지 않을 걸세.”
소도도가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귀빈석에 있는 이들 중 노소가가 가장 빈곤한 가문이리라.
“괜찮다. 일단 가격을 부르면, 다른 이가 값을 올릴테니.”
운청휘가 태연히 답했다.
가격을 단번에 올린다면, 경매를 일찍 끝낼 수 있을 터였다.
오늘은 그에게 아주 바쁜 날이 될 테니,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
“500방울!”
소도도의 외침은 귀빈석을 단번에 침묵으로 빠트렸다.
그들의 경쟁으로는 선천영액 200여 방울이 고작이었건만, 소도도가 가격을 두 배로 올리고 말았다!
“연라성 노소가가 부른 값입니다!”
“잠깐, 노소가는 지금 가주가 사도에 빠졌다고 들었는데! 선천영액을 낼 수는 있는 거야?”
귀빈석에 있는 이들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소가의 일원들도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만 소약만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소도도 이 교활한 놈. 노부가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말겠다.”
청의노인의 눈길이 소도도에게 잠시 머물렀다.
그는 건곤 경매장의 책임자인 만큼 노소가의 사정에도 밝았다. 지금의 노소가는 500방울은커녕, 한 방울도 낼 수 없다.
청의노인은 어떠한 동요도 없이 경매를 진행해 나갔다.
“선천영액 500방울 한 번!”
청의노인이 잠시 간격을 두고 다시 외쳤다.
“선천영액 500방울 두 번!”
청의노인이 ‘세 번’을 외칠 때까지 누구도 가격을 부르지 않으면, 아공간 반지는 선천영액 500방울로 낙찰될 터였다.
이 자리에서 소가의 소약을 제외하고 선천영액을 500방울 이상 소지한 자는 없다.
즉, 소도도에게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소약뿐이다. 신식으로 이를 파악한 운청휘는 일부러 소도도에게 가격을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부르게 했다.
“선천영액 510방울!”
소약이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소약의 예상대로였다면, 천천히 경쟁하다 선천영액 400여 방울로 아공간 반지를 낙찰받을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또 소도도의 계략에 걸려들어 100여 방울을 더 내고 말았다. 은자로 환산해도 1,000억대의 금액을 쓰게 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