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1화
“네놈들이 천검종에 첩자를 심어 놨기 때문이 아니냐! 그것만 아니었다면 진작 종주님께서 혈살종을 멸망시켰겠지!”
돌연 강해가 발끈하며 반박했다.
“혈살종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하나 있지. 네놈들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나 잘 보거라!”
오당가는 히죽 웃더니, 강해 일행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오금련(乌金链)으로 묶어 둬라. 저놈들을 끌고 대인께 찾아가야겠다.”
비적들은 곧바로 검은 쇠사슬을 들고나왔다. 운청휘는 순순히 그들이 가져온 쇠사슬, 오금련에 묶였고, 독에 중독된 강해 일행은 분노를 터트리며 묶일 수밖에 없었다.
“쓰레기!”
“겁쟁이!”
유일하게 중독되지 않은 운청휘가 저항조차 하지 않으니, 강해 일행이 욕을 퍼부은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비적들은 선천경 2단계의 오당가를 제외하면 모두 양경 무인이었다.
계략에 당했다곤 하나 천검종의 내문 제자가 한참 무위가 낮은 이들에게 잡혔으니, 고개를 들지 못할 터였다.
“오당가,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길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적 하나가 감탄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강해라는 녀석이 자기들은 내문 제자니까, 후환이 두렵다면 풀어 달라고 넌지시 말하더군!”
“하하하! 순진하기 짝이 없는 도련님이구만! 심지어 선천경 5단계라고 하지 않았나? 죄다 선천경의 무인인데 이렇게 잡힐 줄이야!”
“그래, 힘 한 번 안 쓰고 이놈들을 생포했으니, 오늘은 정말 운이 좋구만!”
비적들이 자랑스레 떠들어 대는 동안, 오당가도 뿌듯한 얼굴을 보였다.
“지금까지 우리가 세운 가장 큰 공적이라고!”
“하하하, 그렇지! 신사 대인께서 어떤 상을 내리실지도 생각해 봐야겠어!”
“무려 6명이나 되는 선천경 무인이야. 신사 대인께서 반드시 상을 내리실걸?”
“신사 대인께서 만드시는 혈지에는 살아 있는 사람의 피가 필요해. 게다가 그곳에서 수련하면 수련 속도가 10배나 빨라진다며? 어쩌면 대인께서 우리도 혈지에서 수련하게 해주실지도 모르지!”
“그 정도 상은 기대해 볼 만하겠어.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무려 천검종의 내문 제자들이니까!”
비적들은 하나같이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통에, 묵묵히 듣고 있던 운청휘도 상황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혈지로 무위를 높인다? ……설마, 마혈석원진인가?’
반나절이 지났을 무렵, 비적들은 운청휘 일행을 드넓은 성의 상공까지 데려갔다.
모래바람이 거세게 부는 척박한 땅에 솟아오른 웅장한 성을 보자 운청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러한 지역에서도 왕조가 생겨나고 번성하게 되는가.
“드디어 황성으로 돌아왔군!”
“사해왕조 병사들에게 쫓기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황성이 우리 차지라니!”
“헤헤, 이 모든 것이 다 혈살종의 신사 대인 덕분이지!”
“무엇보다 대인께서 떠나시면, 우리가 이곳의 새로운 통치자가 되는 거야!”
성의 중앙에 도달하자, 수만 평이나 되는 피의 대지가 펼쳐졌다. 누구도 이 웅장한 성안에 자리 잡은 혈지를 상상하지 못하리라. 운청휘가 곧바로 신식을 펼치자, 혈지를 감싸고 기의 유출을 차단하는 진법을 감지했다.
‘역시 마혈석원진인가!’
진법을 알아본 운청휘의 눈에 살기가 일렁였다.
대지를 이만큼이나 피로 적시려면, 최소 수백만 명의 피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운청휘라도 모른 척 지나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저자가 혈살종의 신사로군.’
이윽고 그의 신식은 혈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선천경 9단계의 중년인을 탐지해냈다.
‘음? 혈지 밑에 생명체가 있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운청휘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놀랍군. 영단경의 빙백사라니.’
그 순간, 운청휘의 허리춤에 있는 아공간 자루에서 희미한 진동이 일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터라 잊고 있었지만, 문득 그 안에 영수의 정혈 한 방울을 넣어두었음을 떠올렸다.
그가 성공학관의 기재 반에 있던 당시, 영수 빙백사가 혈정을 한 방울 주지 않았던가!
운청휘는 뭔가를 생각하는지 아공간 자루를 서둘러 영라반지에 넣었다.
그제야 희미한 떨림이 가라앉으며 잠잠해졌다.
“신사 대인을 뵈옵니다!”
비적들은 운청휘 일행을 억압한 채로 중년인의 앞에 부복했다.
중년인은 피가 듬뿍 묻은 옷을 두르고 있었는데, 얼굴마저 핏빛 천으로 감싸 두 눈만 드러내고 있었다.
“신사 대인, 저희가 천검종의 내문 제자 6명을 잡았습니다. 전부 선천경의 무위를 지니고 있으며, 한 명은 1단계, 한 명은 5단계, 나머지 넷은 4단계입니다.”
오당가는 곧바로 중년인에게 보고를 올렸다.
“어?”
