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사람들이 왈가왈부하는 소리마저 폭풍이 내는 소리에 묻히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바람 소리 외에도 번갯불이 번쩍였다. 바람이 너무 심한 탓에 공중에서 마찰이 일어난 듯했다.
“이명 사형, 이번엔 운청휘도 상대할 수 없겠죠?”
누군가 전수 제자 이명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당연한 말을. 저 정도라면 내 영력의 1~2할은 써야 해제할 수 있지. 운청휘라면 만 번 죽어도 살아남기 어렵다네!”
이명은 운청휘의 미래에 사형을 선고하며 고개를 저었다.
“만 번 죽어도 살아남기 어렵다고? 하하하.”
요란한 폭풍 소리를 뚫고 청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폭풍 속에서 여유롭게 빠져나오는 운청휘의 신형은 무수히 많은 이들을 경악케 했다.
그를 감싸듯이 푸른 화염이 일렁이고 있었고,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폭풍이 고양이에게 쫓기는 쥐처럼 도망쳤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디면 삼백 장을 훌쩍 뛰어넘으니, 얼마 걷지도 않아 안전지대로 나올 수 있었다.
“말도 안 돼. 운청휘가 무사히 나왔잖아?”
“내,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이명 사형, 운청휘는 죽는다고 했는데, 어떻게.”
누군가 이명을 보고 말하자, 갑자기 수천 개의 눈빛도 이명을 향했다.
“그것은…….”
이명이 우물쭈물하며 말끝을 흐렸다. 자신만만하게 외쳤던 결과가 이럴 줄이야.
그는 당장이라도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지가가 일부러 운청휘를 폭풍에서 나오게 한 거겠지. 이런 식으로 죽이는 건 너무 친절하지 않나.”
이명이 다급해진 상황에서 억지를 부리듯 이유를 댔다.
“그런가요?”
그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운청휘, 폭풍에서 어떻게 탈출한 거지?”
그때, 충격에 빠진 정지가가 겨우 말문을 열었다.
“하?”
수많은 시선이 일제히 이명에게 쏠렸다. 몇몇은 웃음을 참고 있었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이명의 얼굴을 보면서도, 담이 큰 제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명 사형, 정지가가 고의로 운청휘를 풀어 놓았다고 했잖아요?”
“아까 정지가의 말투는 운청휘가 폭풍에서 나온 게 의외라는 것 같았네.”
안색이 어두워진 이명은 곧바로 답하며 영단경의 기세로 질문한 이를 압박했다.
그자는 기세에 눌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흥, 도망치는 것도 정도껏 해라!”
정지가의 냉랭한 목소리가 십여 개의 폭풍을 만들어 냈다. 제각각 족히 삼백여 장은 되어 보이는 폭풍이 천형대 전체를 휘몰아치며 귀를 찢을 듯한 굉음을 일으켰다.
콰르르-
관전하는 이들의 눈에는 천형대가 연옥으로 변한 듯 섬뜩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정지가는 이에 멈추지 않고 더 많은 폭풍을 이끌어 냈다. 도합 17개의 폭풍이 전부 운청휘를 향해 사납게 몰아닥쳤다.
많은 이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막막함과 운청휘에 대한 조의였다.
이명의 곁에 서 있던 한 제자가 입을 열었다.
“이명 사형, 이번에 운청휘가 죽을까요?”
명백하게 그를 비웃는 듯한 말투였다.
이명이 매섭게 상대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만약 그가 죽지 않는다면, 나는 이명이라는 두 글자를 거꾸로 쓸 것이다!”
이명의 다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운청휘의 신형이 천형대에서 사라졌다.
수많은 눈동자가 그를 주목하고 있었으나, 누구도 운청휘의 종적을 좇지 못했다. 정지가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방을 노려보았다.
“줄곧 네가 공격하였으니, 이제는 내 차례겠군?”
허공에서 운청휘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운청휘의 신형은 정지가의 옆에 모습을 드러냈었다.
퍼억!
운청휘는 재빠르게 정지가의 아랫배를 강타했다.
정지가의 붕 떠오른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운청휘가 정지가를 끌어당겨 또다시 주먹을 날렸다.
커헉!
정지가가 피를 뿜었다. 그러나 그는 쓰러질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퍼억! 펑! 퍼억!
숨 쉴 틈도 없이 운청휘의 주먹이 그의 아랫배에 직격했다. 연거푸 백여 차례 강타하니, 그의 내장은 갈가리 찢겨나가고 말았다.
“의외인가?”
운청휘의 태연한 목소리가 정지가의 귓가를 흔들었다.
“그 유명한 영단경의 실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구나.”
정지가의 두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영단경의 무위뿐만이 아니다! 선천의 경지도, 양경, 월경, 성경의 무위마저도 쓸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사람처럼 운청휘의 공격을 허용하며 전신을 얻어맞고 있었다.
“정말로 오만한 게 누구일까? 처음부터 모든 무위를 발휘했다면 나를 상대로 열 합은 견뎠을 터. 어리석게도 선천의 무위로 나를 맞서려 해?”
운청휘가 한심하다는 듯 정지가를 바라보았다. 이내 운청휘는 정지가에게 전음을 보냈다.
-……천형대임을 감사히 여겨라. 둘만 있었다면, 네놈을 단번에 죽였을 터.
그 말을 들은 정지가가 두 눈에 살기를 피워 올리며 운청휘를 노려보았다.
