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열 가지 오행의 힘을 쓰면 최대 이 각 동안 빙백사를 잡아 둘 수 있다. 일단 그의 영혼을 깨워야겠군.’
생각을 정리한 후, 운청휘의 시선은 강해 일행에게 닿았다. 그가 손을 한 번 휘두르니, 강해 일행에게 영력의 광풍이 휘몰아쳤다.
챙캉!
그들의 몸을 단단히 죄던 오금련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운청휘는 영라반지에서 다섯 개의 단약을 꺼내어 내밀었다.
“먹도록. 무위 회복을 돕는 단약이다. 또한, 맹세하도록. 오늘 너희가 본 일은 그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다. 더불어 사흘 동안 목숨을 던질 기세로 나를 호위하거라. 당장 맹세하지 않는 자는 이 자리에서 죽여주겠다!”
“맹세할게!”
강해 일행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 후 운청휘는 신식을 펼쳐 빙백사의 체내를 샅샅이 훑었다.
어혼성숙비전에 걸린 이들은 영혼이 원래의 위치를 벗어나 몸 안을 떠돌다 조금씩 소멸해가지만, 빙백사는 길이만 해도 수십 장에 달하니 훑어보는 데 상당히 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살펴보니 영수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체 구조가 복잡하고 오묘해 운청휘는 주의를 기울여 신중하게 영혼을 감지해나갔다.
‘여기로군!’
꼬리 부근에서, 빙백사의 영혼을 발견한 운청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신기할 정도로구나. 이리 젊단 말인가?’
뜻밖에도 빙백사의 영혼은 운청휘와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다만 안색이 창백하고 땅에 쓰러진 채라, 금방이라도 숨이 꺼질 듯했다.
청년의 미간에는 옅은 피 한 방울이 묻어 있었다. 자신이 보낸 빙백사의 정혈임을 알아차린 운청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시각, 사해왕조의 황성을 향해 다가오는 한 무리가 있었다. 공중을 가로지르며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그들은, 흰 장포를 입고 고귀한 기운을 뿜어내는 청년을 필두로 하고 있었다.
* * *
영수는 선천경에 이르면 변신 능력을 가지는 법. 눈앞의 빙백사는 영단경의 경지니 사람으로 변신한다 한들 새삼스러울 게 없었다.
운청휘는 신식으로 천천히 청년의 온몸을 감싸고, 영혼소생술을 사용하여 흩어져가는 영혼을 끌어모았다.
비록 무위가 부족하다 해도 신식은 선제의 것이니, 모든 생령의 영혼에 닿을 수 있었다.
천천히 시간이 흘러가고, 일 다경이 지날 무렵 청년의 창백한 얼굴에 서서히 옅은 선홍빛 기운이 감돌았다.
일 각에 이를 무렵, 청년이 감긴 눈을 떴다. 별처럼 반짝이는 맑은 빛이 그의 눈에 서려 있었다.
-너는 인족인가?
청년이 운청휘를 보며 맥없이 묻다 곧 눈을 부릅떴다.
-설마, 본왕의 몸 안에 들어왔다니.
영단경에 접어든 영수는 요족이라고도 불리며, 요족에 이르러 왕의 봉호를 받을 수 있었다. 가령 정련요왕(净莲妖王), 혈망요왕(血芒妖王) 같은 이들이 그러했다. 이 빙백사도 자신만의 봉호가 있었기에 습관적으로 자신을 본왕이라 칭했다.
-이상하게 친근한 기로구나.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왕은 그대를 처음 보거늘, 익숙한 정혈을 느낄 수 있다. 설마, 인아(麟儿)의 정혈이더냐?
무언가를 떠올린 청년의 마음에 슬픔과 기쁨이 교차했다. 그가 흔들리는 눈으로 운청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100년 전 그 전투에서 맥아(陌儿)는 전사했고, 인아는 실종되었지.
슬픔에 잠긴 빙백사의 기억은 100년 전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맥아는 그와 같은 경지의 부인이었으며, 인아는 그의 후손이었다.
속세의 많은 귀족 가문이 아들을 인아라 칭한다. 하늘이 내려준 후손이자 가장 귀한 선물이니 그리 부르는 터였다. 요족들도 속세에 섞여들며 자연스레 자신의 아들을 인아라고 부르는 풍조가 생겨났다.
포대기에 싸여 있던 아들을 떠올리자 청년의 눈에 회한이 깃들었다.
-이 기운은……!
그 순간, 압도적인 기세가 청년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야 할 듯 두려운 기운이 온몸을 엄습했다.
-괴로울 정도로 두렵구나. 인족이여, 그대는 도대체 어느 경지의 고수란 말이냐?
수백 년을 살아 왔지만, 영수인 자신에게 이만큼 두려움을 주는 기운도 없었다.
청년이 기운의 근원지를 알아차리고 운청휘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 기운, 자신에게 어혼성숙비전을 사용한 자도 이 기운에는 미치지 못할 듯했다.
“감히 본제를 인족이라 부르느냐? 네놈의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 한마디로도 본제는 네놈의 육신과 영혼을 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운청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모든 신식을 사용한 터라 그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선제의 위엄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제,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청년이 급히 머리를 숙이고 절을 올렸다. 그의 눈에는 어떠한 굴욕감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청년에게 운청휘는 천지신명과 다름없는 존재였으니, 엎으려 절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일어나거라. 네 아들과의 연을 갚고자 구했을 뿐이다.”