중년인이 가늘게 눈을 뜨더니, 운청휘를 비롯한 일행을 보고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인가? 자네의 무위는 선천경 2단계일 텐데, 천검종의 내문 제자를 6명이나 생포했다고?”
“헤헤, 대인께서 늘 저희에게 머리를 쓰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희가 이번에는 지혜를 발휘해 보았습니다.”
오당가의 얼굴에 뻔뻔한 웃음이 번졌다.
“지혜를 발휘했다?”
중년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어찌 지혜를 발휘하여 잡은 건지, 상세히 말해 보게.”
“네, 모든 과정을 신사께 보고하겠습니다!”
오당가는 술술 얘기하기 시작했다.
“10명의 수하와 함께 작은 마을에서 촌민으로 위장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리를 촌민으로 알고, 우리가 환대하며 잔치를 열겠다고 하니 순순히 따라오더군요. 몰래 술에 독을 탔고, 건네줬더니 잘도 마셨습니다.”
“그게 다인가?”
묵묵히 듣고 있던 중년인이 황당하다는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소인이 밤을 새워 짜낸 묘안입니다! 대어를 여섯 마리나 낚았으니, 대인께서는 이 계략을 어찌 보십니까?”
오당가는 득의양양하게 말하며 손을 슥슥 비볐다. 신사의 상을 기대하는 그의 눈빛이 음험하게 반짝였다.
“이런 어리석은 놈들!”
별안간 신사가 버럭 호통을 치며 비적들의 얼굴을 연달아 후려쳤다.
“신사, 어찌 저희를 때리십니까!”
얼굴을 감싸 쥔 오당가는 울상이 되어 신사를 바라보았다.
“네놈들을 죽이지 않는 게 본 신사의 자비인 줄 알거라!”
가소롭다는 듯 말한 신사가 이제 시선을 강해에게 두었다.
“이들의 수법으로는 삼척동자도 못 속일 걸세. 천검종의 내문 제자가 고작 저런 수법에 당할 만큼 어리석을까! 이제 연기는 그만하시게.”
강해를 비롯한 일행의 무위를 살피는 듯, 신사의 눈빛에 흥미가 깃들었다.
“그래, 본 신사를 찾으려고 일부러 함정에 발을 디뎠단 말인가?”
여전히 묵묵부답인 강해 일행의 반응에, 결국 중년인이 코웃음을 쳤다.
“계속 시치미 뗄 셈인가? 좋아, 끝까지 그렇게 나온다면, 어쩔 수 없구나!”
신사의 눈이 번뜩인 순간, 오행의 힘으로 나타난 거대한 손이 강해의 전신을 후려쳤다.
퍼억!
저항은커녕 손에 맞아 날아간 강해에게서 핏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본 신사를 우롱하는 게냐!”
아직도 강해가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하는 듯, 신사의 공격이 매섭게 이어졌다.
펑! 퍼억!
이번에는 두 사람이 오행의 손에 맞아 나가떨어지며 피를 토했다. 연기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맞을 이유가 없었다.
“……설마, 정말인가?”
신사에 눈에 스민 의혹이 점차 짙어지고 있었다. 그가 손을 멈추고 강해를 내려다보았다.
“이자들, 정말로 중독된 게로군!”
신사의 얼굴에 황당한 빛이 번졌다.
그는 운역에서 백 년을 살아오며 산전수전을 겪은 혈살종의 신사다. 그러나 이처럼 어리석고 순진한 이들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장고강(张高强)의 수법에 당하는 자가 있을 줄이야.”
장고강은 오당가라 불린 비적의 본명이었다.
강해 일행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차라리 뺨을 맞아도 이보다는 덜 치욕스러울 터였다.
선비는 죽이더라도 모욕을 주지 않는 법이다. 생포된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러한 조롱은 죽음보다 더한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본 신사가 자네를 오해했네.”
신사는 인자한 표정으로 말을 건네며, 장고강이 입을 달싹이자 손을 들어 가로막았다.
“선천생령급의 생명 7개면 종주께서 원하는 혈정이 완성된다. 본 신사가 사과의 뜻으로, 종주께 봉헌할 기회를 주지!”
장고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릅뜬 그의 눈에 곧 감격이 차오르더니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신사 대……!”
장고강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거대한 손에 붙들렸다. 오행의 힘으로 형성된 손은 그대로 장고강을 혈지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아아악!”
소름 끼치는 비명과 함께, 장고강의 몸은 서서히 피의 대지와 융합하기 시작했다.
핏빛으로 가득한 대지는 아직도 굶주린 듯 탐욕스럽게 장고강의 몸을 집어삼켰다.
“네놈들도 가거라!”
신사가 오행의 힘을 일으키자, 남은 비적들도 우수수 혈지 안으로 빠지고 말았다.
비명이 난무하는 가운데, 혈지와 융합하는 이들을 목격한 강해 일행의 눈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수련만 하며 살아왔던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참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것이 마도인의 수단인가?’
오직 운청휘만이 무심한 얼굴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다만 그의 눈은 가는 선을 그리고 있었다.
“혈지의 규모로 보아, 이 성에 살던 이들은 모두 산채로 연화되었겠구나. 네놈을 위해 일한 비적들도 마찬가지인 게냐?”
신사의 눈이 이채를 띠더니, 운청휘를 힐끗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