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쇠사슬이 사라지고, 혈지로 떨어졌던 청년은 운청휘에게 이끌려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운청휘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감격스러움이 가득했다. 만약 운청휘가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이미 그는 한 줌 핏물이 되고도 남았다.
쿠르릉!
다시금 청연지심화와 영단경의 기세가 맞부딪쳤다. 섭운은 쇠사슬이 재로 화하는 순간 다시금 기세를 분출하여 불꽃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색의 화염 앞에서는 촛불과도 같은 힘이었다. 영단경의 힘이 삽시간에 소모되며 사그라들었다.
“이, 이건 오행의 힘이 아니구나! 이건 천……!”
청연지심화를 알아차린 섭운의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거대한 영력화장이 그의 전신으로 쇄도했다.
콰아앙!
지면을 뒤흔드는 강한 충격이 이어졌다.
“섭 신사!”
굴정준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하니, 영단경인 섭운이 운청휘에게 당한단 말인가?!
“죽엇!”
홍색 비검이 영력화장을 꿰뚫고, 홍색의 검기가 운청휘를 베어들 기세로 닥쳐왔다.
강해 일행은 무의식적으로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무리 운청휘가 우세를 보인다고 해도, 홍색 비검이 내뿜는 검기는 선천생령인 그들에게 공포만을 안겨다 주었다. 자연스레 그들은 전의가 꺾이고, 절망만을 느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죽는 건가……!”
강해 일행에게서 막을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들은 서 있는 게 고작이었다.
“애석하구나. 고작 영단경 1단계가 내게 도전하느냐?”
운청휘의 고개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었다.
그의 손이 가볍게 허공을 가르는 순간, 천지를 억누를 듯한 영력이 홍색 검기를 향해 쇄도했다.
콰아앙!
붉은 포연이 사방을 자욱하게 뒤덮었다. 운청휘도 섭운도, 포연 사이로 섞여들며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맨손의 운청휘와 홍색 비검의 섭운. 무수한 영력과 영단경의 힘의 대결이니, 언뜻 봐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든 형세였다.
다만 운청휘는 산보라도 나온 듯 평온한 표정이었고, 섭운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으니 마치 벌써 승패가 갈린 듯했다.
두 사람의 충돌은 고요히 이루어졌다.
그림자가 겹치는 순간, 운청휘의 손은 섭운이 쥐고 있던 홍색 비검을 물 흐르듯 자연스레 빼내었다. 비검은 그대로 운청휘의 빈 검집에 꽂혔다.
위이잉-
참천검의 검집에서 들려오는 진동이 비로소 침묵을 깨트렸다.
섭운이 검을 빼앗겼음을 자각한 순간, 이미 비검은 한 줌의 가루가 되어 검집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네놈, 네놈이 감히! 내 홍사검을 파괴해!”
영단경의 힘이 사방을 뒤덮으며 운청휘를 요격했다. 애검을 잃고 분노한 섭운이 울부짖더니 쉴 새 없이 그를 공격해 들어왔다.
운청휘는 한 점의 동요도 없이 가볍게 손짓했다. 푸른 불의 파도가 넘실거리며 영단경의 힘을 휘감았다.
콰아앙!
또다시, 청연지심화가 영단경의 힘을 상쇄했다.
“이리되었으니 죽어서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이를 뿌득 갈더니, 섭운이 별안간 두 손을 어지럽게 교차하고 맺기 시작했다.
“섭 신사, 설마.”
오직 굴정준만이 섭운의 행동을 알아차린 듯,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섭 신사, 아니 되오. 빙백사를 방출하면 이번 혈정의 응결은 실패합니다.”
굴정준의 외침은 이미 늦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천 장의 혈지에서 마치 용암이 분출하듯 거대한 피의 기둥이 솟구쳤다.
“쉬이이…….”
등골이 오싹해지는 쉭쉭거림이 피의 기둥 안에서 들려왔다.
곧 피의 기둥이 가라앉으며 거대한 혈홍색 뱀이 머리를 드러내었다. 본래는 흰 몸일 터였으나, 혈지의 기운을 받아 붉게 물든 듯했다.
“맙소사! 뱀? 아, 아니, 용인가? 대체 저게 뭐야!”
강해 일행이 경악하며 삼십여 장에 달하는 빙백사의 거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빙백사는 모습을 드러낸 즉시 섭운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호위하듯 감쌌다. 두 눈이 먼 듯 퀭하게 구멍이 뚫려 있는 빙백사의 모습은 섬뜩할 따름이었다.
“쉬이이!”
빙백사의 울음소리는 어지간한 이들에게는 강한 두통을 일으켰다.
“빙백사, 저놈을 당장 삼키도록!”
섭운이 운청휘를 가리키며 살기등등하게 외쳤다.
후우우-
섭운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를 호위하던 빙백사가 영단경의 기운을 몰아쳤다. 섭운이 뿜어내던 영단경의 기운보다도 압도적이고, 짙은 기운이 사방을 억죄었다.
“솟아라.”
침착한 목소리가 대지를 갈랐다.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대지가 거대한 흙벽을 이루어 운청휘의 앞을 감쌌다.
콰아앙!
돌진해 오던 빙백사가 흙벽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강해 일행은 반동으로 비틀거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카가각-!
운청휘가 세운 벽에 무수한 잔금이 새겨지더니 곧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흩어졌다.
빙백사는 이마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조금도 타격이 없는 듯, 빙백사의 선홍빛 주둥이가 쩍 빌어지더니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휘몰아치라.”