“네, 네놈! 네놈도 영단경의 무인이구나! 줄곧 무위를 숨겼지만, 영단경이 분명해!”
“영단경? 나는 선천경도 아니거늘. 그저 선천의 반에도 못 미칠 뿐이고, 전투력은…….”
운청휘는 잠시 생각하더니 간단히 설명했다.
“사흘 전, 사해왕조에서 빙백사를 만나지 않았느냐? 당시 그 빙백사를 맨손으로 제압한 게 나였다.”
“뭐라고!”
정지가가 화들짝 놀랐다. 당시 그는 빙백사의 일격도 버텨내지 못했는데, 운청휘는 빙백사를 제압했다니!
정지가는 잔뜩 겁을 먹었다.
운청휘는 그를 단번에 죽일 수 있었다. 다만 사흘 전에는 중상을 입은 몸이었으리라.
그 중상도 빙백사와의 격전에서 입었을 테니,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정지가의 마음에 후회가 일었다.
왜 사흘 전 그를 바로 죽이지 않아, 지금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왔단 말인가.
“우, 운청휘! 나를 죽일 수는 없다! 나의 조부님 정학(丁鹤)이 천검종의 원로다! 만약 나를 죽인다면 조부님께서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터!”
정지가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조부의 이름을 대 운청휘를 억누르려 했다.
“하하……!”
운청휘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정지가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자신을 위협할 생각만 하고 있었다.
“네놈의 조부가 나를 귀찮게 하면, 마땅히 네놈의 곁에 매장해 주마.”
운청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어 정지가의 목을 움켜쥐었다.
관전하던 이들이 제각기 헛바람을 들이켰다. 이 상황 자체가 모두의 예상을 빗나간 장면이 아니던가.
“이제, 정지가는 죽는 건가?”
누군가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주변인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흐트러진 숨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들로서는 처음 보는 기괴한 광경이었다.
선천경의 무인이 영단경의 무인을 죽인다니, 무엇이 더 기괴할까!
“이명 사형, 사형의 장담과는 다르게 지금 죽을 사람은 정지가처럼 보입니다만.”
그때, 내문 제자 한 명이 사람들 틈에 숨어 외쳤다.
긴장된 가운데, 몇몇 이들이 피식 웃고 말았다.
곧바로 이명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호흡이 거칠어졌다.
“나중에 결판을 내주마!”
이명이 내문 제자를 매섭게 쏘아보더니, 곧바로 몸을 날려 운청휘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운청휘. 네가 이겼다. 이제 정지가를 풀어 주지 않겠는가?”
“응?”
이명의 제안은 모든 이들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운청휘도 뜻밖의 제안이었는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천형대의 규칙을 잊었느냐? 설마 규칙을 깨려는 것이냐?”
“내문 제자 주제에 감히 나를 하대하는 건가?”
이명은 창피해하기는커녕, 뻔뻔하게 답했다.
“이명이 왜 저러는 거야? 규칙을 깨고 정지가를 구하려는 것인가?”
“게다가 전수 제자의 신분으로 운청휘를 누르려 드는데?”
“정지가의 조부가 종문의 원로이니, 분명 그에게 잘 보이려는 거겠지!”
“뻔뻔하구만. 관전하는 내내 운청휘는 죽는다고 예언하더니, 매번 체면만 깎였잖아? 이제는 염치없이 정지가를 구하러 가지 않았나! 만약 이긴 사람이 정지가였으면 운청휘를 구하러 가기나 했겠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라도 이명을 후안무치하다 여길 터였다.
“내 인내심에 한계가 있으니, 당장 정지가를 풀어주거라. 그렇지 않으면……!”
이명은 말끝을 흐리며 돌연 영단경의 기세를 분출해 운청휘를 압박해 왔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하겠느냐?”
운청휘는 평온한 표정으로 되물으며 손에 힘을 주었다.
빠득!
정지가의 숨이 단번에 끊어졌다.
“맙소사……!”
모두가 경악하며 눈을 부릅떴다.
“우, 운청휘가 정지가를 죽였어! 이명이 나섰는데도!”
“이명이 아무리 후안무치해도 영단경 3단계의 무인이야. 그와 대적해도 좋은 일은 없을 텐데!”
어느덧 운청휘를 안타까워하는 이들마저 생겨났다.
비록 이명이 후안무치할망정, 그의 실력은 거짓이 아니었다.
“운청휘, 네놈에게 말했건만 감히 내 체면을 깎아?”
분노한 이명이 고함을 지르며 영력을 분출했다.
콰아아-
무수한 영단경의 기세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고, 하늘을 덮은 먹구름처럼 사방을 옥죄었다.
운청휘는 순식간에 뒤로 삼백여 장을 물러남과 동시에, 정지가의 시신을 이명 쪽으로 던져 주었다.
퍼억!
이명이 방출한 영단경의 기세는 정지가의 시신과 부딪쳤고, 곧 정지가의 시신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폭발하였다.
“으아아! 네놈을 반드시 죽이리라!”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이명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정지가를 구해 그의 조부에게 체면을 세우려 했건만, 구하기는커녕 정지가의 시신만 훼손하고 말았다.
차라리 나서지 않았더라면 정지가의 시신이나마 온전히 조부에게 돌아갔을 터였다. 정학이 이 때문에 더 분노한다면, 그는 정학에게 할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