그제야 운청휘가 신식을 일부 거두었다. 청년의 영혼을 완전히 수복했으니, 괜히 겁을 줄 생각은 없었다.
-인연이라 하셨습니까?
의아해하던 청년이 곧 자신의 이마에 있는 정혈을 알아차렸다.
같은 빙백사로서 그가 이 정혈의 의미를 어찌 모를까. 이내 청년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인아가 저 인족에게 정혈을 준 게로구나!’
성공학관의 빙백사가 운청휘에게 정혈을 주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그는 기특함을 억누르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대협!부디 소인에게 못난 자식의 행방을 알려 주십시오.
어느새 운청휘를 대하는 청년의 태도는 더없이 깍듯했다.
“그리 낮출 것 없다. 네 아들과 연이 있으니 너를 존중하는 게 마땅하지 않느냐.”
운청휘가 평온하게 답했다.
”네 아들은 지금 천운왕조 극광성의 성공학관에서 지내고 있다. 월경 9단계의 무위를 지녔고, 선천생령의 인간과 계약을 맺었더구나. 마음 쓰지 말거라. 그자는 네 아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대하고 있다.”
고고한 영수는 노예로 부림 받는 일을 극도로 싫어한다. 운청휘는 일부러 동등한 관계임을 강조했다. 괜히 성공학관의 원장이 해를 입을 필요는 없었다.
“네 아들의 거취를 알려 주었으니, 이제는 네가 답할 차례가 아니겠느냐?”
운청휘가 청년을 바라봤다.
“누가 너를 어혼성숙비전으로 조종하였느냐?”
그 물음에 청년이 쓴웃음을 머금으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송구합니다. 그자의 모습은 기이한 힘에 가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그자의 무위가 현경이었음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니 짐작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운청휘는 문득 떠오른 이름을 가만히 짚어 보았다.
‘모습이 기억이 나지 않고, 무위가 현경이라. 정녕 궁우신이란 말인가?’
궁우신은 평소 기묘한 힘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었고, 마침 무위도 현경에 이르렀다.
또한 운청휘가 접촉했던 이들 중 유일하게 어혼성숙비전을 수련하지 않았던가?
다만 운청휘의 마음에는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영단경 빙백사를 조종한 이가 궁우신이라면, 그는 천검종의 종주인 동시에 혈살종의 종주인 게 아닌가?
다만 천검종과 혈살종이 물과 기름과 같은 관계임을 생각하면,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운청휘는 다시금 생각이 뒤엉키는 느낌에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이대로는 해답을 얻을 수 없겠군. 무위를 조금 더 회복하고 생각해도 늦지 않을 일이다.’
“이만 가지.”
운청휘의 말과 함께, 신식은 빙백사의 몸에서 완전히 거두어졌다. 빙백사의 영혼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 몸의 통제력도 되돌아왔다.
-응? 육신이 감금되었다니.
그러나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빙백사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 힘을 어찌 모를까. 그는 눈을 부릅뜨며 자신의 몸을 살폈다.
‘여, 열 가지나 되는 오행의 힘으로 나를 감금했단 말인가?!’
빙백사는 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그의 반응도 강해 일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이, 자신에게 열 가지나 되는 오행의 힘을 한 번에 사용했다!
‘이런 힘을 쓸 수 있는 이가 존재한단 말인가?’
기억을 아무리 되짚어 봐도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천천히, 빙백사의 몸에 기운이 돌아오며 어리둥절한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 빙백사가 깼어.”
빙백사의 움직임에, 강해 일행이 놀라 외쳤다.
“운청휘가 빙백사를 정상으로 회복시켰어!”
“저기 봐! 빙백사도 꽤나 놀란 모양인데?”
그들은 빙백사의 반응에 상황도 잊고 우스움을 느꼈다. 그들도 빙백사처럼 경악하고 또 경악하지 않았던가.
‘마침내…… 움직일 수 있구나!’
마침내, 몸을 억제하던 오행의 힘이 사라지자 빙백사는 축 늘어진 몸뚱이를 천천히 일으켰다.
쿠르릉!
꼬리를 한 번 휘두르니, 순식간에 반경 수천 장의 대지에 잔금이 생겨났다.
“빙백사가 정상으로 회복되었는데, 설마 또 우리를 공격하는 건 아니겠지?”
사방으로 퍼지는 진동에, 누군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설마. 운청휘가 빙백사를 구했으니 은인이잖아? 그러니…….”
당치도 않다는 듯 대꾸하던 강해가 돌연 말을 멈췄다.
이때 운청휘는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강해 일행의 머릿속에 한 가지 광경이 떠올랐다. 그들은 사흘 동안 운청휘를 목숨을 바칠 각오로 보호하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사흘 내에 또 공격당하진 않겠지?”
“어찌 우리에게 사흘간 목숨을 바칠 각오로 지키라고 한 거야?”
“빙백사가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면 누가 우리를 구해주는 거지?”
강해 일행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그들은 운청휘가 이토록 힘을 소진해가며 이종족을 구했는지 알 길이 없기에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