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운청휘는 부친을 닮은 터라, 동생인 채아와는 외모가 딴판이었다.
그런데도 궁우신이 기시감을 느낀 건, 운청휘의 부친의 영향이었다.
채아에게 마종을 심은 후 연이 닿아 운청휘의 부친과도 짧게나마 마주쳤으므로.
다만 궁우신은 채아의 부모에게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고, 그 결과 운청휘를 보고도 바로 떠올리지 못하고 미심쩍어 하고 있었다.
“이 후배도 모릅니다. 노상강도 일도 방금 후배의 형제인 도도에게 들었습니다.”
운청휘가 겁에 질린 표정을 보이며 답했다.
두 사람의 반응에 궁우신은 어쩐지 맥이 풀리고 말았다.
그의 기에 휩싸이고도 노상강도의 일을 부인했으니, 그들은 정말로 이 일과 연관이 없는 듯했다.
그는 즉시 당가와 이가로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두 가문 또한 소가와 적잖은 원한이 있으니, 그들을 배재할 수는 없었다.
떠나기 직전, 궁우신이 소도도를 힐끗 보더니 생각에 잠겼다.
‘월경 8단계에 사성 기재라. 순조롭게 성장한다면 반드시 영단경에 들 인재로군.’
생각을 마친 궁우신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투명한 구슬이 그의 손가락 위에 떠올랐다.
구슬을 곧 가볍게 날아올라 소도도의 미간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를 목격한 운청휘의 표정은 미동도 없었지만, 꽉 쥔 주먹 사이로 핏물이 흥건하게 배어나왔다.
-어서 무릎을 꿇거라! 본좌가 바로 네놈이 무릎을 꿇을 대상인 천검종주이니라!-
궁우신의 목소리는 마치 소도도만 들을 수 있는 벼락처럼 그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다음 순간, 소도도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몸의 통제력만 잃었을 뿐만이 아니라, 소도도는 자신의 영혼과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느낌을 받았다. 그의 생사마저도 눈앞의 궁우신에게 달려 있었다.
“마종? 내게 마종이 심어지다니!”
자신에게 일어난 현상에 소도도의 머릿속에는 마종만이 떠올랐다. 그의 안색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궁우신은 당연하다는 듯 소도도를 데리고 떠나려 했다.
“떠나기 전에, 형제와 몇 마디 나눠도 되겠습니까?”
소도도가 공손히 부탁하며 궁우신을 우러러보았다.
“빨리 끝내도록.”
궁우신의 허락이 떨어지자, 소도도는 즉시 운청휘를 향해 말을 쏟아냈다.
“운 형제, 세 가지만 부탁함세. 부디 노소가의 위험을 막아 주게나! 그리고 소엽과 이가 후계자의 혼사를 막아 주게. 내가 아는 소엽은 절대 나와 파혼할 여인이 아닐세! 만약 소엽이 기다려 준다고 하거든, 내가 3년 안에 돌아와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전해 주게. ……그러지 못한다면, 운 형제. 부디 믿을 만한 이를 찾아 소엽을 부탁하겠네. 마지막으로, 조부님이 깨어나시거든 내가 천검종으로 갔다고 전해 주게나!”
말을 마친 소도도가 운청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지. 이 소도의 삶에서 가장 큰 행운은, 자네라는 형제를 만난 걸세!”
말을 마친 소도도는 다시 궁우신에게 향했다. 궁우신이 손을 휘두르자, 네 사람은 순식간의 운청휘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운청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지만 두 눈에 한기가 흐르고 주먹을 쥔 양손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이제는 분노를 더 억누를 이유도 없었다.
까드득……!
운청휘가 기운을 일으키자, 대전 안의 가구를 비롯하여 벽에 걸린 서화, 야명주마저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무위가 떨어진 이후, 운청휘는 이미 여러 번 존엄을 훼손당했다.
무엇보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형제 소도도에게 마종이 심어지고, 강제로 끌려가는데도 말 한마디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보통의 사람에게 참는 일 또한 일종의 수행이며, 인내심이 강한 이를 당해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무위가 떨어졌다고 해도 그는 선제인 운청휘다. 그에게 있어 그동안 인내라는 글자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이 순간, 인내(忍)라는 글자에 있던 칼(刃)이 그의 가슴에 꽂히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다. 만약 소도도의 앞에서 분노하여 나섰다면 그는 궁우신에게 살해당할 게 뻔했다.
