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정지가도 그리 나섰지만, 보거라. 이미 죽지 않았느냐.”
몸을 피한 운청휘가 이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바닥에 흩어진 정지가의 일부를 힐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네놈도 나를 화나게 하는구나.”
운청휘의 어조는 평온했지만, 그의 눈이 한껏 가늘어져 있었다.
이명은 정지가와 달리 하찮은 날벌레처럼 몇 번이나 운청휘의 신경을 건드려왔으니, 더는 참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네놈을 화나게 했다고? 하하하……!”
이명이 큰 소리로 실소하더니, 다시 싸늘해진 얼굴로 운청휘를 노려보았다.
“헛소리는 이제 됐다! 죽어라!”
진법으로 보강된 천형대의 지면이 순식간에 갈라지기 시작했다. 무수한 흙이 지하에서 솟구쳐 오르며, 거대한 담을 형성했다.
슥! 슥! 슥! 슥!
네 번의 소리가 연달아 이어지더니, 수십 장 두께의 토벽이 사방에서 운청휘를 감싸 네모난 감옥을 형성했다.
“토 속성 오행의 힘?”
“잘 봐! 영단의 힘이야. 위력은 오행의 힘보다 훨씬 강해!”
“저 토벽을 보라고. 두께가 십 장은 되겠어. 보통의 신병이기로도 깨기 힘들게 생겼으니, 운청휘는 이번에 정말로 죽겠군!”
“정지가와는 다르게 처음부터 영단경의 무위를 썼군. 운청휘는 저항도 못 하고 죽겠어. 쯧쯧.”
여기저기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두께 십여 장에 이르는 토벽은 선천경의 무위로 부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백 명의 운청휘가 와도 토벽을 부수고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이명은 정지가처럼 방심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영단경의 무위를 사용해 운청휘를 가두었고, 이제 죽일 작정이었다.
“죽어라, 운청휘!”
이명의 두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가 두 손을 맞잡으며 꽉 움켜쥐자, 운청휘를 둘러싼 토벽이 순식간에 작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산 채로 운청휘를 짓눌러 폭파할 셈이었다!
점점 좁혀드는 토벽 안에서 운청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참천검집, 오행의 힘 중 무엇이 적당할지 모르겠군.”
잠시 저울질을 하던 운청휘는 마음을 정했다.
참천검의 검집은 그의 비장이 수이니, 함부로 드러낼 순 없었다.
“응?”
마음을 먹은 순간, 운청휘의 신식에 전송진이 감지되었다. 금빛이 흐르는 전송진에서 익숙한 청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도도?”
운청휘의 눈에 드물게도 놀라움이 스쳤다.
화려한 우의를 입고 금색 관을 쓴 소도도는 등에 몽둥이를 메고 있었다. 예전에 성공학관의 원장 마라가 내린 영양봉이었다.
또한 그의 손에는 일 장 길이의 대극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신식으로 살펴보니 성경 7~8단계의 무인이라도 맨손으로 부술 수 없는 대극이었다. 더욱이 순금으로 만들었으니 족히 천만 냥은 되어 보였다.
대극과 소도도의 위풍당당한 기세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그는 젊은 졸부인 동시에 백만 병사를 이끄는 대장군을 합친 듯했다.
“감히 나 소도도의 형제를 다치게 해?! 살려두지 않겠다!”
천형대로 날아오며 소도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의 신형이 번뜩이더니 몇 호흡 만에 천형대 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정학 영감의 손자는 어디 있지? 이 몸의 대극이 준비를 다 마쳤는데! 엥? 정지가는 어디 가고 이명이 있나?”
기세등등하게 외치는 소도도를 면밀히 살피던 운청휘가 다소 놀란 표정을 보였다. 어느새 그는 영단경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그의 몸을 살펴보니 단약과 천재지보의 기운이 가득했다. 단시간에 무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자원을 쌓아두었으리라.
다만 저만한 양을 단기간에 복용하면 후유증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소도도의 몸에는 어떠한 이상도 없었다. 누군가가 소도도를 도와 보약을 연화시켜 주고 있는 모양이다.
가장 이상한 일은, 그의 몸에서 마종의 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운청휘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궁우신이 직접 그에게 마종을 심는 광경을 목격했건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소도도!”
소도도를 보고 이명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소 사제, 자네의 형제란 누구인가?”
이명은 가까스로 웃어 보이며 소도도에게 말을 걸었다.
“소 사제? 네놈이 뭐라고 나를 그렇게 부르지?”
소도도는 이명을 한껏 깔보는 태도로 말을 이었다.
“이 몸의 형제는 운청휘다. 그를 만난다면 언제든 나를 대하듯이 하도록!”
둘의 대치를 신식으로 지켜보던 운청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명은 소도도를 두려워하는군. 이명뿐만이 아니다. 장로와 전수 제자들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뭐, 당신 형제가 운청휘라고!”
이명은 놀라 소리를 질렀고,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운청휘가 소도도의 형제라고? 맙소사, 이명도 운이 없군!”
“이명이 또 당했군그래. 저자를 화나게 한다면…….”
관전하던 이들 중 장로와 전수 제자들은 미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소도도가 천검종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장로급과 전수 제자급의 사람들 중 그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는 엉뚱하기 그지없었고, 동시에 자질이 뛰어났으며, 온갖 사고를 쳐도 원로급의 사람마저 손 댈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이는 그의 신분이 존귀하기 때문인데, 소도도는 이를 거침없이 이용하고 있었다.
원로인 정학을 ‘영감’이라 불러도 아무도 지적하지 못하는 상황이 그의 위치를 잘 보여 주었다.
“설마 내 형제를 여기에 가둔 게냐?”
