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김태연은 이제 막 부상이 나은 터라 실력의 삼사 할만 발휘할 수 있었고, 운청휘에겐 시간이 부족했다.
직접 데리고 비행하는 편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서북쪽 황무지의 최심부로 향하며, 이지를 상실한 흡혈 박쥐족도 제거했다.
김태연은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인간인 운청휘에게 이지를 상실한 흡혈 박쥐족은 언제든 우환이 되리라는 사실을, 그녀도 이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흡혈 박쥐족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정신이 온전한 동족이 필요했다.
만여 리 가까이 날아간 후, 그들은 거대한 장벽을 마주했다.
이 장벽은 겹겹이 설치된 진법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운청휘의 신식으로도 그 끝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면적이 넓었다.
“봉천진지진(封天镇地阵)!”
대진을 알아본 운청휘의 동공이 움츠러들었다.
그로 그럴 것이, 봉천진지진은 최소 100명의 진선이 있어야만 만들어낼 수 있는 진법이었다.
“운 공자님, 이곳이 저희의 성지입니다. 1,100년간, 죽음을 앞둔 동족만 입장이 허락되었지요. 한데 보름 전, 성지에서 나타난 자가 어혼성숙비전으로 절반 이상의 동족을 조종했습니다.”
김태연의 설명에도 운청휘는 묵묵히 신식을 펼쳐 성지를 관찰했다.
봉천진지진으로 인해 그의 신식도 성지 내부까지 닿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발견이 있었다. 비록 내부를 살필 수는 없었으나, 희미하게 다른 세계의 기운이 감지되었다.
‘이곳은 다른 세계와 연결된 전송진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둔 흡혈 박쥐족만 성지의 출입이 허락된다고 하였느냐?”
운청휘가 김태연을 힐끗 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반대로 생명력이 왕성한 이는 결계의 배척을 받게 됩니다.”
김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소저는 어떻게 들어갔지?”
운청휘가 재차 물었다.
“저도 이곳의 이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도 불가사의하다는 듯 답했다.
“그분은 스스로 걸어 들어갔고,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았어요.”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
운청휘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신식으로 온몸을 감쌌다.
온몸의 기를 봉천진지진과 같은 성질로 바꾸었기에, 그가 성지 안으로 발을 내디뎌도 어떠한 영향이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김태연만 깜짝 놀랄 뿐이었다.
“운 공자께서도 성지 결계의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군요.”
감탄사를 내뱉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이상하네요. 운 공자께서는 백 보 이상 걸었는데, 왜 제자리에 머물러 계신 거죠?”
‘역시, 이곳은 다른 세계와 연결된 장소가 확실하군.’
천천히 걸었다고는 하나, 제자리에서 나아가지 못하자 운청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계의 영향이 아니군. 진법 외에 다른 기운이 진입을 막지 않았느냐.”
‘이곳은 왜 죽음을 앞둔 이들만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운청휘의 마음속에 의혹이 점점 더 짙게 깔렸다.
천성대륙에 돌아온 이후로 그가 모르는 일들이 번번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곳이 정말 범인들이 사는 세계가 맞단 말인가?
그러나 운청휘는 당장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김태연에게 질문을 던졌다.
“동족 중 조종당하지 않은 이들은 몇 명이나 되느냐?”
“삼 할도 되지 않는답니다.”
김태연의 눈에 짙은 슬픔이 스쳤다.
“구체적인 숫자는?”
운청휘가 나지막이 물었다.
“5천여만 명 정도 될 거예요.”
잠시 생각하던 김태연이 숫자를 읊었다.
‘그렇다면 나설 가치가 있겠군.’
생각을 마친 운청휘는 영라반지에서 진법에 필요한 재료들을 꺼냈다.
김태연은 가만히 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운청휘가 별다른 설명 없이 설치에 집중했기에 긴 침묵이 흘렀다.
결국 이 각이 흐른 후, 참지 못하고 김태연이 질문을 던졌다.
“운 공자님, 진법을 설치하시는 건가요?”
“그래.”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한 자가 누구인지, 왜 여기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진법에 가두어 두겠다.”
이 각이 흐르자, 운청휘는 진법의 설치를 마쳤다.
그 순간, 눈부신 금빛 광채가 봉천진지진 전체를 뒤덮었다.
‘이 자리에 진관해가 있었다면, 분명 금수진(金囚阵)을 보고 감탄했겠군.’
진관해를 떠올리며, 운청휘는 자신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진 위에 또 다른 진법을 설치한다. 애초에 진법을 겹치는 시도부터 대사급의 진법대사만이 가능하며, 금수진은 선계에서 사용되는 진법이다. 죄수를 가두는 역할을 하기에 출구가 없는 게 특징이었다.
다만 운청휘가 봉천진지진 위에 설치한 금수진은 봉천진지진의 힘을 받아 작동하며, 금수진을 파훼하려면 봉천진지진을 먼저 파훼하도록 설계해 두었다.
“운 공자님, 이 진법은 성지 안에 있는 사람도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나요?”
김태연의 얼굴에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운청휘의 진법이 있으니, 흡혈 박쥐족이 더는 해를 입지 않을 터였다. 자연스레 기대의 빛이 어렸다.
다만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그녀의 근심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소저가 걱정되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운청휘가 입을 열었다.