더불어 소도도를 처음 보고도 그의 천부적인 자질을 높이 사 바로 마종을 심는 자라면, 채아에게도 분명히 마종을 심었을 터.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허무하게 죽을 수 없었다.
‘궁우신은 현경의 무인이다.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마종을 심어둔 자의 무위가 영단경이 되어야 회수할 터. 채아는 구음한맥(九阴寒脉)의 영향으로 수련 속도가 다른 이의 100배는 빠를 테니, 길어도 1년 안에 영단경에 오르겠군. 이미 반년이 흘렀으니, 반년 안에 채아를 천검종에서 구해야만 한다!’
운청휘의 가슴 속에서 노여움과 함께 절박함이 들끓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그는 다시금 선제에 필적하는 무위를 회복했을 테지만, 지금은 반년 안에 궁우신을 꺾어야만 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맨몸으로 하늘로 걸어 올라가는 수준의 어려움이 그를 기다릴 터였다.
‘인내라는 글자는 가슴에 꽂힌 칼이 아니던가. 오늘의 굴욕은 참을 수밖에 없지만, 언젠가는 천 배, 만 배로 궁우신에게 갚고 말겠다!’
운청휘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평정을 되찾았다.
‘분노만으로는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없구나. 약육강식은 어디에 가도 변하지 않는 법칙이거늘. 지금 해야 할 일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무위를 회복하는 게 아니더냐. 그래야만 나와 중요한 이들을 지킬 수 있거늘!’
선제인 만큼, 운청휘는 약육강식의 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실력이 없는 자의 분노만큼 무의미하게 자신을 소모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모든 분노를 억눌러 깊이 묻어두고, 그날로 밀실에 틀어박혀 선천영액의 흡수에 집중했다.
하룻밤 만에 그는 19억 냥으로 환산할 수 있는 선천영액 4,500여 방울을 전부 삼켜 버렸다.
선천영액은 황급 단약보다 진귀한 영액으로, 무위를 올리는 대신 흡수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보통의 양경 무인이었다면 영액 한 방울을 흡수하는 데 하루 이상이 걸렸겠지만, 운청휘는 하룻밤으로 충분했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의 자질에 경악함과 동시에 천운왕조가 백 년을 존속할 수 있는 비용이 하룻밤 만에 사라졌다는 사실에 허탈함을 금치 못할 터였다.
“음? 선천영액을 전부 썼건만, 양경 5단계에서 8단계가 고작이란 말인가?”
무위를 확인한 운청휘는 실망을 감추지 못했지만, 곧 선식양정을 꺼내들었다.
“선식양정이라면 단번에 선천경에 이를지도 모르겠구나.”
운청휘의 눈에 또다시 절실한 빛이 어렸다.
만약 선천경에 도달한 후 세계수를 흡수한다면, 그의 무위는 쏘아 올린 화살처럼 폭주할 터였다.
무엇보다 선천경지에 이르면 영라반지에 담아 둔 수많은 신물을 쓸 수 있었다. 운청휘는 기대와 절실함을 담아 선식양정을 삼켰다.
그 순간, 그의 전신에서 피부가 폭발하듯 터지고 피가 솟구쳤다.
선식양정에 있는 선기뿐만이 아니라, 천지간의 영력도 흐름을 따르는 물결처럼 운청휘에게 흘러들어왔다.
만약 진법을 미리 펼쳐 두지 않았더라면, 방금의 변화는 온 연라성을 뒤흔들고도 남을 터였다.
* * *
운청휘가 선식양정의 연화에 집중하고 있을 때, 소도도의 조부 소원항(苏远航)의 의식이 돌아왔다.
“소순 총관, 이게 무슨 일인가? 누가 나를 구했지?”
소원항의 시선이 늙은 총관에게 향했다.
“가주님께 아룁니다. 도도 소가주의 벗이 가주님을 구하였습니다.”
늙은 총관이 며칠간 일어난 일을 상세히 고했다.
“지금은 도도 소가주를 비롯한 친구분도 사라진 상태입니다!”
소순이 말을 마치며 덧붙였다.
