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오직 성녀의 목소리만이 그토록 마음을 편안하게 울리는 운율을 만들 수 있을 터였다.
소도도는 빠르게 손을 뻗어 옆에 서 있는 여종의 혈을 짚어 혼절시켰다.
곧이어 오행의 힘을 일으킨 그가 목각 인형을 누각 안으로 들여보냈다.
쾅!
곧바로 누각의 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아리따운 여인이 황급히 뛰쳐나왔다.
“이, 이 목각 인형을 누가 주었나요?”
소도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 놀라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그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글자를 더해도 그녀의 외모를 설명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살아오면서 이토록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다고 단호히 맹세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아름다움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과 거룩함이 깃들어 있었다. 어떤 음흉한 마음도, 그녀의 앞에서는 덧없이 흩날리며 그저 우러러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세상에 어떤 여인이 눈앞의 여인과 감히 겨룰 수 있을까. 소도도는 말 그대로 넋을 잃었다.
“이 목각 인형 누가 준 것이죠?”
소도도가 넋을 놓자 채아가 다시금 물었다. 말투는 침착했지만, 그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서툰 솜씨로 조각한 목각 인형. 이 인형의 의미는 오직 운청휘와 채아만이 알고 있었다.
다소 조잡해 보일지언정, 6살의 소년이 깎았으니 어찌 섬세할 수 있을까?
“내, 내 형제 운청휘가 전해 달라고 부탁했소.”
평소 자기애가 넘치고 자신만만하던 소도도였지만, 채아의 앞에서는 쑥맥처럼 말을 더듬고 있었다.
구음한맥의 체질을 이겨낸 후, 채아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고귀하고 성결한 기운은 모든 생명을 위축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소도도가 이처럼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처…… 청휘 오라버니가!”
채아는 벼락을 맞은 듯 전율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목각 인형을 본 순간, 그녀는 이 인형을 건네던 6살의 운청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오래되었지만 더없이 소중한 기억을, 목각 인형이 불러 왔다.
더욱이 운청휘와 관련된 자가 직접 들고 왔다니, 지금의 기분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청휘 오라버니! 역시 청휘 오라버니야.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셨어……!”
격정에 휘말린 채아가 말을 내뱉다 크고 맑은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긴 눈물길이 났다.
3년, 꼭 3년 만이었다. 갑작스레 실종된 그녀의 오라비가, 마침내 돌아왔다!
“꼭 돌아오시리라 믿고 있었어요. 여, 역시 저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시는 오라버니예요…….”
채아의 모습을 마주한 소도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속으로 연신 감탄하고 있었다.
‘설마 성녀가 운 형제의 나무 조각을 보고 감격할 줄이야. 게다가 운 형제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다니!’
얼떨떨해하면서도, 소도도가 가까스로 머릿속을 정돈하고 물었다.
“성녀, 당신은 운 형제의 여동생이오?”
채아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윽고 그녀가 황급히 덧붙였다.
“하지만 제 성은 운 씨가 아니랍니다. 그저 명목상의 여동생이죠.”
소도도는 더욱더 아리송해졌다.
굳이 친동생이 아님을 밝히는 이유를 그가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있을까.
특히나 그녀가 ‘명목상’이라는 말에 굳이 힘을 주는 것도, 소도도는 놓치지 않았다.
“청휘 오라버니는 어디에 계시나요? 부디 데려가 주세요!”
채아는 이제 어떠한 의심도 품지 않은 듯, 소도도를 바라보며 간절하게 말했다.
“……좋소!”
소도도가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다.
“참, 그렇지! 운 형제가 이 말도 전해 달라고 했소!”
이윽고 정신을 차린 그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무슨 말이죠?”
채아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내가 돌아왔어. 나의 모든 것이!”
가급적 운청휘의 말투와 유사하게 흉내를 내며 소도도가 말했다.
다음 순간, 채아의 두 눈이 커지더니 그녀는 그대로 굳는 듯했다.
멍하니 서 있던 그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돌아왔어. 나의 모든 것이…….”
몽롱하게 풀렸던 그녀의 눈이 총기를 띠며 반짝였다. 드디어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운청휘는 모두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부러 이 말을 전해온 것이다.
“여전하시구나.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여전히 3년 전의 오라버니야……!”
실종되기 전, 운청휘는 줄곧 채아를 아끼는 다정한 오라비였다. 언제나 최선을 다해 그녀를 지켰고, 그녀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런 그가 실종되었을 때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으나, 이제는 그가 돌아와 단 한마디로 그녀의 세상을 든든하게 받쳐 주었다.
그녀가 들었던 어떤 말보다도, 믿음직스럽고 뭉클한 말이었다.
“크흠! 서, 성녀. 운 형제에게 가겠소?”
소도도가 옆에서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에요. 때가 되면 오라버니께서 저를 찾아오실 거예요.”
채아가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재회의 기쁨으로 술렁이던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차였다.
그가 모든 것이 돌아왔다고 했으니, 그녀도 모든 것을 그에게 맡기고 기다릴 수 있었다.
