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그동안 청의노인의 사람들도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였다.
펑펑펑!
갇힌 이들은 제각기 공격을 퍼부어 새장을 부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요란한 타격음이 사라진 직후, 맥 빠질 정도로 멀쩡한 단면이 드러났다.
청의노인만이 묵묵히 서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었다.
“노조.”
곧 갇혀 있던 이들은 효과가 없음을 깨닫고 청의노인에게 애걸하기 시작했다.
“노조, 영력으로 만든 새장입니다. 저희는 깰 수 없지만, 노조의 무위라면 얼마든지 부수고 나가실 수 있지 않습니까.”
청의노인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시선을 동쪽에 둘 뿐이었다.
그 방향에는 대전의 입구가 있었다.
그가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사람들의 불안만 커질 뿐이었다.
“좋다. 선천영액 510방울을 넘기지!”
외침과 함께, 선천영액 510방울이 담긴 병이 허공을 가르며 새장의 동쪽으로 날아갔다.
* * *
연라성 상공에 한 신형이 떠올랐다.
그자는 기이하게도 얼굴과 구체적인 생김새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를 눈앞에 두더라도 금세 잊어버릴 듯한 존재감이었다.
연라성 상공에 나타난 신형은 건곤 경매장을 바라보더니, 삼십만 장의 거리를 눈 깜박할 사이에 내달려 경매장에 도달했다.
“청의!”
청의노인의 귓가에 또렷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설마 광마가 돌아온 건가!”
겨우 한숨 돌렸건만, 또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노인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고 말았다.
“광마라?”
청의노인을 부른 자는 의구심이 담긴 눈으로 그를 보더니 별안간 모습을 드러내었다.
“광마가 아니라면, 누구시오?”
청의노인의 동공이 급격히 움츠러들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광마에 비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감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조차 두려웠다.
“경매장을 맡더니 이제는 본좌를 보고도 무릎을 꿇지 않는게냐?”
모습을 드러낸 이는 미간을 찌푸리며 명백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 순간, 청의노인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궁주(宫主)?!”
청의노인은 황급히 무릎을 꿇으며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자네가 말한 광마는 아공간 반지를 빼앗아간 자인가?”
“그렇습니다, 궁주님. 그뿐만이 아니라…….”
청의노인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가 보고 들은 운청휘의 행적을 낱낱이 밝혔다.
“자네들은 모두 그자를 본 거로군? 더욱이 소가와 원한이 있는 자라…….”
궁주라 불린 이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더니 청의노인을 내려다보았다.
“청의, 본좌와 함께 소가에 가세.”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이지 않는 기운이 청의노인의 전신을 감쌌다. 고작 숨을 한 번 내쉴 시간에,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시각, 소가는 곳곳에 등불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25명의 세력가들이 모인 만큼, 소가의 장로들은 대접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연회를 방불케 하는 대접이 한창일 무렵, 별안간 두 개의 그림자가 연회장 중앙에서 솟구쳐 올랐다.
“누구냐!”
갑작스러운 등장에 작은 웅성거림이 이어지다 장로 한 명이 물었다.
“아니, 자네가 여긴 웬일인가!”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중 한 명인 청의노인을 알아보았다. 건곤 경매장을 관리하는 그가 연락도 없이 이 자리에 나타났으니, 보통 일은 아닐 터였다.
“당장 소가의 가주에게 전하게. 이 몸의 주인을 알현할 기회라네!”
노인은 준엄하게 말하며 소가의 네 장로들을 똑바로 응시했다.
“뭐, 노조의 주인이라고?”
그 말이 불러온 여파가 상당했다. 특히 소가의 장로들은 부들부들 떨며 급히 가주를 찾으러 나섰다.
청의노인의 입지가 절대 소가의 가주보다 낮지 않으니, 그의 주인이라고 하면 당장 소가의 가주가 나와서 맞이하는 게 마땅했다.
* * *
연라성, 노소가.
운청휘는 반 시진 전에 노소가로 돌아왔다. 그는 곧장 소도도에게 요청해 밀실에 틀어박힌 후, 영라반지에 새겨진 낙인을 연화시키기 시작했다.
비록 그의 신식이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으로 추락했지만, 적어도 현경 무인의 낙인 정도는 연화할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집중하던 운청휘는 연화가 6할 정도 진행되었을 무렵 별안간 눈을 부릅떴다.
“도원마종(道源魔种)이로군. 설마 천성대륙에 도원마종이 있을 줄이야!”
도원마종. 이름 그대로 마종의 근원을 뜻하며, 진정한 도심종마대법을 익혀야만 도원마종을 키워낼 수 있었다.
변형된 도심종마대법으로 마종이 심어진 자들은 여럿 마주쳤지만, 진정한 도심종마대법을 익힌 이는 처음이기에 운청휘의 동요는 꽤나 컸다.
“천검종주, 궁우신. 그자가 반지에 낙인을 찍었군. 그자야말로 진정한 도심종마대법을 익혔구나!”
그가 중얼거리는 동안 연화의 속도가 빨라지더니 일각도 지나지 않아 연화가 완료되었다.
운청휘가 왼손 검지에 영라반지를 착용하고 신식을 펼치자, 영라반지에 담긴 수많은 보물이 감지되었다.
천급 이상의 무공과 법보, 선천생령 이상의 선석, 천 년이 넘은 천재지보, 만 년 이상의 영약 등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었다.
그가 선제 시절에 축적한 모든 부가 반지에 담겨 있었다.
이곳의 돈으로 환산하면 즉시 천성대륙의 절반을 사들일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운청휘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평범한 물건들이었다. 그가 생각에 잠기자 영라반지가 점점 투명해지더니, 그의 손가락과 완전히 융합되어 보이지 않았다.
