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천운왕조의 황성, 아무도 없는 허공에 두 개의 신형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운청휘는 곧바로 신식을 펼쳤다.
백부 운한, 조부 운상, 사촌 형 운현의 위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침 운현은 어서재에서 상소문을 읽고 있었다. 곤룡포를 차려입은 그에게서 저절로 사람을 압도하는 기세가 흘러나왔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았건만, 이렇게나 성장했단 말인가.”
운청휘로서도 다소 뜻밖이었는지, 그의 목소리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예상보다 형님의 기운이 훌륭하군. 고민했건만 형님께 무공을 전수하는 데 충분하겠군.”
어느새 황성의 절반 가까이 신식을 펼친 운청휘는 백성들의 모습도 천천히 훑어보았다.
운가가 왕조를 이어받은 후, 백성들이 편안히 지내는지 궁금하던 터였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황제 운현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했고, 그들의 삶은 천원왕조 시절보다 풍요로웠다.
운청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 시각, 삼 장에 달하는 긴 서류를 전부 읽은 운현이 용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청휘 이 녀석, 이리 큰 나라를 내게 맡기고 어딜 돌아다니고 있는 거냐.”
운현은 작은 목소리로 원망을 내뱉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픈 듯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형님. 험담은 황제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입니다.”
별안간 그의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청휘냐?!”
단번에 운청휘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운현이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과연, 붉은 장포에 빈 검집을 짊어진 운청휘가 서 있었다.
“청휘야, 숙부님과 숙모님, 그리고 채아는 찾았느냐?”
불쑥 질문을 던진 운현은 운청휘의 눈에 깃든 실망을 읽어냈다. 그는 섣불리 물어본 일을 후회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청휘야, 옆에 있는 자는 누구더냐?”
운현이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때마침 운청휘의 뒤에 호천천이 공손히 서 있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노부는 운청휘 대인의 부하입니다.”
호천천은 곧장 자세를 낮추며 공손히 아뢰었다.
운청휘의 태도에서 친밀감을 느꼈기에, 직감적으로 운현이 그의 가족임을 알아차린 터였다.
반면 운현은 눈을 크게 뜨며 호천천을 바라보았다. 호천천에게서 느껴지는 선천의 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터였다.
“호오. 한 달간 보지 못했는데, 청휘에게 선천경의 부하가 생겼구나. ……잠깐, 선천경?”
운현은 호천천을 빤히 보더니 운청휘를 데리고 구석으로 갔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말했다.
“청휘야, 부탁 하나만 하자. 저자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물론입니다. 몇 번이든 상관없으니 말씀하십시오.”
운청휘의 진중한 시선이 운현에게 닿았다.
“형님, 왕조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운현은 대답 대신 재차 질문을 이어갔다.
“청휘야, 네 부하는 선천경 몇 단계인 거냐?”
“선천경 5단계입니다.”
운청휘가 선선히 답했다. 다만 호천천이 1,000명이 있어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음은 밝히지 않았다.
운현이 마침내 안심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청휘야, 막성(漠城)은 천운왕조 서북쪽 강역의 성지다. 막성에서 북상하면 황무지가 나오지. 그곳에 흡혈을 하며 살아가는 종족이 살고 있는데, 천원왕조 대에서는 종종 막성에 침입해 사람들을 공격했다더구나. 그 때문에 100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막성을 지켜왔지. 한데 보름 전 수천 마리가 넘는 흡혈 박쥐족이 침범하더니 며칠 전엔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나타났지. 그들의 우두머리는 선천경의 무위를 지녀, 막성에 진을 쳤던 성공학관의 원장 마라에게도 중상을 입히고 말았다.”
흡혈 박쥐족은 사람도 영수도 아닌 종족으로, 선계에서는 짐승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습성이 박쥐와 비슷한 데다 날카로운 이빨과 검은 날개가 달려 생김새도 유사했다.
무엇보다 흡혈로 생명을 유지하기에 자연스레 흡혈 박쥐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다만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흡혈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사람을 노렸다면 운역이나 천검종은 진작에 사라졌으리라.
그들이 사람을 해치지 않으니, 천검종은 서북쪽 황무지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존재를 묵인하게 되었다.
선계에서도 흡혈 박쥐족은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개중에는 운청휘의 수하가 된 자들도 있어, 운청휘가 직접 묻기도 했다.
그들이 사람의 피를 먹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에게 사람의 피는 저급한 맛이 날뿐더러 무위가 낮은 박쥐족이 사람을 흡혈하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형님께 무공을 하나 전해드리겠습니다. 막성은 그 후에 가겠습니다.”
말과 동시에, 운청휘는 신식을 펼쳐 운현의 머릿속에 직접 무공을 전했다.
“국운을 다스리는 법? 이게 무슨 무공이냐?”
갑작스레 머릿속에 무공이 흘러들어오자, 운현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냈다.
“이건 무척 높은 등급의 무공입니다. 백부님과 조부님께도 비밀로 해 주십시오.”
운청휘가 엄숙하게 말했다.
“무공의 특징에 대해서는…….”
이윽고 무공의 특징까지 운현의 머릿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왔다.
“왕조 전체를 모으는 힘을 수련한다니, 세상에는 정말 신기한 무공이 다 있구나!”
운현의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졌다.
이 무공의 수련이 절정에 달한다면, 그는 왕조 내의 무인 중 삼 할에 달하는 이들의 힘을 빌릴 수 있게 된다.
