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맹세하겠습니다! 의부님을 정성껏 모시고, 노소가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제발 구해 주십시오!”
소원항의 고민을 알아차린 듯, 소원이 필사적으로 목숨을 구걸했다.
“젊은 친구, 그의 무위를 폐하고 살려 주…….”
아무리 배은망덕하다 해도, 직접 거두고 기른 아이가 아닌가.
더욱이 간절히 애원하기까지 소원항의 마음에 측은지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원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운청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안 됩니다.”
단호한 한마디와 함께 운청휘의 손이 소원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할아버님이 손수 거두고 길렀지만, 배은망덕한 자입니다. 잘못 기른 자이니, 살려 둘 수 없습니다.”
소원의 숨이 완전히 끊어지자, 운청휘는 바닥에 쓰러진 소법양을 흘끗 바라보았다.
“소법양은 할아버님께 맡기겠습니다. 도도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소가는 어떻게든 처리할 생각입니다.”
소원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도도를 언급했으니, 그가 소법양을 맡긴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소엽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아무리 그가 노소가를 치러 왔다 한들, 그를 죽인다면 소엽은 다시는 소도도와 엮이지 않게 될 터였다.
“이보게. 선천영액 500방울이라네. 노부가 줄 수 있는 전부일세.”
그때, 청의노인이 다시 제안했다.
운청휘가 신식을 펼쳐 확인하자, 청의노인의 말처럼 선천영액 500방울이 확실히 그의 아공간 반지에 들어 있었다.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곧 운청휘는 옅은 숨을 내쉬며 소원항에게 넘겨주었다.
“할아버님, 노조의 사죄입니다. 만약 용서하시려거든 받으십시오.”
운청휘는 곧 건조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용서하시지 않아도 무관하니 일단 받으십시오. 그 후에 노조를 죽이겠습니다.”
청의노인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지만, 감히 입을 열 수 없었다.
운청휘가 선보인 무위에 이미 압도당했을 뿐더러, 그의 결단력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건곤 경매장의 사람이니, 살려 주시게.”
소원항이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소, 노소 가주!”
청의노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진심을 다해 소원항에게 감사를 표했다.
“할아버님께서는 네놈을 용서했지만, 이 일을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죽을죄를 면했지만, 안심하지 말거라.”
애초에 운청휘는 청의노인을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늦게 도착했더라면, 소운항은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었으리라.
운청휘가 손짓하자, 별안간 청의노인이 허공을 가르며 끌려와 꼼짝달싹할 수 없이 구속되었다.
그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동안, 운청휘는 그의 경맥에 혼탁한 기운을 흘려 넣었다.
“무슨 짓을 하는 게요?”
공포에 질린 청의노인이 운청휘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네놈의 몸에 제약을 걸어 두었다. 1년 안에 내가 손을 쓰지 않는다면 몸이 터져 죽게 되겠지. 1년 동안 할아버님을 성심껏 모시도록. 1년 후에 내가 돌아와 네놈의 행적을 보고 결정하겠다.”
청의노인이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1년만 소원항을 모시면 살려 주겠다는데, 어찌 망설일까!
“할아버님. 노조와 함께 세 가문을 치러 가십시오.”
운청휘가 소원항을 바라봤다.
“알겠네!”
소원항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스레 대답했다.
이 각 후, 소원항은 노소가의 무인들을 모아 가장 먼저 당가로 향했다.
소원을 대할 때와 달리, 당가를 공격하는 소원항에게서는 어떠한 자비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는 당가의 모든 고위층을 살해한 후에야 이가로 떠났다.
이가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소가에서는, 이전과 같은 학살이 아니라 교섭이 펼쳐졌다.
소원항은 노소가에 편입되길 원하는 이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소원항의 행보는 이날 연라성 전체를 뒤집어놓았다.
쇠퇴해가던 노소가가 다른 세 가문을 멸문시키고 연라성의 패자가 되었다.
