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선제귀환-167화 (167/430)

제167화

“마침내 선천생령에 도달했군!”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거수 운청휘의 낯빛이 바뀌었다.

“심마선겁(心魔仙劫)인가…….”

운청휘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빛으로 반짝였다.

“우화성선만이 심마선겁을 맞거늘, 어찌 이리 빠르지?”

무인은 선인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천겁이라는 벽을 마주하게 된다.

천겁은 선겁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구 할 이상의 사람들이 뇌겁을 마주하곤 했다. 사방에서 내리꽂히는 벼락과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일 할의 사람들이 마주하는 선겁 중에서도 가장 두려운 선겁이 바로 심마선겁이다. 심마선겁은 꿈의 형태로 나타나, 헤어 나올 길이 없었다.

“음? 인간 육신의 연결이 끊어졌군.”

이상을 알아차린 거수 운청휘가 순식간에 하늘로 솟구쳤다. 허공에 잠시 신형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곧바로 거수가 천운왕조 방향을 향해 질주했다.

“정겁만은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야겠군.”

감출 수 없는 걱정이 운청휘에게서 흘러나왔다.

다양한 꿈의 형태로 나타나는 심마선겁. 그중에서도 사랑에 관련된 ‘정겁’은 치명적이었다.

이때의 정은 단순한 사랑이 아닌 모든 형태의 정을 뜻했다. 운청휘가 심마선겁에 빠졌을 당시, 그는 혈육에 대한 정겁을 겪어야 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당시의 정겁에서 운청휘는 반역자가 되어 그의 부친에게 살해당했다.

꿈인 줄도 몰랐던 운청휘는 절망 속에서 죽어갔고, 지요여제가 그를 깨우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운청휘는 없을 터였다.

“부모님과 채아, 이 세계에서 중요한 이들이라 할지라도, 다시는 함락되지 않겠다.”

그는 선제의 의지를 지녔고, 신념도 확고했다. 온 세상이 그를 등지더라도 그의 가족은 자신을 저버리지 않을 터였다.

혈육에 대한 정을 제외하면 우정과 인류애, 사랑이 남을 터였다.

운청휘는 깊이 교제하는 이들이 극히 적었지만, 그만큼 그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인류애의 정겁을 만나더라도 운청휘는 당황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없었고, 최선을 다해 인간에 대한 헌신을 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은 사랑이었다.

그는 사소연과의 혼담이 허사가 된 후, 어떠한 여인도 마음에 품지 않았다. 선계의 가장 꼭대기에 서 있는 그의 마음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다만 천성대륙에 돌아온 후, 그의 마음을 움직인 이가 있었다.

이염죽.

그녀와 마주친 횟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지만, 운청휘는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이염죽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염죽은 여전히 신비에 싸인 여인이지.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내게 마음이 없다고 보는 게 정확하겠군. 그녀는 수련에 영향을 받고 있으니 점점 감정이 무뎌질 터. 내가 그녀에게 마음을 밝혔다면 거절당하지 않겠는가. 그때의 결과는 상상하고 싶지 않군.’

사랑의 정겁에 빠진 이는 그 연심을 거절당한 순간, 파멸에 이른다.

의지가 꺾이고, 정신을 구성하는 체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선제라 하여도 영원히 꿈에 갇혀, 비탄에 잠긴 채 사라져 가는 것이다.

서북쪽 황무지, 지하 삼백여 장 깊은 곳.

선천생령에 도달한 운청휘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호법을 서고 있던 김태연이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지만, 그의 기운은 소멸하기라도 한 듯 말끔히 없어진 후였다.

그와 동시에 깊은 산 속의 절벽에서, 운청휘의 영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벽 아래는 시커먼 심연이 주둥이를 벌리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벼랑 아래에서 휘몰아쳤다. 아무리 영혼의 상태일지언정, 모골이 송연한 광경이었다.

운청휘는 이 장소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장신연!”

벼랑 끝에서 불쑥 옥처럼 흰 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어서 다른 손이 나타났는데, 묵빛 화살을 쥐고 있었다.

이염죽이 늘 지니고 다니던 장궁이 아닌가! 운청휘는 단번에 손의 주인을 알아보았다.

곧, 그의 예상대로 절벽 아래에서 흰옷을 입은 이염죽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었다.

“운청휘!”

이염죽이 뜻밖이라는 듯 말을 걸어왔다.

“선천생령이 되었네?”

그녀는 한눈에 운청휘의 경지를 알아차리고, 단조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네 도움이 필요하다.”

그녀의 아름다운 까만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수련을 거듭할수록 그녀는 텅 빈 그릇이 되어가는 듯했다.

“대가는?”

“대가?”

대가라는 말에 운청휘의 눈에 언뜻 실망이 스쳤으나, 그는 곧 담담하게 답했다.

“우선 도와주마. 대가는 그 후에 알려주겠다.”

“좋아!”

이염죽도 사양하지 않고 화살통에서 3개의 화살을 뽑았다.

“이 3개의 파신전을 등에 얹어. 그것으로 보호할 수 있을 거야.”

운청휘가 3개의 파신전을 받고 등에 올려놨다.

“응?”

3개의 파신전을 등에 얹은 순간, 운청휘는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는데, 무엇이 허전한지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운청휘, 항상 지니고 있는 칼집은?”

