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내가 방금 들었는데, 운청휘가 큰 죄를 지었다는군. 그 자리에서 정지가가 죽여도 이상할 것 없었다는데? 그런데 운청휘가 천형대에서 생사결을 하자고 제의했다지 뭐야!”
“그럼 고작 사흘 더 살고 싶어서 시간을 번 거잖아.”
“그게 아니면 뭐겠어? 내문 제자가 어찌 전수 제자의 상대가 되겠나!”
“정지가를 잘 모르는 게 틀림없어. 정지가가 왜 승낙했겠나? 사흘 뒤에 운청휘는 뼈저리게 후회할 걸세.”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정지가가 순순히 생사결을 받아들였을까? 그게 궁금하구만.”
“난들 알겠나! 확실한 건 사흘 후에 내문 제자 하나가 줄어든다는 것뿐이지.”
천검종의 외문, 내문 제자들을 비롯하여 장로와 전수 제자들도 이 소식을 접했다.
다만 장로들과 전수 제자들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또 누군가가 정지가의 심기를 거슬렀군.”
그들이 정지가의 성품을 모를 리가 없기에,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었다.
종문이 술렁이는 가운데, 빠르게 하루가 지났다.
운청휘는 서북쪽 황무지에서 얻은 혈정 아홉 개 중 세 개를 연화시켰고, 절반의 무위를 회복했다.
그동안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턱이 없지만, 안다고 해도 운청휘는 신경도 쓰지 않을 터였다.
이미 정지가는 죽은 이나 다름없건만, 무엇 하러 신경을 쓰겠는가? 때가 되면 목숨을 거둔다. 그뿐이었다.
* * *
천검종에서 지위가 높은 이들만 출입할 수 있는 성성.
궁주 궁우신, 성녀 채아, 오랜 세월 칩거해 온 원로들만이 성성을 지키고 있었다.
성성에 있는 삼십만 장 크기의 저택은 아름다운 인공호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호수 부근의 정자에서 은은한 음률이 흘러나왔다.
청의를 입은 소녀가 정자에 앉아 거문고를 연주하고 있었다.
소녀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도원을 거니는 듯 감미로운 음률이 흘러나왔다. 온 천지가 소녀의 연주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 보면, 이 달콤한 음률에 미묘한 분노가 섞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으리라.
한참 후, 연주를 마친 청의소녀가 몸을 일으켜 호수를 바라보았다.
막 피어나는 연꽃 송이처럼 고운 자태의 소녀의 눈빛은 잔잔하기만 했다. 그러나, 한순간 선명한 질투가 소녀의 눈동자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온 천하를 떠돌던 사부님이 내 재능을 어여삐 여겨 천검종으로 데려온 이후로, 나는 천녀가 되었지. 하지만 천검종에서 그녀를 만날 줄이야. 심지어 내 사부님보다 지위가 높으니, 만날 때마다 고개를 숙여야 하다니. 두 번이나 마주쳤는데,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어! 그 지위에서 끌어내치는 날을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 거지?”
청의소녀가 중얼거리는 말은 그녀의 아리따운 외모와는 달리 깊은 악독함이 배어 있었다.
만약 운청휘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을 터였다.
천원왕조에서 사라졌던 사효언이었다.
“효언, 천원왕조에서 소식이 왔어요.”
그때, 한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사효언이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를 서스럼없이 불렀던 청년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주춤 물러났다.
“엽천. 마지막으로 경고하겠어. 한 번만 더 나를 효언이라고 부르면 목숨을 거두어도 나를 탓하지 마.”
“자, 잘못했습니다! 주의하지요.”
엽천은 사효언 앞에서 급히 몸을 숙였다.
그 순간, 엽천의 눈에 강렬한 증오가 피어올랐지만 곧 사그라들었다.
일찍이 성공학관의 3대 성도이자 천원왕조 4대 가문의 후계자였던 엽천, 더욱이 사효언과 정혼을 약속한 만큼 탄탄대로를 걸어왔던 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몰락한 가문의 후예일 뿐이다. 그는 사효언에게 부하의 예를 갖췄다.
“당신이 나를 증오하는 건 알겠지만, 우리 사이의 차이를 잊지 마. 나는 전수 제자와도 동등한 위치고, 성성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당신을 천검종에 데려온 건 내 나름대로 성의를 다한 거야.”
사효언이 엽천을 내려다보며 냉랭하게 말하곤 덧붙였다.
“이제 천원왕조의 소식을 말해.”
엽천은 굴욕적인 표정을 감추며 공손히 말했다.
“천원왕조는 이제 없습니다. 천우성 운가가 천원왕조를 이어받아 국호를 천운왕조로 바꾸었고, 이전의 황실과 4대 가문이 운청휘의 손에 멸문당했습니다.”
“뭐라고?!”
지금의 신분으로는 천원왕조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지만, 소식 자체는 사효언도 놀랄 법했다.
“설마 혼자의 힘으로 그런 일을 벌일 줄이야.”
“사저께 고할 일이 더 있습니다.”