소순은 소도도에게 일어난 일을 아직 모른다. 운청휘가 일부러 알리지 않았기에, 이 늙은 총관은 그저 두 사람이 할 일이 있어 떠난 줄로 알고 있었다.
“도도가 돌아왔단 말이냐?! 게다가 도도의 친구가 내 몸의 독을 모두 제거했다고?”
소원항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렇습니다, 가주님. 소가주께서 집안의 변절자들도 처단하였지만, 오늘 소원이 돌아올 예정입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늙은 총관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소원? 흥, 돌아온다니 잘 되었군. 노부가 직접 찾아갈 필요가 없으니까!”
소원의 소식을 듣자마자 소원항의 눈에 분노의 빛이 어렸다.
“소 총관. 반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가? 그때의 일에 소원이 연관되어 있다네.”
반년 전 소도도를 데려오려던 소원항은 세 가문의 매복 공격을 받아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천신만고 끝에 포위를 뚫고 돌아왔지만, 소원의 계략에 빠져 독에 당하고 말았다.
소원항이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소원은 세 가문에 정보를 흘린 이가 자신임을 밝힌 터였다. 그 순간을 떠올리니 절로 이가 갈렸다.
“소 총관, 가주님께서 깨어나셨나? 큰일 났네!”
석실 바깥에서 대장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며 다른 이들의 발소리가 뒤섞였다.
“소원이 당·이·소 가문의 가주들을 데려왔네! 더욱이 건곤 경매장의 청의노인도 함께일세!”
“뭐라?”
막 깨어난 소원항의 안색이 변했다.
“가, 가주님이 정말 의식을 찾으신 건가! 가주님을 뵙습니다!”
대장로를 포함한 네 명의 장로들이 황급히 석실로 들어왔다, 그들은 똑바로 서 있는 소원항의 모습에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대장로, 사장로, 오장로, 육장로, 그동안 고생 많았네!”
소원항은 네 명의 장로를 보며 말했다.
“나가세!”
소원항은 장로들을 이끌고 석실을 떠났다.
노소가의 대문으로 향하던 중, 굉음과 함께 노소가의 대문이 벌컥 열렸다.
“나 소원은 노소가에 충성을 다했으나, 노소가는 내 충심을 알아주지 않았다! 심복과 아들마저 잃었으니, 오늘 노소가를 멸문시키고 말겠다!”
소원의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노소가 전체를 뒤흔들었다.
콰앙!
그는 고함을 내지르는 동시에 오행의 힘을 일으켜, 주변에 있던 노소가의 호위병과 하인들을 휩쓸었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질러보지 못하고 죽은 이들이 이백 명이나 되었고, 그들의 선혈이 대지를 붉게 적셨다.
“소원, 네놈이 감히!”
그 광경에 소원항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뜨며 소원을 노려보았다. 두 눈에 어느덧 핏발이 서 있었다.
“소원항, 깨어난 게냐?”
기세가 넘치는 소원항을 마주하자 소원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지만, 금세 두려움을 억누르며 코웃음을 쳤다.
그 혼자라면 모를까, 4대 가문 중 3개의 가문의 가주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더욱이 건곤 경매장의 청의노인까지 자신에게 힘을 보태고 있으니, 이전처럼 소원항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하하, 깨어났으니 잘됐군. 네놈 앞에서 노소가를 멸문시키고, 마지막으로 너를 죽이겠다!”
소원이 기세등등하게 웃으며 살기를 뿜어냈다.
쿵!
소원항은 대답 대신 오행의 기운을 일으켜 소원을 공격해 들어갔다. 오랜 시간 노소가를 지켜온 가주답게, 공격에서 막대한 위압감이 전해져 왔다.
“휘몰아쳐라!”
소원 또한 지지 않고 오행의 힘을 불러일으켰지만, 그의 자신만만한 외침과는 달리 바람은 금세 사그라들어 버렸다.
쿠당탕!
한껏 밀려 나간 소원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선천경 1단계가 노부 앞에서 무엄하구나.”
소원항이 살기가 가득한 눈을 번득이며 영력화장을 일으켜 소원을 움켜쥐었다.
“소원만 상대하면 되는 줄 아느냐!”
그때, 조소와 함께 세 가문의 가주들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