이염죽이 갑자기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참천검집…….”

그제야 운청휘는 허전함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늘 등에 메고 있었던 검집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왜 검집이 없는 이유조차도 떠오르지 않아, 운청휘의 눈동자는 혼란스러운 빛으로 물들었다.

‘잠깐. 내가 왜 장신연에 있는 거지?’

또 다른 의혹이 고개를 들었지만, 마찬가지로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운청휘는 영문도 모른 채,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 * *

흡혈 박쥐족의 성지와 연결된 명계. 어두운 하늘에 이염죽의 신형이 고고히 떠 있었다. 그녀는 달려드는 무수한 혼들을 장궁으로 내리쳤고, 끊임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우르릉! 우르릉!

대지는 쉴 새 없이 거친 비명을 질러 댔고, 많은 영혼들이 파신전에 꿰뚫려 부서졌다.

“저승의 천화, 반드시 오늘 네놈을 굴복시키겠다.”

이염죽의 목소리는 아름다웠지만, 아무런 감정도 없이 단조롭게 울렸다.

“헛소리하지 마라! 날 굴복시키려거든 네 실력을 보이거라!”

사방에서 음습한 소리가 들려오더니, 한 줄기 화염이 몸을 일으키자 대지는 온통 불바다가 되어 넘실거렸다.

운청휘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음습한 기운을 풍기는 불바다가 ‘저승의 불’로 만든 것임을 알 터였다.

열 손가락에 꼽는 천화 중에서도 저승의 불은 염라왕의 화신이라 불리며 선계에서도 전설로 내려온다.

이염죽의 흰 손이 세 개의 화살을 동시에 꺼내더니 활시위를 당겼다.

“응?”

파신전을 쏘아 보내려던 이염죽이 별안간 흠칫하며 동작을 멈췄다.

“누군가 도심마선겁(渡心魔仙劫)에 빠졌어. 게다가…….”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이염죽의 신형은 그녀가 왔던 길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저승의 불이 닿는 범위를 벗어나자 해도 달도 없이 어두운 명계의 대지만이 펼쳐졌다. 그 캄캄한 상공을 반나절 가까이 날아가자,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장벽이 보였다. 봉천진지진의 결계였다.

이염죽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계속 날아가 봉천진지진의 결계를 뚫었고, 서북쪽 황무지의 성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누군가 봉천진지진에 또 다른 진을 쳐 두었군. 내 파신전의 기가 느껴지는 걸 보니 운청휘구나.”

사방에서 부는 모래폭풍이 현세로 돌아왔다는 감각을 일깨워 주었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다시 날아가 이 각 후에는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하늘에 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까마득하게 펼쳐진 모래사막의 한 지점에 머물렀다.

지하 삼백여 장 아래, 그곳에 있는 운청휘와 김태연이 이염죽의 기감에 감지되었다.

“몸은 여기 있지만, 기도 영혼도 느껴지지 않아. 역시 도심마선겁이구나!”

상황을 살피던 이염죽으로서도 뜻밖이었다. 그녀가 아는 도심마선겁은 무인이 신선이 되는 순간 나타나는 법이었다.

의아함을 품고, 그녀는 순식간에 삼백여 장 아래의 지하에 모습을 드러냈다.

“흡혈 박쥐족의 김태연, 은공을 뵙습니다.”

이염죽을 알아본 김태연이 곧바로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었다.

이염죽은 한 달 전 궁우신의 어혼성숙비전에서 그녀를 구해냈으니, 이렇게 예를 다해도 감사함을 표하기에 부족했다.

“별말씀을!”

감정에 북받친 김태연과 달리, 이염죽은 그녀를 한번 곁눈질하고는 걸어가 운청휘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그때, 운청휘의 영혼이 겪고 있는 상황이 전부 이염죽의 머릿속으로 녹아들었다.

“정겁에 빠졌군. 하필 대상이 나라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이염죽의 눈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빛을 띠고 있었다.

운청휘는 그저 몇 번 만났을 뿐이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다만 운청휘와 달리 이염죽은 오직 그의 실력만을 평가했다.

이염죽이 접했던 무인 중 그는 가장 뛰어난 자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잠시 후, 이염죽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수련으로 감정이 무뎌졌으니, 이번 생에 연정을 품을 일이 없는데. ……이런, 하필이면 장신연이라니.”

이염죽의 호흡이 무거워졌다.

“하필 ‘나’를 도와 장신연에 들어갔구나!”

그때, 정겁에 빠진 운청휘와 그 속의 이염죽은 심연 아래 삼천여 장을 내려가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 일며 이염죽도 버티지 못해 무수하게 베인 자국에서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가련한지, 운청휘는 별안간 마음이 아파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십계 오행의 힘이여!’

그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열 가지 오행의 힘이 동시에 나와 이염죽과 그의 몸을 감쌌다. 이곳의 바람이 아무리 거세다고 한들, 영단경의 힘으로 파괴할 수 있었다. 다만 운청휘는 선천경의 힘으로 오행을 일으켜 바람을 막아냈다는 점이 기이했다.

운청휘의 품을 벗어나려던 이염죽도 이 광경을 보고 의아했는지 얌전히 안겨 있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심연의 밑에 내려가면 최대한 너를 돕겠다.”

운청휘는 품에 안긴 아름다운 이염죽을 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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