엽천이 또다시 말했다.
“어제부터 도는 소문입니다만, 운청휘라는 내문 제자가 전수 제자 정지가에게 생사결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운청휘? 우리가 아는 운청휘인 건가?”
사효언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이내 반쯤은 확신에 차 말했다.
“아니, 그가 확실하겠지. 운청휘가 아니라면, 누가 그런 배짱을 부릴까!”
말을 이어갈수록, 그녀의 눈가가 붉고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곧 그녀가 고개를 돌려 엽천을 바라보았다.
“내문으로 가서 제대로 확인하고 와 줘. 응,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주의해야 할 거야.”
이틀째 되는 날, 운청휘는 혈정 6개를 연화시켰다.
그의 무위도 전성기까지 회복했지만, 서두르지 않고 남은 혈정을 연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번 연화로, 선천생령에 도달하길 바라야겠군.’
선천생령에 대한 운청휘의 갈망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게 있어 선천생령은 커다란 의미를 지녔으므로.
무위와 전투력의 상승뿐만 아니라, 선천경에 접어든 이후 무위를 회복하는 속도는 지금의 몇 십 배, 몇 백 배를 웃돌 터였다.
더불어 영라반지 안에 쌓여 있는 선석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를 진선의 무위까지 도달하게 만드는 데 충분한 양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림의 떡이나 다름없었으나, 일단 선천경에 도달하면 진선이 되어 천성대륙에 군림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 * *
엽천은 수많은 내문 제자들을 만나며 탐문했지만, 그가 원하는 소식만큼은 좀처럼 들을 수가 없었다.
지금 운청휘의 소문이 이렇게나 파다한데, 정작 그를 봤다는 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거의 포기했을 즈음, 한 청년이 엽천을 찾아왔다.
“듣자 하니, 당신이 운청휘에 대해 조사하고 다닌다며? 심지어 운청휘의 초상화를 제공하면 선천영액 100방울을 내놓겠다고 했다지?”
다소 오만한 태도였지만, 엽천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운청휘를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초상화로 옮길 수 있겠는가?”
태도가 오만방자한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나는 이틀 전에 그를 만났거든. 나는 전수 제자 정 사형의 사람일세. 운청휘의 모습을 그릴 수 있을뿐더러, 운청휘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말해 줄 수 있지. 다만…….”
청년은 말끝을 흐리며 손을 내밀었다.
낌새를 알아차린 엽천이 황급히 답했다.
“둘 다 해 줄 수 있다면 선천영액을 200방울까지 지불할 수 있네! 다만, 가짜 소식이라면 그 정 사형도 당신을 보호할 수 없다는 걸, 미리 말해 두겠네.”
엽천의 경고에 청년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선천영액 200방울이다. 자다가도 웃음이 나올 단어가 아닌가?
“안심하라고. 정 사형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도 좋네!”
만약 정지가가 자신의 수행원이 선천영액 200방울에 자신의 이름을 팔았다는 걸 알면, 절대 살려 두지 않을 터였다.
이 각 후, 엽천은 급히 발걸음을 서둘렀다. 어렵사리 초상화를 구했으니 서둘러 사효언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성성으로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누군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응? 아니, 자네! 엽천이 아닌가! 이보게, 엽천!”
능글능글한 미소와 함께, 한 청년이 엽천의 앞을 막은 채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소도도, 네놈이 어째서 여기에?”
소도도를 보는 순간, 엽천은 알 수 없는 불안함이 밀려왔다.
“내가 여기 있는 게 대수인가? 뭐, 이 몸은 새로운 전수 제자인 데다 종주의 관문 제자라 성성에서 지낼 뿐이라네.”
소도도는 태연히 말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엽천에게 다가왔다.
“뭐, 뭐라고 하였나!”
새로운 전수 제자. 종주의 관문 제자.
지금의 엽천이 이 신분을 어찌 이길 수 있을까!
소도도는 느긋하게 엽천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더니,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못 본 새 야위었구만, 자네? 천검종의 식사가 입맛에 맞지 않았나? 여기 십전대보환이 있다네, 사부께서 주신 것이지만 옛정을 생각하여 자네에게 줌세!”
소도도가 아공간 반지에서 환약 한 알을 꺼냈다.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환약은 코를 찌르는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엽천이 속으로 이를 갈며 소도도가 준 십전대보환을 받았다.
“이보게, 엽천. 뭐 하는 겐가? 어서 먹게.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무려 종주 사부께서 만드신 환약이라네. 자네가 먹지 않으면 종주 사부의 호의를 거절하는 셈이 되는데, 그래도 좋은가? 자네, 곤란해질 텐데?”
소도도가 태연자약하게 웃으며 엽천을 내려다보았다.
“먹어, 먹는다고!”
엽천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환약을 한입에 삼키고 말았다.
“우욱!”
역한 맛을 느낀 순간 엽천은 참지 못하고 환약을 게워냈다.
구역질을 하는 통에 눈물까지 줄줄 흘렀고, 그 모습에 소도도가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