이명의 반응에 소도도의 눈빛이 곧장 토벽으로 향했다.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스물스물 올라오기 시작했다.
“소, 소 사형께서 오해가 있는 듯하오. 나는 운청휘 형제와 대련 중이었소.”
이명은 비굴한 웃음을 지으며 단번에 소도도를 ‘사형’이라 칭했다. 그가 급히 손을 휘두르자, 운청휘가 갇힌 토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운 형제여……!”
토벽 안에 있던 운청휘를 발견한 소도도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즉시 살기를 거두고 날아와 운청휘를 덥석 끌어안았다.
“하하하, 자네가 천검종에 올 줄 알았는데 내 예상보다 일찍 왔어!”
소도도가 운청휘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감격에 찬 목소리를 냈다. 운청휘 또한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피는 통하지 않았어도, 천성대륙에서 유일하게 그가 형제로 삼은 이가 아니던가.
“거기 자네, 이리 와 보게!”
한동안 해후의 기쁨을 나누던 소도도가 별안간 관전하고 있던 한 청년에게 손짓했다. 그는 흰색 무복을 입은 전수 제자로, 소도도의 지명을 받아 순간 안색이 굳었지만 곧바로 웃으며 날아들었다.
“소 사형께서 어떤 가르침을 내리시려 저를 불렀는지요.”
“내 형제와 정지가가 생사결을 벌였다고 들었네. 그런데 정지가는 어디 가고 이명이 있는 건가?”
소도도가 일부러 관전하던 이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은 까닭이 있었다.
소도도는 언제나 운청휘를 위해 나서려 할 테니, 직접 물어보면 분명 흐지부지 넘어갔으리라.
하나뿐인 의형제를 위해 그가 못 할 일이 무엇이랴? 소도도는 일부러 관전하던 이를 불러들였고, 백의무복의 청년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사실은 운청휘가 정지가와 결투를 벌였는데…….”
백의무복의 청년은 조금의 과장도 생략도 없이, 그가 본 것을 전했다.
이야기를 듣는 소도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순금 대극을 내팽개치고 등에 멘 영양봉을 꺼내 들었다.
“이명, 이 새끼가!”
소도도의 고함과 함께, 이명을 향한 일격이 날아들었다.
이명은 소도도의 공격을 막지 않았다. 소도도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가 영단경의 힘으로 막는 즉시 트집을 잡고도 남았다.
콰득!
영양봉이 어깨에 직격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이명이 몸을 휘청거렸다. 그의 입가를 타고 가느다란 선혈이 흘러내렸다.
“소 사형, 이 한 방으로 정리를 마쳤다고 봐도 좋겠습니까?”
이명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며 억지로 웃음을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소도도를 때려죽이고 싶었고, 그의 무위라면 가능했다. 그러나 소도도는 종주의 제자다. 같은 전수 제자라고 해도 그가 함부로 손댈 수 없었다. 그저 참고 견디는 수밖에.
“정리는 개뿔! 내 형제를 사지에 몰아넣었는데 화풀이로 그치겠는가? 이 몸이 네놈을 죽이고 말겠네!”
말을 하며 소도도의 일격이 또다시 날아들었다.
“당신과 싸우고 싶지 않지만, 이건 지나친 처사가 아닙니까!”
안색이 어두워진 이명이 항변하는 동시에 소도도의 영양봉을 피해 달아났다.
슈우우-
동시에 그의 온 몸을 영단의 힘이 촘촘하게 감싸며, 단단한 보호막을 형성했다.
“응? 감히 피한 건가? 그리고 영단의 힘으로 몸을 보호했는가?”
소도도가 혀를 차더니 곧 얼굴 가득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리하면 방법이 없는 줄 아는가? 거기 몇 명, 이리 오게!”
소도도가 관람하던 이들 중 몇 명을 시선으로 지목하자, 장로 3명과 전수 제자 4명이 훌쩍 날아들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이명은 혈살종과 결탁했다는 의혹이 있으니, 종주 사부께 데려가 확실히 하겠네. 나를 도와 이명을 잡아 주게!”
소도도가 입술을 할짝이며 말했다.
불려온 장로와 전수 제자들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소도도, 당신……!”
이명의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그들 7명이 연합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을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심지어 종주를 내세워 그들을 불러온 점도 얄미웠다. 그들이 아무리 내켜하지 않았어도, 결국 나왔다는 점에서 소도도 못지않게 원망스러웠다.
“종주 사부?”
운청휘는 위화감을 느꼈다.
궁우신이 마종을 심은 직후, 소도도를 천검종으로 끌고 가지 않았던가. 어찌 그를 사부라 부르며 따를 수 있단 말인가?
혹여 소도도의 천부적인 재능이 화려하게 꽃피어, 궁우신이 이를 알아본 걸까?
그럴 가능성은 낮다.
외부에서 기재라 불릴지언정, 궁우신의 눈에 들 만한 인재가 아니므로.
더욱이 궁우신이 소도도의 재능을 알아보았다고 해도, 마종을 심는 편이 더 간단하리라. 어찌 마종을 거두고 제자로 삼았단 말인가?
“뭐 하고 있는가. 종주 사부의 일을 그르치고 자네들이 무사할 성싶은가?”
소도도가 재촉했다.
“저희가 그럼 공격을…….”
장로 3명과 전수 제자 4명이 함께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네, 이명. 당신은 엉…… 아니 건드릴 수 없는 사람에게 죄를 지어서!”
그들은 ‘엉터리’라고 말하려다 즉시 말을 바꿨다. 그들은 영단경의 무위를 끌어올리며, 합심하여 일격을 준비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이명 또한 빠르게 영단의 힘을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