그 모든 과정이 홀연히 나타난 한 젊은이와 관련이 있다고 전해졌지만, 정확한 정체를 아는 이는 드물었다.
소원항이 일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주변은 어둠이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소원항은 가장 먼저 운청휘를 찾아가 감사를 표했다.
“운 공자, 그대의 노고에 감사하네. 한데, 자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있네.”
소원항은 면목이 없는지 쉽게 운을 떼지 못했다. 그도 운청휘가 노소가를 위해 한 일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또 운청휘에게 부탁하려니, 가주로서 면이 서지 않는 일이긴 했다.
“이가의 후계자가 안양행성 최대의 세력에 들어갔다는군. 만약 우리가 이가를 멸문시켰다는 걸 알면, 반드시 혈문전의 사람들을 데려와 복수하겠지,”
혈문전?
어딘가 익숙한 단어에 운청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혈문전은 누가 세웠습니까?”
“시조는 혈문노조 진관해로 알려져 있네.”
소원항이 진관해를 언급할 때, 꺼림칙한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었다.
“진관해는 운역 최고의 진법대사일 뿐만 아니라, 천검종의 사람일세. 운역 운가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네.”
‘역시 그자였군.’
운청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20여 일 전, 천운왕조에서 헤어질 때 진관해는 혈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영패를 건네주지 않았던가. 더욱이 그의 별호가 혈문노조였으니, 자연스레 진관해를 떠올릴 수밖에.
“그렇지, 운 공자여. 도도는 대체 어디로 간 건가?”
소원항이 내내 궁금했던 말을 꺼냈다.
“……도도는 천검종에 있습니다.”
운청휘는 잠시 머뭇거리다 일부만을 전했다.
“뭐라고?!”
소원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변에 있던 이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감탄을 내뱉었다.
“하하하! 조상님의 가호가 아닌가! 도도가 천검종에 들어갔다니!”
천검종의 규모를 생각하면, 천검종의 일원이 되었다는 건 가문을 빛내는 일과 다름없었다.
더욱이 소도도가 품고 있는 피맺힌 원한을 고려한다면, 소도도는 복수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낸 셈이다.
물론 소원항의 생각처럼 순조로운 과정이 있었던 게 아니기에, 운청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화제를 돌렸다.
“송신매를 이용하면 이곳에서 혈문전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어디 봄세. 송신매는 하루에 2만 리를 갈 수 있으니, 안양성의 혈문전까지라면 반나절이 걸리겠군.”
소원항은 의아해하면서도 선선히 알려 주었다.
“서신을 써서 혈문전에 있는 이가의 후계자에게, 연라성의 일을 알려 주십시오.”
운청휘는 담담하게 말하곤 곧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 무위는 선천경 5단계라는 내용도 덧붙여서 말입니다.”
운청휘가 이리 나오는 건 따로 계획이 있어서였다.
이가의 후계자는 운청휘에게 아버지를 잃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반드시 혈문전의 고수들에게 도움을 청하리라.
다음 날 정오 무렵.
연라성 밖의 상공에서 수십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개중 무위가 가장 약한 이도 양경의 무인이었고, 선천경 무인도 9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모두 가슴에 ‘혈문’이라는 두 글자가 수놓인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보라구, 하늘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어.”
누가 소리를 질렀는지 하나같이 허공을 쳐다봤다.
“아, 저 청년은 이가의 후계자 같은데.”
“이가가 멸망한 지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돌아오다니!”
“응? 이가 후계자와 같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지? 저 옷에 수놓은 글자, 서, 설마 혈문전?”
“이럴 수가, 이가의 후계자가 혈문전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사실일 줄이야.”
“노소가가 상대를 잘못 건드렸군!”
“연라성의 패자로 군림하나 싶었는데, 옥좌에 앉을 시간도 없겠구만!”
그들은 꽤 낮게 떠올라 있었기에 많은 연라성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장로님들. 부디 이가의 복수를 부탁드립니다.”