당장 만나러 갈 수도 있으나, 이리 간결한 말만 전했다면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제 영패예요. 무슨 일이 생기거든 이것을 가지고 저를 찾아오세요.”
채아가 서둘러 품에서 영패를 꺼내 건넸다.
이 성전에서는 채아의 영패가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소도도가 그 의미를 어찌 모를까.
“그래, 알겠소!”
소도도는 영패를 받고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내 이름은 소도도요, 운 형제와 말 그대로 형제나 다름없다오. 서, 성녀! 부디 내 이름을 기억해 주시오.”
이때의 소도도는 무척 긴장하면서도 겨우 말을 마쳤다. 선녀와도 같은 채아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준다면, 더없는 영광이리라.
“기억할게요, 소 오라버니!”
겨우내 죽어 있던 나무에 작은 이파리가 맺히듯, 채아가 싱그러운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소도도는 또다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웃음은 만물을 되살리는 듯했다.
“지금…… 오라버니라 부른 거요?”
소도도가 오래도록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청휘 오라버니의 형제와 다름없는 분이라면, 채아에게 자연히 오라버니가 되지요. 소 오라버니.”
채아는 웃음을 잃지 않으며 다시금 그를 오라버니라 불렀다.
운청휘가 보내 목각 인형과 말까지 전하게 한 사람이니, 그가 얼마나 소도도를 신뢰하는지 알 수 있었다.
운청휘가 신뢰하는 이라면, 채아는 기꺼이 소도도를 친근히 대할 수 있었다.
“그, 그럼 이 오라버니가 여동생을 처음 뵙겠소. 그렇지, 이것은 오라버니가 주는 선물이니, 부디 받아 주시오!”
급히 아공간 반지 속을 헤집은 소도도가 수수한 반지 하나를 건넸다.
남녀 모두가 착용할 수 있는 반지였지만, 수수한 외관과는 달리 특별한 물건이었다.
천검종의 종주 궁우신이 보호용으로 줬으니, 어찌 특별하지 않을까!
물론 궁우신은 이런 데에 쓸 줄 몰랐겠지만…….
궁우신이 준 반지는 영단경 9단계 무인이 전력으로 공격을 퍼부어도, 최대 3번까지 몸을 지킬 수 있는 보호용 반지였다.
채아는 극구 사양했지만, 소도도와 운청휘의 관계를 생각해 받아들었다.
“운 형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내 바로 전해 줌세!”
떠나기 전 소도도가 물었다.
“있어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채아의 얼굴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이 말을 전해 주세요. 기다리겠다고…….”
“어……?”
소도도는 살짝 어리둥절했다. 미묘한 뜻이 담겨 있는 듯한 말이기에 잠시 멀뚱멀뚱 서 있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있는 그대로, 운 형제에게 전해 줌세!”
성전에서 나온 소도도는 곧바로 운청휘가 준 주소를 찾아갔다. 운청휘는 숙소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운 형제, 목각 인형은 채아 여동생에게 전해줬네!”
운청휘를 보자마자 소도도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채아 여동생?”
고개를 갸웃하던 운청휘는 곧 피식 웃고 말았다.
그와 소도도가 의형제이니, 소도도가 부르는 호칭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운 형제, 그녀도 자네에게 전해 달라는 말이 있었네.”
소도도가 자리를 잡고 앉아 스스로 차를 한 잔 따라 마셨다. 목을 축인 그가 본론을 꺼냈다.
“무슨 말이지?”
운청휘가 물었다.
“기다릴게요…….”
소도도는 최대한 채아와 비슷하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목소리를 간드러지게 낸들, 얼굴에 홍조가 돌지 않아 핏대를 세워가며 시뻘겋게 물든 얼굴로 채아의 말을 전했다.
“기다린다라…….”
다소 흉한 몰골이었지만, 운청휘는 뜻을 알아들었다. 그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운 형제. 자네와 채아는 정말 친남매가 아닌가?”
소도도는 찻잔을 내려놓고 물었다.
“그래.”
운청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부터, 채아와 그가 혈연관계가 아님을 알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을 알기 전에도, 안 후에도 채아는 여전히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소중한 여동생인 것을.
“참, 그렇지! 운 형제, 자네에게 말해 줄 게 하나 더 있다네!”
소도도가 불쑥 화제를 돌렸다.
“자네가 천형대에서 대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렸는지 아는가? 바로 엽천일세! 성공학관의 성도 엽천 말이네!”
“엽천?”
운청휘도 다소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성공학관의 성도였던 엽천은 소도도와의 원한으로도 얽혔지만, 3년 전에도 운청휘와 간접적으로 얽힌 인물이 아니던가.
당시 운청휘의 정혼자였던 사소연은 더 윤택한 삶을 위해 황성 엽가의 소가주 엽천을 선택했고, 운청휘는 그녀의 행복을 빌며 보내주었다.
“그리고 운 형제, 자네 사소연도 아는가? 엽천이 말하길, 사소연이 그를 시켜 전하게 했다네.”
말을 하는 소도도의 눈가에 의혹이 짙게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