운청휘는 이번에 강탈한 물건들도 죄다 영라반지에 넣어 두고 밀실을 나와 노소가의 본채로 향했다.
“운 형제, 벌써 나왔는가? 좀 더 걸릴 줄 알았건만.”
여느 때와 달리 일찍 나온 운청휘였기에 소도도는 의외라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곧 천검종주가 이곳으로 오겠군.”
운청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운 형제가 그를 아는가? 천검종주를 여기에 온다니! 그가 왜 여기로 오겠나?”
소도도는 농담처럼 받아넘기다, 점점 심각해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경매에 나온 아공간 반지는 천검종주가 내놓은 것이니까. 증거는 없더라도 내가 강탈했으니, 그자는 우리를 의심하지 않겠나.”
운청휘의 어조는 평이했지만, 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강도짓을 한 건 그였지만, 의심받는 건 노소가 전체가 된다.
소약 일행을 죽이고 다른 이들을 놓아주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은 자연스럽게 소가에 가장 큰 원한을 가진 노소가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소약 일행을 죽이기 전에 그 점을 염두에 두었으나, 그때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떤 문제가 일어나든 실력으로 문제 될 일은 없을 테니.
그러나 운청휘의 계산에서 생겨난 변수가 궁우신이었다.
그는 운청휘의 생각보다 빨리 나섰고, 그의 추측보다 더 영라반지를 탐내고 있었다.
그 시각, 소가.
소가의 가주는 궁우신을 마주한 순간,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느끼며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궁우신이 문득 한마디를 내뱉었다.
“본좌의 정신 낙인이 이미 연화되었군.”
소가의 가주는 궁우신을 처음 보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이미 위축되어 있었다.
그가 최근 일어난 일들을 종합하여 이야기하자, 궁우신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가 손을 한 번 휘두른 순간, 청의노인과 소가의 가주, 궁우신은 마치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흩어졌다.
세 사람은 곧 노소가의 본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본채에는 운청휘와 소도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운 형제, 자네도 알겠지만 오늘 건곤 경매장에서 입찰했던 이들은 모두 선천영액을 빼앗겼다는군! 게다가 소약은 강도에게 당했다고 들었네! 하하하! 이거야말로 인과응보가 아닌가!”
소도도는 과장되게 말하며 큰 웃음을 터트렸다.
후련하다는 듯 말하던 그가 별안간 나타난 세 사람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냐! 노소가에 함부로 나타나다니, 좀도둑이라도 되는가! 응? 당신은 경매장의 노인, 그리고 소법양(苏法阳)! 둘 다 노소가를 찾을 이유가 없을 텐데?”
‘저들과 노상강도가 무관한 건가?’
궁우신이 미심쩍은 눈으로 소도도와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도착할 즈음, 소도도가 운청휘에게 했던 말 때문이다.
그러나 운청휘가 궁우신의 방문을 예상하고 일부러 소도도에게 연기를 시켰다는 걸, 궁우신이 어찌 알까.
“흥, 소도도, 어찌 멍청한 척하는 거지?”
소가의 가주 소법양이 코웃음을 치더니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네놈이 감히 소약을 죽이고 소가가 낙찰한 물건들을 강탈하지 않았느냐! 게다가 다른 성의 세력들이 지닌 선천영액까지 약탈하다니, 뻔뻔한 놈!”
“이 몸이 지금 그런 짓을 하고 왔다는 거냐?”
소도도가 소법양을 향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곧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소법양, 벌써 정신이 혼미해졌나? 이 몸에게 그런 실력이 있었으면 소가가 지금까지 건재하게 두었겠는가!”
소도도의 말은 조롱이 다분했지만,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듣던 이들은 저절로 소도도를 용의자에서 제외하고 있었다.
한편 소법양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얼굴을 찌푸렸고, 청의노인이 별안간 호통을 쳤다.
“소도도, 간도 크구나. 우리 주인님을 뵙고도 무릎을 꿇지 않다니!”
소도도가 실소를 흘렸다.
“영감의 주인이 뭐라고 이 소도도에게 무릎을 꿇으라는 건가? 운역 운가의 가주가 와도 이 소도도는 면전에 욕을 퍼부을 걸세! 내가 무릎을 꿇을 사람은 천검종주이신 궁우신 선배님 한 분뿐이라네!”
당당히 말하던 소소도는 궁우신을 언급할 즈음엔 거의 숭배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의 얼굴에 분노가 어리더니 소도도를 공격하려던 손을 거두며 냉랭하게 답했다.
“말은 잘하는군! 네놈 앞에 있는 이분이 누군지나 아느냐? 바로 내 주인님이시자……!”
청의노인이 궁우신의 정체를 밝히려는 순간, 궁우신이 말을 자르고 나섰다.
“후배여, 본좌는 자네의 억지를 용서하겠네. 자네는 솔직하게 답하면 되네. 자네가 그 노상강도인가?”
소도도가 무심코 내뱉은 아부가 썩 마음에 들었는지, 궁우신은 제법 온화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가 소도도의 전신을 덮는 순간, 소도도의 얼굴엔 본능적인 공포가 배어들었다.
“선배님께 아룁니다. 후배는 전혀 관련이 없을뿐더러, 그 일도 전해 들은 게 전부입니다!”
물론 거짓말이다.
진정 두렵긴 했으나, 운청휘가 미리 신식으로 그를 감싸둔 터라 공포에 눌리지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그대는?”
궁우신이 운청휘에게 시선을 둔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상하군. 저자의 용모가 낯설지 않은데, 본좌와 마주친 적이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