“안심하도록. 이 소저가 통과할 수 있도록 손을 써 두었다.”
운청휘는 금수진 안에 파신전의 기를 융합해 두었다.
이염죽이 이곳을 지날 때 파신전을 지니고 있다면, 금수진을 무사히 지날 수 있을 터였다.
“시간이 되었으니, 이만 가보지.”
일을 마무리한 운청휘가 돌아갈 채비를 했다. 바로 내일이 진관해와 만나는 날이니, 한시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운 공자님, 제게 보답할 기회를 주세요!”
김태연이 허리를 가볍게 숙이며 청했다.
그녀의 종족은 은원이 확실하여, 은혜든 원한이든 평생을 잊지 않는다.
운청휘는 그녀뿐만 아니라 5천여 만에 이르는 흡혈 박쥐족을 구한 셈이니, 서북쪽 황무지의 은인이라 불려 마땅했다!
흡혈 박쥐족의 특성을 알고 있는 터라, 운청휘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네가 그리 간절하다면, 선천생령급의 동족 중 이지를 상실한 자들을 가두어 두도록. 후에 찾으러 오겠다.”
이지를 상실한 흡혈 박쥐족 중 선천생령급이라면 흡혈을 통해 혈정을 생성한다. 지금의 운청휘에게는 선석보다 귀중한 물건이었다. 영라반지에 쌓인 선석은 등급이 너무 높아 흡수할 수 없었지만, 혈정은 그에게 영약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다인가요?”
그녀의 눈에 짙은 실망의 빛이 어렸다. 그녀와 동족이 입은 은혜를 천만분의 일도 갚지 못하는 요구가 아닌가!
한참을 망설이던 김태연이 결정을 내린 듯 간곡하게 청했다.
“운 공자님, 부디 제가, 아니 저희 종족이 입은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주세요! 공자님 곁에서 노비가 되어 모시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운청휘는 고개를 저으며 단번에 거절했다.
“너희를 구한 건 보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운청휘는 주관이 뚜렷해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뿐이지만, 박쥐족의 습성을 아는 터라 이대로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잠시 생각한 운청휘가 덧붙였다.
“그럼 이제부터 네 힘으로 천운왕조를 수호하거라.”
“알겠어요. 다음에 만나요, 운 공자!”
말을 마친 운청휘는 김태연의 인사를 뒤로하고 허공으로 훌쩍 솟아올랐다. 그의 신형은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져 있었다.
서북쪽 황무지를 방문한 후, 운청휘는 만족할 만한 수확을 거두었다.
천운왕조의 위기를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혈정 9개를 얻지 않았던가.
일단은 진관해와의 합류가 급하기에, 운청휘는 혈정을 영라반지에 넣은 후 만 리를 훌쩍 내달려 막성으로 향했다.
“대인, 일이 다 해결되었는지요?”
줄곧 막성의 하늘을 지키고 있던 호천천은 운청휘를 보자 날아갔다.
“그래. 어서 따라오도록.”
운청휘는 곧바로 영력으로 호천천을 감싸 흉수산맥 방향으로 향했다.
날이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음험한 짐승의 울부짖음이 끊이지 않았다. 흉수산맥의 중부 지역에 접어들며, 시도때도 없이 날개 달린 흉수가 곁을 스쳐 갔다.
운청휘는 가는 도중에 마주친 흉수 중 선천생령급의 흉수는 지나치지 않고 내단을 확보해 두었다.
이튿날 황혼이 질 무렵, 그들은 운역 안양해성의 안양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대인, 혈문전은 안양성 안에 있는데, 소인이 안내하겠습니다!”
호천천이 곧바로 앞장섰다.
곧 호천천은 운청휘를 장엄하고 엄숙한 궁전의 상공으로 이끌었다.
“전주를 뵈옵니다!”
궁전의 상공에는 혈문노조 진관해가 떠 있었다. 그에게서 피비린내가 물씬 풍겨왔다.
호천천은 곧바로 부복하며 외쳤다.
“사부님을 뵈옵니다!”
진관해는 대답은커녕 오히려 운청휘에게 훌쩍 날아가더니 몸을 숙였다.
‘대인이 정말로 전주의 사부였구나!’
그간의 의혹이 확신이 되자, 호천천은 자신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을 황급히 수습했다.
“나를 기다렸느냐?”
진관해가 나와 있을 줄은 몰랐기에 운청휘도 의외라는 듯 말했지만, 눈에는 흡족한 기색이 어렸다.
“오늘이 저희가 약속한 마지막 날입니다. 이 제자는 사부님께서 반드시 오시리라 생각하였습니다.”
진관해가 여전히 공손하게 말했다.
사실 그는 이틀 전 북역에서 돌아온 후로 줄곧 혈문전 상공에 머물러 있었지만, 굳이 자만할 필요가 없기에 말을 아꼈다.
“그렇군. 내 환심을 살 줄 아는구나.”
운청휘는 그를 칭찬하듯이 말하며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수련은 어떻게 되어가지?”
한 달 전, 진관해에게 진법과 무공을 전해주었기에 운청휘는 자연스레 경과를 물었다.
“자기동래결은 1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석 달 안에 2단계에 도달하겠습니다. 무공 중 4개는 수련하고 있으며, 제자는 2개의 진법을 설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관해가 숨김없이 답하며 운청휘를 향해 존경심과 경외감을 드러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