가령 무인 인구가 10억 명이라면, 10억 명 중 삼 할에 이르는 무인의 힘이다.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수련이 절정에 달했을 때의 이점이 또 있었다.
그가 원하면 언제든지 천운왕조 모든 백성의 마음에 말을 걸 수 있었다. 법령을 공표할 때 일일이 교지를 내리는 것보단 훨씬 편리할 터였다. 물론 절정까지 수련했을 때라는 전제이지만.
운청휘가 전해준 무공은 총 10단계로 나뉘어 있다. 운현의 천부적 자질을 고려한다면 절정까지 도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였다.
1단계라면 1,000분의 1의 힘밖에 빌릴 수 없다. 무척이나 작은 숫자이지만, 인구의 수를 고려한다면 운현은 선천경 무인과 버금가는 전투력을 지닐 수도 있다.
“형님. 모든 가정에 자녀를 많이 낳을수록 은냥을 지급하는 법령을 공표하십시오. 또한, 외부의 인구를 천운왕조에 합류할 수 있도록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단, 아무나 받을 수는 없습니다. 무도의 기재, 일류 장사꾼, 연단술사 등 뛰어난 인재만이 천운왕조에 들어오게 하십시오.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형님께 드리겠습니다.”
선제 시절 수많은 생령들을 휘하에 둔 운청휘였기에, 정치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었다.
천운왕조의 인구가 늘어날수록 국력이 강대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자연히 인구 증가가 최우선의 문제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 운청휘는 미리 생각해 둔 내용을 정리하여 운현에게 전달했다.
운한과 운상을 찾아간 운청휘는 그들에게 백 개의 단약을 전해 주었다.
운청휘가 가져온 단약은 기본적으로 양경 흉수의 내단을 정제한 것이고, 일부는 선천경 흉수의 내단을 정제했다. 흉수산맥을 뒤져가며 흉수들을 잡은 이유가 있었다.
“형님, 백부님, 할아버님. 10일 간격으로 이 단약을 복용하십시오. 이변이 없다면 양경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운청휘의 말에 운한과 운상은 거의 혼비백산할 지경이었다.
운청휘가 가져온 단약은 국고를 털어도 몇 알을 구하기 힘들 만큼 고가의 물건이 아니던가. 그런 단약이 한 번에 백 개가 생겼으니, 혼이 빠지도록 놀랄 수밖에.
다만 운현만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무공도 못지않게 희귀한 것이었으니.
“청휘야, 이제 겨우 돌아왔는데 벌써 떠난단 말이냐?”
백부 운한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빨라도 1년 반, 늦는다면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운청휘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천검종으로 가는 길이니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지만, 굳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들과 식사를 마친 운청휘는 호천천과 함께 극광성으로 향했다. 성공학관의 원장 마라는 다시 학관 최심부의 탑에 머무르고 있었다.
“운청휘, 마침내 돌아왔구나!”
가부좌를 틀고 있던 원장 마라는 운청휘를 알아차리자마자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이 단약을 먼저 드십시오.”
운청휘도 빙그레 웃으며 원장에게 단약을 건넸다.
원장은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단약을 복용했다. 과연,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그의 내상이 이 할 이상 치료되었다.
앞으로 이틀만 지나면 내상이 말끔히 나으리라.
“운청휘, 자네가 본좌를 찾아온 건 흡혈 박쥐족 때문이겠지?”
원장이 운청휘를 바라보며 운을 떼었다.
“박쥐족의 습격으로 중상을 입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 단약이 도움이 될 겁니다. 더불어 흡혈 박쥐족에 대해서 물어볼 것들이 있습니다.”
운청휘가 본론을 꺼냈다.
“본좌는 흡혈 박쥐족과 친분이 있고, 개중에는 친우라 부를 수 있는 이도 있었다네. 그러나 이번에 온 박쥐족들은 이성을 잃은 괴물이나 다름없었지! 동물이든 사람이든, 피를 가진 생명이라면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왔다네.”
기억을 더듬는 원장의 안색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묵묵히 듣고 있던 운청휘는 뭔가를 떠올린 듯 얼굴을 굳혔다. 그의 잔잔한 눈에 노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원장님,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운청휘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 순식간에 신형을 감추었다.
그는 곧바로 성공학관을 빠져나가, 이 각 후에는 서북의 막성에 도달해 있었다.
“대인, 이 흡혈 박쥐족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계신 거죠?”
엉겁결에 끌려온 호천천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원장의 말대로라면 이들은 흉수나 다름없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선천경에 접어든 이들마저 이상 행동을 보였으니, 한 가지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운청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고, 눈에는 분노가 차올랐다.
“무슨 가능성이죠?”
호천천이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들은…….”
운청휘가 설명하려는 순간, 막성의 서북쪽 성문 상공에 검은 점들이 빼곡히 번지기 시작했다. 휘이잉-
공기 중에서 무수히 많은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점으로 보이던 것들이 점점 막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맙소사. 수십만 마리는 되겠습니다, 대인!”
호천천마저도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은 박쥐족 대군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쿵! 쿵! 쿵! 쿵!
서북쪽 성루에 줄지어 있는 열 개의 북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성의 모든 주민에게 보내는 경고이자 대피 신호였다.
성루 위쪽에 자리 잡은 성경과 월경의 무인 병사들이 긴장된 숨을 들이켰다.
“전보다 수가 늘었잖아!”
“얼핏 봐도 수십만 마리가 아닌가!”
“이럴 수가. 저들이 모두 미친 게 분명해! 전쟁을 일으키려는 거라고!”
“쳇, 몇이 되었든 집을 지켜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