이가 후계자가 혈문전의 몇 장로에게 말했다.
“전주께서 계시지 않으니, 당연히 우리가 자네를 위해 나서야지. 자네는 전주께서 아끼는 제자가 아닌가.”
“어서 노소가로 안내해 주시게. 시간이 없으니, 빠르게 치고 안양성으로 돌아가야 한다네.”
“그 말대로라네. 전주께서 곧 돌아오실 텐데, 마땅히 마중을 나가야지.”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그들은 이미 노소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 * *
이가 후계자와 혈문전 사람들은 노소가 앞에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때 노소가의 저택 앞에는 천여 명이 넘는 구경꾼이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의 수는 구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더니, 순식간에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이대로라면 연라성의 주민 절반이 노소가의 재난을 보러 올 듯했다.
바로 어제 연라성의 패자가 된 노소가지만, 하루아침에 그 영광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떠들기 좋아하는 이들에게 이만한 구경거리도 없으리라.
이가의 후계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길 기다리는지 잠자코 서 있었다.
일 다경 후, 그가 혈문전의 네 장로들을 힐끗 살피곤 그들의 얼굴에 서린 초조함과 짜증을 알아차렸다.
그는 두말 않고 영력으로 만들어 낸 거대한 손을 휘둘러 저택의 대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콰앙!
굉음과 함께, 저택에 있던 모든 이들이 벌떡 일어나 몰려나왔다.
그 시각, 운청휘는 또다시 밀실 정중앙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유백색의 선석이 들려 있었는데, 순수하고 짙은 선기가 흘러나왔다.
운청휘의 몸에 담긴 영력을 능가하는 힘이었으나, 지금으로서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천성대륙의 돈으로 비유한다면, 이 선석은 은표라고 할 수 있다.
은표 아래에 은냥이 존재하고, 은냥의 아래에 동판이 있다.
어제 삼킨 선식양정의 선기는 동판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그의 예측대로라면 선천경에 돌입해야 이 선석에서 힘을 흡수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게 가능한 순간이 오면, 무위를 회복하는 속도는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이 빨라지리라.
운청휘는 선석을 영라반지에 넣은 후, 잠시 생각한 끝에 영라반지 안에서 다섯 권의 무공서를 꺼내들었다.
<초시어목술(初始御木术)>,
<초시공화술(初始控火术)>,
<초시인수술(初始引水术)>,
<초시어토술(初始御土术)>,
<초시점금술(初始点金术)>.
이 다섯 권의 무공서에는 운청휘가 직접 만들어 낸 무공이 담겨 있다.
다만 선천경의 경지였을 때 만들었던 터라 등급이 높지 않았고, 선계에서 익히기에는 부적절해 천성대륙의 기준에서도 천급에 들었다.
물론 부적절하다고 해도 다른 이들에게만 해당할 뿐이다.
운청휘가 지금 이 무공을 꺼낸 건, 이 무공들은 서로 배합해서 사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의 전투력을 몇 배에서 수십 배나 향상시켜 주기 때문이다.
가령 공화술과 인수술을 배합하여 사용했을 때 공화술은 강철로 이루어진 산을 달궜고, 인수술로 큰물을 끼얹자 산 전체에 금이 가더니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즉, 한 가지의 무공을 사용할 때보다 더 강한 위력을 선보일 수 있었다.
보통의 무인이라면 이 다섯 가지 무공 중 하나만 수련할 수 있을 터였다.
특히나 오행의 힘이 강한 무공이기에 초시어목술은 목 속성의 선천생령만 수련이 가능한 식이었다.
운청휘는 동시에 다섯 가지를 수련할 수 있었는데, 그가 선계에서도 진귀한 선제이자 타고난 재능의 힘이었다.
“음?”
밀실 밖에서 굉음이 들려 온 순간, 운청휘의 안색이 희미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