건조한 음성과 함께, 그의 주변에 겹겹이 강풍이 몰아쳤다. 강풍은 빙백사가 아니라 운청휘와 강해 일행을 감싸 순식간에 삼백여 장 밖으로 훌쩍 멀어져갔다.
“이럴 수가. 오행의 힘을 동시에 두 가지나 사용하다니!”
섭운과 굴정준이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융화되어라!”
운청휘는 단숨에 강해 일행을 이끌고 삼백여 장을 물러났다.
동시에, 그는 두 가지 오행의 힘을 일으켜 거대한 용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꿈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토룡의 표면에 휘몰아치는 대기가 감겼고, 언뜻 두 마리 용이 얽혀 있는 듯했다.
삼백여 장 밖에 떨어진 빙백사를 향해, 두 마리의 용이 세차게 날아들었다.
“쉬이이……!”
빙백사가 조금이라도 이성이 있다면 쇄도해오는 두 마리의 용을 피하는 게 옳다.
그러나 선홍빛으로 물든 빙백사는 혀를 날름거리며 섭운의 앞을 막고 온몸으로 부딪쳐 왔다.
콰아앙!
진동과 함께 무수한 모래와 먼지가 흩날리며 충격파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빙백사와 오행의 힘이 부딪친 자리에는 삼십여 장 깊이의 구덩이가 파이고, 반경 삼백여 장 내는 짙은 먼지 구름으로 뒤덮였다.
“오행의 힘을 두 가지나 쓸 수 있다니…… 말도 안 된다!”
섭운은 아직 혼이 나간 듯,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었다.
“섭 신사, 빙백사가 그의 상대가 되겠습니까?”
굴정준이 황급히 섭운을 흔들며 물었다. 이제 혈정은 둘째 치고, 그들에겐 빙백사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저자의 전투력은 영단경 2단계의 무인과 비슷하네. 하지만 빙백사는 영단경 3단계의 전투력을 지녔으니, 이길 걸세!”
조금씩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빙백사가 세차게 꼬리를 흔드는 형상이 언뜻 보였다. 핏빛으로 물든 꼬리는 그대로 운청휘를 세차게 때려냈고, 미처 피하지 못한 그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쉬이이!”
빙백사는 놓치지 않고 거대한 주둥이를 벌려 운청휘를 한입에 삼켜 버렸다.
그대로 소화시킬 기세로 빙백사가 솟구쳐 올랐다. 어디선가, 또렷하고 준엄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쏟아져라!”
마치 거대한 바다를 들고 온 듯, 하늘에서 물이 퍼부으며 빙백사의 몸을 강타했다.
“바람이 대지를 새로이 빚을지니!”
운청휘는 멈추지 않고 토 속성과 풍 속성의 힘을 연달아 일으켰다.
승천하던 중 떨어진 용처럼 바닥을 기던 빙백사는 호쾌히 휘몰아치는 대지에 이리저리 쓸려나갔다.
“맙소사……. 지금 수 속성 오행의 힘까지 사용한 건가!”
모두가 넋을 잃고 눈앞의 광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동시에 세 가지의 오행의 힘을 썼어! 이, 이게 정말 사람으로서 가능하단 말인가?”
“저, 저기 봐!”
강해 일행이 경악하며 비명을 질렀다.
세 가지 오행의 힘이 뒤섞였건만, 빙백사의 일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강해 일행은 이제 어디에 놀라야 할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퍼억!
또다시 빙백사의 일격이 운청휘를 내리찍었다.
“후욱……!”
운청휘가 뿜은 피가 허공에 핏빛 안개를 만들어 냈다.
‘역시 반쪽짜리 선천이 쓸 수 있는 오행의 힘은 불완전하군. 완전한 선천경에 접어들어야만 한다!’
만약 완전한 선천생령의 단계에 접어들었다면, 지금처럼 애먹지 않고 빙백사를 격파했을 터였다. 운청휘의 얼굴에 쓴웃음이 스쳤다.
지금으로서는 영단경 1단계를 죽이고 2단계는 막상막하로 겨룰 수 있지만, 3단계는 운청휘도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다.
하필 눈앞의 빙백사가 영단경 3단계의 영수인 게, 우연치고는 너무나도 운이 나빴다.
‘참천검집이 나설 때인가?’
망설이던 운청휘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안 된다. 빙백사는 이미 어혼성숙비전에 조종되고 있으니, 참천검집의 위력이 더해지면 어찌 되겠느냐. 분명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남을 터.’
비록 버겁더라도 운청휘는 눈앞의 빙백사를 구하고자 했다. 그와 이 빙백사는 희미하게나마 연이 닿아 있지 않았던가.
성공학관에서 만난 빙백사는 운청휘에게 정혈을 줌으로써 호의를 베풀었다. 운청휘는 복수도 철저하게 하지만, 은혜를 입으면 열배, 백배로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 빙백사는 혈맥상 성공학관의 아버지일 테니, 운청휘로서도 외면하지 못했다.
다만 혈지에 직접 들어갈 수가 없어, 일부러 굴정준과 섭운을 자극해 빙백사가 혈지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렇다면 이제, 본래의 목적을 이룰 차례였다.
‘이 빙백사의 영혼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영혼소생술을 쓴다면…… 삼 할의 확률이지만 빙백사의 영혼을 살릴 수 있겠군.’
생각을 마친 운청휘는 곧바로 섭운과 굴정준에게 신형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